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지영 (미드웨스턴 실천신학교수/달라스 나눔교회)
안지영 (미드웨스턴 실천신학교수/달라스 나눔교회)

아이들은 항상 '베프'를 찾습니다. '베스트 프렌드', 요새 말로 '절친'이라 하지요. 하지만 아이들의 절친 관계는 오래 가지를 못합니다. 우리 아이들도 어렸을 때, 절친이라고 매우 좋아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절친한테 배신감을 느끼고 서로 돌아서 버리는 경우를 여러 번 보았답니다. 그래서 진정한 절친은 아주 오래오래 가는 법이라는 사실을 계속 상기시켜 주어야 했습니다. 군불 지피듯이 천천히 따뜻해지고, 그 따스함이 오래 사라지지 않는 그런 관계 말입니다. 그 절친 사이는 사탕처럼 달아도, 약처럼 써도, 한결 같은 마음으로 서로를 붙들어 주는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게 됩니다.

아브람과 그의 조카 롯과의 관계도 절친 관계였습니다. 롯이 조카이기는 했지만 하란을 떠나 가나안을 떠날 때 이미 롯은 한 가정의 가장이었습니다. 아브람에게 여러 친지들이 있었지만, 멀리 떠나는 위험하고 외로운 이민자 생활을 함께 해달라고 그가 요청했던 사람이 바로 롯이었습니다. 그만큼 롯과 아브람은 아주 가까운 사이였을 것이 확실합니다. 롯이 작은 아버지 아브람을 좋아하지 않았다거나, 그저 그런 사이였다면, 그 위험하고 불확실한 이주를 선택했을 리가 없을 겁니다. 그만큼 둘 사이는 서로를 의지하는 친밀한 관계를 가진 서로에게 절친이었던 거지요.

그런데 그렇게 영원할 것만 같았던 절친 관계에 금이 가는 일이 생겼습니다. 이집트의 바로 왕에게 쫓겨나서 다시 네겝 땅으로 돌아온 아브람과 롯은 어느 기간을 그곳에서 지냅니다. 그리고는 베델과 아이 성 주변, 지난 번에 장막을 쳤던 곳으로 돌아와서, 두 집안의 장막을 치고, 가축을 풀어놓았습니다. 그런데 지난번과 달리 이번에는 그 땅이 비좁아진 겁니다. 이집트에서 바로 왕에게서 받은 재물이 상당했는데, 그것을 그대로 가지고 왔기 때문이지요. 바로 왕이 아브람의 하나님 여호와를 무서워했기 때문에 자기가 주었던 재물을 회수하지 못했던 겁니다. 그런데 전에는 아무 어려움이 없이 살았던 땅에서, 이제는 많아진 재물 때문에, 두 집안 사이에 갈등이 생겨버렸습니다. 누가 더 많은 땅을 확보하여 가축을 먹일 수 있겠느냐를 놓고 두 집안의 목동들이 다투었기 때문이지요. (13:7a) 그 땅에 두 집안의 가축이 함께 머물기에는 좁았던 겁니다. (13:6) 두 집안만 아니라, 가나안 사람들과 브리스 사람들도 그곳에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3:7b)

아브람은 땅 문제로 두 집안에 갈등이 생기자 마음이 불편해졌습니다. 목동 간의 다툼이 아브람과 롯 사이의 관계를 뒤틀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지요. 지금까지는 이렇게까지 불편해본 적이 없었는데 말입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고민입니다. 그에게 롯은 어떤 의미였을까요? 그는 롯에게 가나안 땅으로 가자고 했을 때 어떻게 설득했을까요? 무언가 약속한 것은 없을까요? 이제 아브람에게는 그때 롯과 함께 고향을 떠났을 때 의기투합했던 것은 다 소용이 없게 되었습니다. 둘이 모두 살아남느냐, 아니면 죽느냐는 긴박감이 몰려옵니다. 아브람은 둘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서로 갈라서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 같네요. 아브람은 롯에게 제안을 합니다. 두 사람은 한 가족이기 때문에 서로 다퉈서는 안된다며, 롯에게 선택권을 먼저 주는 협상안을 제시합니다. 롯이 어느 곳을 선택하더라도 그가 가는 반대 쪽으로 가겠다고 제안힙니다. 서로 간에 충돌이 생기지 않도록 하겠다는 의견을 낸 겁니다. (13:8-9)

