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부지역 단장회의에 참석하고자 LA에 내려갔습니다. 산호세에서 LA까지 가는 길에는 3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5번 인터스테이트 도로와 101번의 프리웨이를 타는 방법, 아니면 1번 해안도로를 타는 것입니다.
5번 도로가 5시간, 101번은 6시간이 걸리며, 1번 도로는 8시간이 걸리는 코스입니다. 그 동안 주로 이용한 도로는 5번 도로였습니다. 사막을 가로지르는 5번 도로의 직선 코스는 달리는 기분 말고는 볼 것도 없고 지루할 뿐 입니다. 101번은 가끔 1번 도로와 합쳐지면서 남쪽 지역에서는 바닷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참새가 방앗간을 어찌 그냥 지나가겠습니까? 여행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이번 기회를 살려 그 유명한 "캘리포니아 1 번 도로"를 사냥하기로 마음을 굳혔습니다.
몬트레이의 환상적인 절경을 보면서 사진도 찍고, 모래사장을 걷기도 하고, 태평양의 초록색 바다를 마음껏 바라보기도 하였습니다. 레드우드와 Beach를 함께 볼 수 있는 "빅 서"도 지나고, 1940,50년대 헐리웃 배우들을 매 주말 LA에서 불러와서 호화파티를 벌였던 신문재벌 "허스트"의 별장을 멀리 바라보며 지나갔습니다.
퀘퀘한 냄새가 나서 발길을 멈추자 수 천 마리가 모여 있는 "바다사자" 의 해수욕도 볼 수 있었습니다. 모래 위에 늘어져서 썬탠을 즐기는 녀석들을 보니 "개 팔자가 상 팔자"가 아니라 "바다사자 팔자가 상 팔자"로 바꿔야 할 것 같습니다.
부러움을 뒤로 한 채 달린 1번 도로는 듣던 대로 "환상의 도로" 였습니다. 경치에 취해 운전하다가 하마터면 낭떠러지로 떨어질 뻔 하는 아찔한 순간도 있었습니다. 4시간을 운전하고 나니 시장기가 돌기 시작했습니다. 이른 아침에 아내가 싸 준 도시락을 꺼냈습니다. 실로 오랜 만에 보는 보온 도시락이었습니다.
30년 전, 중학교 때 였습니다. 한창 유행하던 보온도시락은 학교 점심문화를 송두리째 뒤바꿔 버렸습니다. 밥도 따뜻하려니와 김치국물이 새는 일이 없었고, 여름에는 저녁에 먹어도 쉬지를 않았고, 겨울에는 난로에 얹어 놓을 때 좋은 자리에 놓으려고 싸울 필요도 없었습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쌀밥을 먹는 것은 그야 말로 학교 가는 낙(?)을 회복케하는 원천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학생들의 손에는 큰 가방과 함께 작은 보온 도시락 가방이 악세사리인 양 자랑스럽게 들려 있었습니다. 대학교 2학년 초, 그 후로 보온 도시락을 싸 간 기억이 없습니다. 어머님이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결혼 후에도 도시락을 싸갈 일이 별로 없어서인지 보온 도시락은 뇌리 속에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알뜰한 아내는 누가 싸게 파는 것을 샀는 지, 아니면 세일하는 것을 샀는 지 아무튼 따뜻한 온기를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앙증맞은 보온도시락을 마련하여 점심을 싸 준 것입니다.반찬은 간단하게 두 종류, 돼지불고기 약간과 김치를 볶은 것 뿐이었습니다.
시장이 반찬인지라 한 입을 허겁지겁 문 순간 갑자기 울컥하는 강한 감동이 꿈틀대며 치고 올라왔습니다. 조선 마지막 왕이 육계장을 먹으면서 그 맛과 요리사의 마음을 읽고 울었던 영화 "식객"의 한 장면으로 비유한다면 지나 친 비유일까요?
