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람은 이집트의 감격을 가지고 네겝에 머물지 않고 전에 살았던 베델 부근으로 온 겁니다. 그곳이 황량한 사막과 같은 네겝 광야보다는 살기에 더 좋은 환경인 것은 틀림없으니까 말입니다. 베델과 아이로 돌아온 아브람은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습니다. 이집트에서 경험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새로운 변수가 생기자 지금까지 유지했던 평정심이 흔들리고 만 것 같습니다. 두 집안이 소유하고 있는 가축 수가 많아진 바람에 그 지역에 한꺼번에 살 수가 없을 정도가 된겁니다. 게다가 이렇게 마음이 흔들리다 보니, 주변에 살고 있는 가나안 사람들, 브리스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이들의 눈빛이 점점 날카로와 지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그들의 민심이 점점 흉흉해지는 것 같습니다. 이러다가는 이들에게 피해를 입을 확률이 높아질 것 같습니다. 아브람은 다시 이전의 두려움에 눌리기 시작했을 겁니다.
이렇게 짓눌린 아브람은 롯과 함께 하는 것이 큰 부담이 되었을 겁니다. 처음에는 자기에게 힘이 될 것이기에 함께 가자고 했으나, 지금은 자기의 생명에 위협이 되는 존재가 된 겁니다. 이렇게 되자 아브람은 조카 롯에게 헤어지자고 요구를 합니다. 한 마디로, 달면 삼키고 쓰면 삼키는 형국이 되어 버렸네요. 이런 관점에서 보면, 아브람은 결코 마음 착하고 배려심이 좋은 사람이라는 평가를 재고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브람은 두려움에 짓눌리는 바람에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저 멀리 기억 속에서 사라져 버린 것 같습니다. 어째서 이렇게 되어 버렸을까요? 우선 4절부터 보겠습니다. 13장 4절에, 창세기 저자는 "그곳은 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라 언급했습니다. 여기 "처음으로"는 '처음'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이전에'라는 의미도 있다고 합니다. '이전에'라는 의미라면, 12:8에 아브람이 베델과 아이 성 사이에 장막을 치고 제사를 드린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읽어내려 가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처음'이라는 의미로 본다면, 여기에는 좀 더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창세기 12장에는 세겜에서 드린 예배를 첫 예배, 그리고 베델 근처로 옮긴 후에 드린 예배가 두 번째 예배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저자는 13장에서, 아브라함이 이집트에 갔다가 돌아온 후 다시 베델을 방문해서 드린 예배를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들어와 처음으로 드렸던 예배였다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저자의 의도가 숨어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12장에 나온 세겜의 예배를 지금 이집트에서 돌아온 아브라함이 13장의 베델에서 드리는 예배와 동일한 것으로 다루고 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저자가 세겜의 첫 예배의 의미를 지금 다시 돌아온 베델에서 아브라함이 드리는 예배에 접목을 했다고 볼 수 있는 근거로 삼을 수 거지요.
그러면 세겜의 첫 예배의 의미는 무엇이었나요? 그예배는 아브라함이 머물고 있는 땅이 후손의 땅이 되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이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집트에서 돌아온 아브람이 베델에 와서 드린 이 예배는 하나님이 세겜에서 하셨던 약속이 함유된 예배였다고 볼 수 있다는 거지요. 그렇다면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더 확고한 믿음을 가졌어야 합니다.
아브람이 이런 믿음으로 자기에게 벌어진 이 사태를 대면했다면, 아브람은 롯과 헤어질 필요가 없었을 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이집트의 강한 신을 능가하신 하나님께서 약속하셨기 때문이지요. 강한 하나님께서 그 땅을 주시겠다고 하셨으니, 당연히 그 땅은 아브람의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그 땅이 자기의 것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면, 아브람은 롯에게 그런 제안을 하지 않았을 겁니다. 오히려 함께 공존할 방법을 모색했을지도 모르지요.