이렇게 조카 롯에게 양보한 아브람은 매우 좋은 사람으로 비춰집니다. 이런 아브람의 양보심을 하나님께서 높이 사셨다고 보게 됩니다. 이런 아브람을 하나님이 복주시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롯이 떠나간 후에 이런 아브람에게 하나님이 복을 내리셨다고 보는 것이 틀린 얘기는 아닌 것 같네요. 그렇다면 하나님께 복을 얻으려면 남에게 양보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과연 이런 교훈을 위하여 이 사건이 기록되었을까요? 착한 사람이 되어 남을 배려하는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지요. 매우 바람직한 겁니다. 남에게 양보하는 미덕을 가지는 것이 그렇지 않은 것보다 백배는 나으니까요. 그렇다 할지라도, 그 덕을 강조하기 위하여 아브람의 양보 행위를 여기에 기록한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면 아브람의 이 양보 행위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 응하기 위하여, 우선 다른 질문을 던져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브람은 굳이 롯과 헤어져야 했을까요? 그 땅이 좁았다고 하는데, 실제로 좁았을까요? 좁더라도 둘이 함께 있을 수 있는 방안은 없었을까요? 혹, 좁았다면 다른 곳으로 함께 떠날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거기만 땅이 아니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선택권을 롯에게 줘버렸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함께 고향을 떠나자고 해서 여기까지 따라왔는데, 이제 불편한 자리가 되니 헤어지자고 하는 것이 미안했을까요? 만약에 롯이 베델 부근을 선택했다면, 아브람은 그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야 했습니다. 이런 행태를 보면, 아브람은 이 지역을 하나님이 지정한 땅으로 여기지 않은 것 같습니다. 확신이 있었다면, 자기가 있어야 할 곳이 바로 그곳이라고 했을 테니까 말입니다. 아니면, 하나님보다 다른 것이 더 두려웠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그것이 무엇일까요?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아브람은 절친과 같은 조카 롯과 함께 가나안 땅으로 들어와 동고동락하는 사이로 지냈습니다. 하지만, 여기 베델 부근에 정착을 한 후, 그곳 정황이 만만치 않자, 둘 사이에 불편함이 생겼습니다. 특히 아브람은 자기만의 특유한 불안감 때문에, 이렇게 같이 있다가는 그 지역 사람들의 원성을 사겠다는 두려움이 강하게 밀어닥친 것 같습니다. 그의 눈에 들어온 사람들이 바로 가나안 사람들과 브리스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지요.

이 두려움은 이전에 그가 세겜 땅에 있으면서 느꼈던 그 두려움과 다를 바 없는 것 같습니다. 이집트제국의 태양신을 대표하는 바로 왕으로부터 자신과 사래를 보호하셨던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기억은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 같네요. 아브람의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집트의 왕이 아내를 빼앗기 위해 자기를 죽일 것이라는 두려움에 눌렸던 자입니다. 그 두려움 때문에 자기 아내를 바로 왕에게 넘겼던 자입니다. 자기가 포기해버린 사래를 바로 왕의 손에서 건져내어 주셨던 하나님. 바로 왕을 꼼짝하지 못하게 만드셨던 하나님. 이 하나님을 경험한 지가 오래되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하기사 그렇게 자기를 구해주신 하나님에 대한 감격이 없었을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보호해 주실 수 있는 하나님으로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 감격이, 그 신뢰가 오래 가지 못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감격의 농도는 흐려지고, 신뢰의 두께는 얇아집니다. 그렇게 인간은 망각의 동물입니다.(다음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