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구 트루스포럼 대표.
김은구 트루스포럼 대표.

China Inside Out : A wake up call from a Korean perspective (4)

-Socialism obsession syndrome

민주주의 안에서 사회주의가 허용될 수 있을까? 더 이상 피할 수도, 피해서도 안되는 질문이다. 민주사회주의와 사회민주주의가 민주주의 체제 안에서 수용될 수 있다는 사람들이 있다. 또 어떤 이들은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 사회주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정말 그럴까?

민주사회주의는 선거를 통해 사회주의 혁명을 추구한다. 선거는 혁명을 위한 수단이다. 미국에서 유명세를 얻고 있는 오카시오 코르테즈는 DSA(Democratic Socialists of America) 회원이다. 이들은 자본주의가 민주적 가치와 양립할 수 없고 생산수단의 사적소유를 사회적 소유로 대체해야만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다. 보기 좋게 '민주'라는 말로 아름답게 수식하긴 했지만, 결국 마르크스와 마찬가지로 사회주의만이 답이라고 믿는 것이다. 민주사회주의는 혁명을 추구하지만 스탈린의 독재는 비판한다. 민주적이지 못했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민주사회주의도 전혀 민주적이지 않다. 역설적이지만 민주주의와 선거, 다수결을 이용한 독재가 가능하다. 나치로 불리는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도 민주적 선거를 통해 이뤄진 전체주의 정부였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지지하는 민주주의는 다수결의 횡포, 대중독재로부터 모든 개인의 존엄과 자유를 보장하는 자유민주주의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개인의 존엄과 자유는 다수결로도 침범할 수 없는 고유한 것이며, 이를 보호하는 것이 국가가 존재하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다수결을 이용해 개인의 소유를 박탈하고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강제하는 모든 시도는 민주주의를 교묘하게 가장한 독재와 약탈에 지나지 않는다.

사회민주주의는 혁명은 포기하고 사회주의적 가치를 민주주의 안에서 실현하고자 한다. 복지국가를 표방하는 유럽식 사회주의를 찬양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유럽의 사회민주의의도 문제가 적지 않다. 우선, 사회민주주의가 지속 가능한 발전을 담보하지 못함을 유럽이 증명하고 있다. 사회주의를 동경하는 사람들은 스웨덴을 찬양한다. 하지만, 7,80년대 사회주의 실험을 통해 스웨덴이 얻은 교훈은 달랐다. 고율의 세금과 비대한 사회복지시스템으로 경제는 바닥을 쳤고 이를 개혁하기 위해 자유시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상속세 폐지 등 세제를 개편했고 정부지출을 줄였다. 대다수의 국유기업과 연금시스템을 민영화했다. 경쟁이 가져다주는 혁신은 정부의 독점으론 불가능하다는 것이 스웨덴의 교훈이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사회민주주의가 아무리 혁명을 포기하고 마르크스주의와 결별했다고 하더라도 사회주의에 대한 동경을 간직한 채 어떤 형태로건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지향하는 이상 마르크스의 유령과 분리될 수 없다는 점이다. 평등과 정의, 공정과 민주를 내세워 집단의 분노를 조장하고, 진실을 외면하며 거짓된 선동으로 권력을 추구한다면 마르크스의 유령에 이미 홀린 것이다. 또한 사회민주주의는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에게 훌륭한 은신처, 통일전선이 된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혁명을 포기했다는 간편한 위장만으로 민주주의 체제 안에 잠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존엄과 자유, 생명과 평등, 소외를 넘어선 소통, 박애 등의 가치는 굳이 마르크스나 사회주의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충분히 추구할 수 있다. 사회개혁은 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사회주의자들의 비난과는 달리 자유주의 시장경제 시스템은 소수만의 이익추구를 위해 설계된 제도가 아니다. 건강한 시장을 통해 제한된 자원을 배분하고 개개인의 자율성을 보장하는 것이 모든 사람의 존엄과 더 나은 삶을 위한 이상에 보다 더 가까이 갈 수 있다는 철학적 고민이 반영된 시스템이다. 부와 권력의 편중은 소련과 중국, 북한처럼 오히려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나라들에 더욱 심각하다. 모든 사회문제의 근원을 자본주의의 문제로 치부하고 사회주의를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가릴 뿐만 아니라 역사적 진실을 외면한 무책임한 처사다. 사회주의 유토피아 건설이라는 미명 하에 자행된 허다한 사회적 실험과 광란 그리고 학살은 '사회주의'라는 단어와 분리될 수 없는 역사다.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한 사회주의 실험에 여전히 희망을 두는 사람들은 소련이 붕괴한 뒤엔 유럽과 라틴아메리카, 중국식 사회주의를 대안으로 여겼다. 과히 '사회주의 집착증후군'이라 부를 만하다.

사회주의는 분노의 정치다. 대중의 분노를 이용해 권력을 쟁취하고 유지하는 전략이다. 평등을 빙자해 독재를 가능케 하는 예술이며, 가진 자의 주머니를 털고 후대의 주머니까지 미리 털어버리면서도 정의로운 척 할 수 있는, 대중을 속이는 달콤한 사기다. 이러한 고의가 없다면 인간의 본성과 역사의 교훈을 반복적으로 무시하는 무모한 실험일 뿐이다. 그 어떤 사회주의도 빈곤의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하지 못했고 지속적인 성공을 보장하지 못했다. 마르크스와 트로츠키, 카스트로와 체게바라, 마오와 김일성 모두가 사회주의 지상낙원을 약속했다. 안타깝게도 민주주의의 다양성과 관용, 표현의 자유라는 미명 아래 그들을 진심으로 찬양하는 사회주의자들이 우리 안에 공존하고 있다. 이것이 현실이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전쟁터다. 혁명가들이 자유롭게 활보할 자유를 보장하는 민주주의가 얼마나 유지될 수 있을까?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는 공존할 수 없다. 이를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한다면 대한민국과 미국을 포함한 모든 자유세계는 머지않아 베이징이 통제하는 사회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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