전날 저녁에 남편을 위해 무엇을 준비할까 하는 아내의 고민이 담겨 있었고, 왜소한 남편, 거기에다 마음도 좁은 남편을 위해 정성과 사랑으로 만든 따스한 마음을 읽을 수 있었기에 느껴진 감정이었습니다. 흰 쌀밥을 먹지 말라는 의사의 권유로 잡곡밥과 함께 기름기가 없는 돼지고기, 먹기 좋게 썰어서 만든 김치 볶음을 통해서 느껴진 아내의 사랑은 굴절된 마음의 한 구석을 환하게 비춰주었습니다.
고마움, 그리고 미안함...이제 중년의 꼭지점에 이르른 아내와 나. 돈 없는 신학생 시절부터 학비 대 주랴, 생활비 마련하랴, 아기 키우랴, 1인 3역을 하며 억척스럽게 살아온 아내의 삶이 주마등 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런 아내는 결혼 생활 중에 크고 작은 수술을 수 차례나 하였습니다. 따스한 말 한마디 준 적이 없었던 남편, 결혼 생활 15년 동안 이사만 15번 이었으니 여자로서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했겠습니까?
귀한 딸 고생시켰으면 마음이나 넓어 상처나 주지 말았어야 하는데, 똥고집과 자존심은 있어서 나 만난 게 행복 아니냐고 큰 소리치며 당당하게 나간 적도 있으니... 사역자 이기에 인간이 되기를 내 마음에 주문해 봅니다. 눈물을 흘리며 아내가 싸 준 도시락을 먹었습니다. 이제 좀 더 잘 해 주겠노라는 비장한(?)각오를 하면서 괜히 죄 없는 돼지고기를 질끈질끈 씹어 물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고, 가장 비싼 점심을 먹고 있었습니다.
아내가 싸 준 보온도시락! 아내는 도시락 속에 사랑을 담았고, 나는 그 속에서 행복을 먹었습니다.
장애인의 달, 4월. 나의 보잘 것없는 삶이지만 밀알사역을 통해 장애인들에게 사랑을 담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나의 작은 사랑을 통해 행복을 떠 먹기를 소망합니다.
5번 도로가 5시간, 101번은 6시간이 걸리며, 1번 도로는 8시간이 걸리는 코스입니다. 그 동안 주로 이용한 도로는 5번 도로였습니다. 사막을 가로지르는 5번 도로의 직선 코스는 달리는 기분 말고는 볼 것도 없고 지루할 뿐 입니다. 101번은 가끔 1번 도로와 합쳐지면서 남쪽 지역에서는 바닷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참새가 방앗간을 어찌 그냥 지나가겠습니까? 여행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이번 기회를 살려 그 유명한 "캘리포니아 1 번 도로"를 사냥하기로 마음을 굳혔습니다.
몬트레이의 환상적인 절경을 보면서 사진도 찍고, 모래사장을 걷기도 하고, 태평양의 초록색 바다를 마음껏 바라보기도 하였습니다. 레드우드와 Beach를 함께 볼 수 있는 "빅 서"도 지나고, 1940,50년대 헐리웃 배우들을 매 주말 LA에서 불러와서 호화파티를 벌였던 신문재벌 "허스트"의 별장을 멀리 바라보며 지나갔습니다.
퀘퀘한 냄새가 나서 발길을 멈추자 수 천 마리가 모여 있는 "바다사자" 의 해수욕도 볼 수 있었습니다. 모래 위에 늘어져서 썬탠을 즐기는 녀석들을 보니 "개 팔자가 상 팔자"가 아니라 "바다사자 팔자가 상 팔자"로 바꿔야 할 것 같습니다.
부러움을 뒤로 한 채 달린 1번 도로는 듣던 대로 "환상의 도로" 였습니다. 경치에 취해 운전하다가 하마터면 낭떠러지로 떨어질 뻔 하는 아찔한 순간도 있었습니다. 4시간을 운전하고 나니 시장기가 돌기 시작했습니다. 이른 아침에 아내가 싸 준 도시락을 꺼냈습니다. 실로 오랜 만에 보는 보온 도시락이었습니다.
