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선교 여행을 출발한 바울은 성령님의 강력한 간섭을 받습니다. 성령께서 바울이 가고 싶은 아시아를 막으시고 빌립보로 인도하셨습니다. 바울이 발길을 돌려 유럽을 향하는 순간부터 유럽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유럽 복음화에 전초 기지가 되었던 빌립보 교회는 성령님의 간섭으로 세워진 교회입니다.
빌립보는 로마 시대에 마케도니아를 대표하는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빌립보는 완벽한 도시의 조건을 갖춘 도시였습니다. 빌립보는 비옥한 평원, 그리고 평원을 가로지르는 두 개의 강 그리고 로마에서 이스탄불을 잇는 에그나티아 고속도로(Via Egnatia)를 갖추었습니다. 게다가 가까이 있는 팡게오 산에는 유명한 금광이 있었습니다.
빌립보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는 것은 B.C. 6세기입니다. 그때는 그리니데스(Krenides)라고 불렀데 이는 샘물(Spring)이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물이 풍부한 빌립보가 그 지경의 '샘물'같은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때 이미 빌립보는 금광과 풍부한 수자원을 갖춘 도시로 유명했습니다.
마케도니아의 빌립2세가 B.C. 358년(혹 360년 이라는 자료도 있습니다.)에 이 도시를 점령하고 자신의 이름을 따라 도시 이름을 지었습니다. 알렉산더 대제의 아버지인 빌립 2세는 여러 가지 이유로 빌립보에 대한 애착을 가졌습니다. 특히 빌립보 지역의 금광을 좋아했습니다. 빌립 2세는 빌립보 지역의 금광에 대한 소유권강화와 경비강화를 위해서 도시를 개명하였고 도시 개발에 관심을 가졌다고 전해집니다.
빌립보가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된 것은 B.C. 168년이었습니다. 마케도니아가 피드나 전투에서 로마가 패배하면서 로마가 빌립보를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B.C. 42년에 시저(Caesar)가 사망하자 권력다툼으로 인한 전쟁이 일어납니다. 시저를 암살한 브루투스가 카시우스와 함께 옥타비우스와 안토니를 대항해 빌립보 근처에서 싸웠습니다. 이 전쟁이 유명한 빌립보 전쟁입니다. 빌립보 전투에서 율리스 시저의 암살자들이었던 브루투스와 카시우스가 패배합니다. 옥타비우스와 안토니가 로마의 패권을 장악합니다.
이 빌립보 전쟁에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의 군대로 참전했던 시인 호레이스는 훗날 적장이었던 옥타비우스(아우구스투스)의 후원을 받아 문학활동(특히 시작활동)을 하며 뛰어난 작품들을 남깁니다. 그는 로마 후대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활동합니다. 이 빌립보 전쟁은 로마 역사의 전환점이 되었던 중요한 전쟁입니다. 역사가들은 이 빌립보 전쟁이 로마의 공화정을 종식시킨 전쟁으로 정리합니다.
이 빌립보 전쟁에서 이긴 옥타비우스는 10년 쯤 지난 후에 옥티움(Actium) 전투에서 자신의 마지막 정적인 안토니 제거하고 황제가 됩니다. 이때 옥타비우스(훗날 아우구스투스로 개명)는 다시 빌립보를 애착합니다. 빌립보를 로마 직할 (로마령) 도시로 세우고 이름도 자신의 딸의 이름을 따라 '콜로니아 율리아 빅트릭스 빌립보'(그러나 통상은 빌립보)라고 부릅니. 그리고 로마 퇴역군인들을 빌립보에 이주시켜 살게 합니다.
아우구스투스가 빌립보를 로마령(직할:the Roman Colony)도시로 세우면서 빌립보 도시는 더욱 크게 번성했습니다. 빌립보는 농업과 상업이 함께 번성한 도시였습니다. 당시 주변 도시 유력한 무역상들이 빌립보로 가서 무역하는 것을 목표로 삼을 만큼 빌립보는 활발한 교역 도시였습니다. 두아디라 자주장사 루디아를 포함한 많은 외지인들이 상주했던 도시였습니다. 특히 빌립보가 로마령(직할) 도시의 특별한 지위를 얻게 되면서 많은 외부인들이 출입하는 도시가 되었습니다.
당시 로마 정부는 대략 세 가지 목적으로 직할 도시를 활용했습니다. 먼저 정복한 땅에 전진기지로 직할 도시를 활용했습니다. 새로운 지역 관리 수단으로 직할 도시였었습니다. 다음은 가난한 로마 시민 보호를 위해 직할 도시를 세웠습니다. 셋째로 퇴역 군인들의 정착지로 직할도시를 만들었습니다. 빌립보는 세 가지 목적을 동시에 충족시키는 직할 도시였습니다.
로마시대 로마령(직할) 도시가 누렸던 특별한 지위는 대단했습니다. 직할도시 시민인 것이 자랑스러울 정도였습니다. 직할도시였던 빌립보 시민들이 누렸던 특혜를 몇 가지로 정리합니다. 우선 빌립보 시민은 로마시민과 동등한 법적인 지위를 누렸습니다. 당대 로마 시민권은 헬라 문화권에서 귀족 신분증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빌립보 시민들은 로마 시민들과 동등한 지위를 누렸습니다. 하지만 로마 시민권에 대한 열등감이 있었습니다.
다음, 그들은 로마 시민들과 같은 특혜들을 향유했습니다. 로마 시민처럼 면세권이 있었고, 항소권도 갖고 있었는데 재판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태형을 받지 않을 권리가 있었습니다. 또 그들은 실형이 선고되어도 선고에 불복하고 직접 항소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습니다. 이는 매를 맞은 바울이 로마시민권자임을 주장할 때 감옥의 간수가 당황하는 것을 설명합니다.
로마 직할시 빌립보에 퇴역 군인들 정착합니다. 그런데 로마 퇴역군인들 중에는 외국군에서 포로로 잡혀 로마군에 편입된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들이 시민권자였지만 시민답지 못했던 것처럼 빌립보교회 성도들도 천국 시민이었지만 천국 시민답지 못했습니다. 빌립보도시 곳곳에 '시민답게 살아라!'라는 현수막이 있었고 바울이 이말로 성도들을 설득합니다(빌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