한편 롯은 어떤 마음을 품었을까요? 만약에 롯이 작은아버지 아브람을 인도하신 하나님을 알았다면, 작은아버지가 헤어지자 했을 때, 그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아마도 롯은 아브람의 제안을 거부하고 오히려 그를 설득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그도 작은아버지 아브람과 비슷한 심정이었는지도 모르겠네요. 그는 아브람이 서로 헤어질 것을 제안하면서, 땅을 선택할 권한을 주겠다고 하니,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는 요단 강이 흐르는 계곡을 따라 펼쳐진 푸른 초장에 눈을 돌립니다. 그의 눈에 그곳은 "물이 넉넉한 주님의 동산과도 같고, 이집트 땅과도" 같았습니다. (13:10) 롯은 그 땅에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롯은 전에 보았던 이집트의 나일 강을 낀 농토가 떠올랐습니다. 너무나 비옥한 나일 강 가의 토지가 부러웠던 그는 요단 강가 목초지가 눈에 확 빨려 들어왔습니다. 자기가 직접 보지도 못했던 에덴동산처럼 보였다고 하는 걸 보니, 무척이나 좋아 보였던 것 같네요. 그는 아브람의 제안에 망설이지 않고, 요단 강 계곡의 초원을 선택합니다. 어쩌면, 롯은 삼촌과의 갈등이 없었어도, 그의 마음은 이미 저 요단 강 계곡의 초원으로 가버렸는지도 모릅니다.
한 사람은 주변의 사람들이 두려워서 하나님의 약속을 포기합니다. 다른 한 사람은 더 풍족함을 위해서 하나님의 약속과는 상관없이 이미 그의 마음은 딴 곳을 향합니다. 이집트 왕국의 신을 제압하셨던 하나님이 자기의 하나님인 것을 알았는데도 불구하고, 그 경험의 감격은 그리 오래 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집트의 신보다 크신 여호와 하나님을 이집트보다 작은 부족의 신들보다 작게 여긴 아브람입니다. 그의 마음은 그만 쪼그라져 버렸고, 떳떳하지 못한 제안을 해버린 겁니다. "네가 왼쪽으로 가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고, 네가 오른쪽으로 가면, 나는 왼쪽으로 가겠다." 그렇게 미지의 땅을 향해 함께 떠날 정도로 좋아하고 가까웠던 두 사람은 결국 헤어지게 됩니다.
혹자는 아브람과 롯이 함께 있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기 때문에 둘이 헤어지고, 아브람만 남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아브람의 장막 안에 조카 롯이 있을 수는 없었을까요? 롯 집안이 하나님 언약의 복을 작은아버지인 아브람 덕에 누릴 수는 없었을까요? 아쉬움이 많이 남는 두 사람의 선택이었습니다.
그러면, 이 와중에 아브람의 하나님은 무엇을 하셨는지 의문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간섭하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놀랍게도 이번에도 하나님은 가만히 계셨습니다. 전에도 아브람의 선택에 맡기시더니, 이번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인간이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하나님은 당신의 원래 목적을 성취하실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왈가왈부할 사인이 아니지요. 하지만 하나님이 선택하신 아브람을 하나님은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선택을 받은 아브람은 복의 근원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아브람은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드러내야 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의 선택 과정에 간섭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브람의 내면에 자리잡았던 두려움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일 겁니다. 선택한 아브람을 탓하시기 보다는, 다시 한번 아브람에게 하나님의 약속은 변함이 없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아니, 이번에는 약속하신 땅의 지경을 더 확대하시며 강조하셨습니다. "너 있는 곳에서 눈을 크게 뜨고, 북쪽과 남쪽, 동쪽과 서쪽을 보아라. 네 눈에 보이는 이 모든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아주 주겠다... 내가 이 땅을 너에게 주니, 너는 가서, 길이로도 걸어보고, 너비로도 걸어 보아라." (창 13:15, 17) 아브람이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강조하신 겁니다.
두려워하는 아브람을 하나님께서는 부드럽게 다루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가 두려워할 때 하나님은 그가 믿음이 없다고 질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고서도 두려워하느냐고 지적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집트의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했다 할지라도 그 깨달음이 내적으로 소화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기에 때를 기다리시며, 그 깨달음이 내면화 될 수 있도록 도우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다음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