30년 전, 중학교 때 였습니다. 한창 유행하던 보온도시락은 학교 점심문화를 송두리째 뒤바꿔 버렸습니다. 밥도 따뜻하려니와 김치국물이 새는 일이 없었고, 여름에는 저녁에 먹어도 쉬지를 않았고, 겨울에는 난로에 얹어 놓을 때 좋은 자리에 놓으려고 싸울 필요도 없었습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쌀밥을 먹는 것은 그야 말로 학교 가는 낙(?)을 회복케하는 원천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학생들의 손에는 큰 가방과 함께 작은 보온 도시락 가방이 악세사리인 양 자랑스럽게 들려 있었습니다. 대학교 2학년 초, 그 후로 보온 도시락을 싸 간 기억이 없습니다. 어머님이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결혼 후에도 도시락을 싸갈 일이 별로 없어서인지 보온 도시락은 뇌리 속에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알뜰한 아내는 누가 싸게 파는 것을 샀는 지, 아니면 세일하는 것을 샀는 지 아무튼 따뜻한 온기를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앙증맞은 보온도시락을 마련하여 점심을 싸 준 것입니다.반찬은 간단하게 두 종류, 돼지불고기 약간과 김치를 볶은 것 뿐이었습니다.
시장이 반찬인지라 한 입을 허겁지겁 문 순간 갑자기 울컥하는 강한 감동이 꿈틀대며 치고 올라왔습니다. 조선 마지막 왕이 육계장을 먹으면서 그 맛과 요리사의 마음을 읽고 울었던 영화 "식객"의 한 장면으로 비유한다면 지나 친 비유일까요?
전날 저녁에 남편을 위해 무엇을 준비할까 하는 아내의 고민이 담겨 있었고, 왜소한 남편, 거기에다 마음도 좁은 남편을 위해 정성과 사랑으로 만든 따스한 마음을 읽을 수 있었기에 느껴진 감정이었습니다. 흰 쌀밥을 먹지 말라는 의사의 권유로 잡곡밥과 함께 기름기가 없는 돼지고기, 먹기 좋게 썰어서 만든 김치 볶음을 통해서 느껴진 아내의 사랑은 굴절된 마음의 한 구석을 환하게 비춰주었습니다.
고마움, 그리고 미안함...이제 중년의 꼭지점에 이르른 아내와 나. 돈 없는 신학생 시절부터 학비 대 주랴, 생활비 마련하랴, 아기 키우랴, 1인 3역을 하며 억척스럽게 살아온 아내의 삶이 주마등 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런 아내는 결혼 생활 중에 크고 작은 수술을 수 차례나 하였습니다. 따스한 말 한마디 준 적이 없었던 남편, 결혼 생활 15년 동안 이사만 15번 이었으니 여자로서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했겠습니까?
귀한 딸 고생시켰으면 마음이나 넓어 상처나 주지 말았어야 하는데, 똥고집과 자존심은 있어서 나 만난 게 행복 아니냐고 큰 소리치며 당당하게 나간 적도 있으니... 사역자 이기에 인간이 되기를 내 마음에 주문해 봅니다. 눈물을 흘리며 아내가 싸 준 도시락을 먹었습니다. 이제 좀 더 잘 해 주겠노라는 비장한(?)각오를 하면서 괜히 죄 없는 돼지고기를 질끈질끈 씹어 물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고, 가장 비싼 점심을 먹고 있었습니다.
아내가 싸 준 보온도시락! 아내는 도시락 속에 사랑을 담았고, 나는 그 속에서 행복을 먹었습니다.
장애인의 달, 4월. 나의 보잘 것없는 삶이지만 밀알사역을 통해 장애인들에게 사랑을 담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나의 작은 사랑을 통해 행복을 떠 먹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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