학생들의 학교방학이 시작될 때마다 개 교회들은 비례하여 분주해지기 시작한다. 선교철(Mission)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선교하는 데 무슨 특별한 계절이 있으랴 만은 특별히 학생들의 방학에 맞추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들고 바삐 움직이는 계절을 보내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매년과 다름없이 본인이 섬기는 교회 역시도 조만간 16명의 성도들이 목회자와 함께 복음(福音)의 불모지로 단기선교를 떠난다.

언젠가부터 한국 교회들의 해외선교가 급격히 왕성해 지더니, 이제는 "기독교 한인세계선교협의회"(KWMC)의 보고에 의하면, 오늘날 전 세계에 파송된 한국인 선교사의 수가 자그마치 2만 여명에 육박하고 있다고 한다. 이 숫자는 미국에 이어 세계 제 2위의 선교사 파송국 임을 증명하는 것일 뿐 아니라, 성직자(65%)든 평신도(35%)이든지를 막론하고 한국 교회에 뜨거운 선교의 불이 붙어 있다는 증거다. 더구나 매년 각 선교단체들 또는 개 교회들에서도 학생들의 방학에 맞추어 단기선교의 열풍이 유행처럼 번져 나가고 있다. 이러한 단기선교 여행은 특히 젊은이들이 선교에 대한 도전과 경험을 함께 겪을 수 있다는 점에서 호응이 높아 많은 개 교회의 프로그램이 되고 있다.

하지만 한편 우려되는 점도 많다. 그것은 장기적 선교든 단기적 선교든 간에 분명한 "신학적 정립과 목적의식"이 결여된 선교 활동은 차라리 안 하느니만 못하다는 이야기다. 많은 한국 교회나 선교 단체들은 정작 중요한 선교 신학에 관한 개념적 정리가 없으면서도 그저 자신들이 파송한 선교사의 수나 재정 지원 등의 외형적인 면에만 관심하고 자랑하는 경우가 많다. 한 마디로, 가장 중요한 것에 대한 검증이 전무하다는 생각이다. 물론 매 사람마다 다르듯이, 신학적 범주에 따라 선교에 대한 신학적 견해도 다를 수밖에 없다고 본다. 근본주의적 입장에서는 선교를 교회의 개별인간에 대한 구원론적 개념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지만, 진보주의적 입장에서는 소위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라는 개념으로, 선교지 전체의 사회현실과 구조개선을 선교의 핵심 과제로 삼고 있다. 물론 이 둘은 동전의 양면처럼, 다 중요한 이야기다. 그러나 이것이 근본주의적 입장이든, 진보주의적 입장이든 간에, 선교 신학에 대한 냉철한 정립만큼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얘기다. 그렇지 않고 "일단 하고 보자"는 식으로 무작정 뛰어 드는 일은, 그저 "너도 죽고 나도 죽는" 물귀신 행위나 마찬가지일 뿐이라는 말이다.

세상은 이제 한없이 좁아졌다. 사람들은 더 이상 이 세상을 끝없이 넓은 지역 공간 개념으로 생각지 않고, 그저 하나의 "커다란 마을"(Global Village)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다. 이런 시대에 사는 우리가, 과거와 같은 막연한 "제국주의적 선교이론"을 가지고 선교에 임한다면 그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과거 제 1세계 백인 선교사들은 "기독교"라는 자신들의 종교를 무작정 세계 구석구석에 확장하기 위한 정복자로서의 제국주의적 사고를 가지고 선교에 임했다. 그러나 그들의 선교 행위의 결과는 사실상, 종교를 빌미로, 힘 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정복하고 빼앗는 일에 선봉장 격이 되고 만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선교가 지배자들의 "정복"을 돕거나, 가진 자들의 "소유 확장"의 길을 터주는 꼴이 되고 만 셈이다. 솔직히 이는 기독교 정신을 역행한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선교 개념은 이제 시대착오적 발상이다. 이제는 다만 더 많은 것들을 소유한 자들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아무 조건 없이 "나누고, 지극히 겸손한 모습으로 섬기는" 그리스도의 정신을 실천하는 것이 바로 선교라고 하는 올바른 신학적 정립이 필요한 것이다.

잘난 사람이 못난 사람을 향해서, 또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을 향해서 단순히 우월감만을 가지고 무엇을 도와 주려한다거나, 또 주입하려는 것은 참으로 합당한 선교의 정신과 목적에 위배되지 않을 수 없다. 또 장로교는 장로교를, 감리교는 감리교를, 침례교는 침례교를, 선교지의 타 종교인들에게 전하는 것도 분명히 말해서 올바른 선교라 할 수 없다. 이러한 일은 도리어 선교지를 어지럽히는 위험한 선교 제국주의적 노력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사실 선교 현장에 나가면, 지나친 자긍심으로, 자신의 교파적, 민족적 기독교를 선교지에 무조건 이양하려는 것을 일차적 목표로 삼는 이들이 있음을 보게 된다. 그래서 선교에 임하는 자들은 무조건 자신들의 소속 교회나 교단, 그리고 국가나 배경이 그리 자랑스러워서는 안 됨을 늘 명심해야만 할 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수년 전에 영국의 어느 대학에서 선교학을 공부하던 한 한국인 목사가 아프리카 선교사로 사역한 적이 있는 다른 한 외국인 목사를 만났는데, 상당 기간 동안, 그가 이 한국인 목사와 교제하는 것을 꺼려하더라는 것이다. 심지어는 아예 대화조차도 기피하려 들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 알고 보니, 다름 아니라, 그가 선교사역을 펼치던 선교 지역에서 본 한국인 선교사들이나 그리스도인들의 막무가내 식 선교활동에 엄청난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한국 그리스도인, 더구나 한국인 선교사라면 무조건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말을 꼭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고 본다.

오늘날 장기선교든 단기선교든 간에 세계 각 국에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는 한국 기독교 내의 선교단체와 개체 교회들의 숫자를 헤아리는 일이 얼마나 난무한지, 그것조차도 파악하기가 무척 힘들다고 한다. 그만큼 선교에 열심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선교 사역활동은 자신들의 신학사상과 신앙만을 근거로 우격다짐 격인 경우가 많다고 한다. 선교란 자신의 것으로 피선교인들에게 주입하거나 일시적인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을 개선하고 올바른 믿음의 세계로 인도해서 현실 생활에 유익이 될 뿐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삶의 방법"이 있는가를 "나누고 섬기는 일"이다. 이것이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을 찾는" 그리고 "등불을 가지고 잃어버린 동전을 찾는"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일 것이다. 이 선교철에 선교의 방법론을 좀 더 냉철하게 숙고함으로서 올바른 해외 선교에 임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