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탁소에 걸려있는 선배 옷걸이가 새로 들어온 신참 옷걸이에게 꼭 명심할 한 마디를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너는 옷이 아니라 옷걸이라는 사실을 언제나 잊지 마라”

그러나 신참 옷걸이는 선배 옷걸이의 말을 무시하였습니다. 어떨 때는 20년이 넘어 색깔이 변질된 가죽 옷 때문에 “자신이 이 정도 밖에 안되나?” 하는 생각에 기분이 상했습니다. 어떨 때는 세탁비가 가장 싼 와이셔츠가 걸려지자 “나를 어떻게 보고 이런 값싼 와이셔츠를 걸었어?”하며 자존심이 상해버렸습니다.

어느 날은 무거운 쟈켓이 걸려 있자 “나를 이렇게 혹사시키다니! 주인도 괘씸하고, 쟈켓이 보기도 싫어!”라며 한탄하였습니다. 가끔은 멋진 파티복이 걸리기도 합니다. 그럴 때는 우쭐해진 나머지 다른 옷걸이들을 무시하고 교만해졌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다시 자기가 원하지 않는 옷이 걸릴 때 그 기쁨은 사라지고 불평만 남게 되었습니다.

크리스챤은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세상이라는 세탁소 안의 옷걸이로 우리를 부르셨다고 생각됩니다. 어떤 옷이 걸려지던 그 옷을 빛나게 하고, 섬겨주고, 기꺼이 내 보내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요 임무가 아닐까요?

옷걸이의 존재이유는 주인을 위해 충성하는 것이요, 어떤 옷이던 기쁨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신이 아니기에 모두를 다 섬기고 품을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나의 영성과 사역을 지키기 위해 “코드”를 뽑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것은 나를 지키기 위함입니다. 오해하고 힐난하는 사람에게 일일이 설명할 수도 없고, 변명할 필요도 없기에 코드를 뽑고 목표를 향해 전진해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며 충성된 삶을 사셨습니다. 수 많은 멸시와 조롱을 참고 자신에게 입혀진 많은 옷들을 사랑과 겸손으로 섬기셨습니다. 때로는 주님의 사랑을 거부한 ‘가룟 유다’에 대해서는 코드를 뽑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한다는 베드로에게는 귀한 옷걸이로 다시금 회복시키셨습니다.

우리 장애인들과 장애자녀의 부모님들만큼 따스한 사람이 없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남의 고통을 가슴으로 느끼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들의 아픔만큼 더 큰 아픔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렇지만 믿음으로 해석하면 그들만큼 아픔을 가진 사람들을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장애인들과 가족들이 밀알에 참여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을 치유하는 장애인이 되자!" 는 주인공이 바로 당신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이 있으시기에 주님은 우리의 가장 가까운 친구요,치유자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가 찌들고 상처받은 옷들을 섬기는 옷걸이가 되어 세상에 힘차게 내보내는 사명을 감당했으면 좋겠습니다.

장애선교를 위해 북가주 밀알을 섬긴 지 3년이 지나고 있습니다. 앞만 보고 달려 왔던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시행착오도 있었고, 사랑 어린 격려도 있었지만 오해와 비난도 있었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사건도 많았고, 잠 못 이룬 밤도 많았습니다. 그러기에 저는 “밀알 세탁소 안의 옷걸이”라는 것을 잊지 않으렵니다.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저를 밀알세탁소의 옷걸이로 불러주심에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