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이렇게 얼떨떨한 아브람에게 그의 승리가 어떻게 해서 가능했는지 알려준 사람이 있습니다. 살렘 왕 멜기세덱입니다. 아브람이 살렘 성 가까이 다다르자, 살렘 왕 멜기세덱이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 아브람과 그의 일행을 맞이합니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다. 그가 누군지는 더 자세히 알 길은 없다. 다만, 신약성경의 히브리서에 그가 대제사장이었던 신비로운 인물이라고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멜게세댁은 큰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아브람 일행과 포로로 잡혀갔던 소돔 성 사람들을 맞이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아브람을 축복합니다.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14:18-19, 개역개정)
멜기세덱의 이 축복의 메시지에는 한 가지 매우 중요한 사실이 담겨 있습니다. 아브람이 반드시 이번 기회에 숙지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아브람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천지의 주재"이시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아브람의 대적을 아브람의 손에 넘겨주셨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었다는 것을 아브람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얼떨결에 뛰어든 전쟁에서 정말 천재일우의 기회가 주어져서 이긴 것인지, 아니면 어떤 것인지 얼떨떨한 지경이었습니다. 그런데 멜기세덱이 아브람에게 승리를 안겨주신 신이 누구인지 알려주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자기의 신 여호와가 이집트의 신을 대표하는 바로 왕을 징계할 정도의 위대한 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 하지만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다스리시는 분이며, 그 어떤 신들보다 뛰어난 신이며 다른 신들과는 비교가 안되는 절대적인 신이란 사실은 모르고 있었지요. 그런데 멜기세덱이 아브람의 신이신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전쟁을 승리로 이끄셨다는 선포를 한 겁니다. 귀환을 하면서도, 자기의 신 여호와가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끄셨다는 것이 실감이 가지 않는 상황에서, 살렘 왕 멜기세덱의 이 칭송은 아브람의 눈을 크게 뜨게 만든 사건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잃었다가 모든 것을 다시 회수하게 된 소돔 왕이 아브람에게 노획물은 모두 아브람이 갖고 소돔 성 사람들만 돌려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아브람이 맹세하면서 하나님을,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라고 부릅니다. 아브람이 자기를 부르셨던 '여호와'를 우주적인 하나님으로 부른 것을 그의 눈이 트이게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4:22) 멜기세덱은 아브람의 신 여호와를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라고 묘사했고, 아브람은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라고 묘사했습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라고 부르는 신이 바로 우주적인 신이라는 사실을 멜기세덱이 알려준 셈입니다.
실제로 아브람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12장부터 14장 이 부분까지 "하나님"이라는 명칭은 한 번도 사용이 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아브람과 개인적인 언약 관계를 맺으신 "여호와"라는 명칭만 사용되었습니다. '여호와'는 아브람을 찾아오시고 개인적인 관계를 맺은 신입니다. 그런데 멜기세덱이 아브람의 눈을 열어준 것입니다. 아브람의 여호와가 하늘과 땅을 주관하시는 가장 높으신 절대적인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아브람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이집트의 신 태양신보다 크신 분이라는 사실을 넘어서, 온 우주를 만드시고 주관하시는 절대적인 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지요. 자신이 전쟁의 승리를 맛보게 된 것이 어쩌다가 얻어걸린 승리가 아니었습니다. 절대적인 신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승리를 가져다 주셨기에 가능했습니다. 아브람에게 이 경험은 인생의 중대한 변곡점이 되었을 겁니다. 지금까지 자기를 부르신 여호와를 자기 집안에서만 섬기는 신으로 알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이렇게 자기에게 전쟁의 승리를 안겨주신 하나님께 아브람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그는 자기를 부르신 여호와를 절대적 권위를 가지신 하나님으로 고백하면서, 자기가 획득한 노획물의 십 분의 일을 따로 떼어 하나님께 드립니다. 다시 말해서, 아브람의 십일조는 자신이 치룬 전쟁을 주관하신 분이 하나님이셨다는 것을 고백하는 표현이라는 겁니다. "하나님, 이 전쟁을 승리하게 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승리하게 하신 것을 마음에 새깁니다."
사실 십일조에 대한 논란이 많습니다. 십일조는 구약에나 있고 신약에는 없으니 하지 않아도 된다는 주장도 있고, 여전히 십일조를 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또한 십일조를 수입의 전체 액수에서 십 분의 일을 드려야 하느냐, 아니면 실수입에서 십 분의 일을 드려야 하느냐는 질문을 하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십일조를 하지 않으면 암에 걸린다는 협박성 권면을(?) 하는 목회자도 있습니다. 말라기 선지자가 십일조에 관해서 언급하면서, '십일조를 해봐라, 하나님이 복을 주실 것이다. 한 번 시험해 보라'고 했는데, 이것을 적용하여 십일조를 냈더니 하나님께서 우리의 수입을 배로 불려주셨다는 간증도 심심치 않게 들립니다. 그런데 이런 관점들이 성경에서 의도하는 십일조의 핵심을 비껴가고 있다는 사실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창세기에서 언급하고 있는 아브람의 십일조의 성격을 보면, 우리가 그동안 들었던 십일조에 관한 이해와는 차이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브람을 통해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고 싶은 십일조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우리의 믿음의 분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물량적인 계산을 해야 정확한 십일조가 아니라는 겁니다. 즉, 하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는 정도에 따라서 주님께 나의 마음을 표현하는 헌금의 분량이 달라진다는 겁니다.
어떤 이는 이십 분의 일이 하나님을 주권자로 모시는 자신의 믿음 분량이 될 수 있지요. 또 어떤 이는 오 분의 일이 자신의 믿음의 분량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십일조를 어쩌면 '주권 고백 헌금'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십일조만 아니라 그 이외의 여러 명목의 헌금 또한 모두 하나님의 주권을 고백하는 헌금이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부디 모두가 주님을 향한 헌신이 점점 더 깊어지고, 높아질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아브람의 인생 변곡점을 접하면서 나도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분이신지 알게 되는 인생의 변곡점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파푸아뉴기니 움볼디 숲속 마을에 있으면서, 내 인생에 대한 고민으로 힘들어할 때, 4000년 전 팔레스타인에 살았던 아브람이 알게 되었던 그 하나님을 나도 알게 되었습니다. 아니 알기 시작했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겁니다. 그 이전까지는 성경에 묘사된 하나님이 경직된 느낌으로 다가온 하나님이었다면, 그때부터는 유연한 느낌의 하나님으로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내 인생을 새로운 관점을 바라보게 만든 두 번째 영적 변곡점이었습니다. (다음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