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김명혁 목사(한복협 명예회장, 강변교회 원로)와 박종화 목사(경동교회 원로)가 21일 오전 서울 도곡동 강변교회(담임 이수환 목사)에서 '이승훈 장로님의 3.1운동의 영성을 염원하며'를 주제로 대담을 진행했다.
김명혁 목사는 매달 한 차례씩 교계 주요 원로들과 신앙의 선배들을 주제로 대담을 열고 있다. 대담은 두 사람의 발표와 이후 토론 순으로 진행되고 있다.
3.1운동 이후 정치 가담 않고 후진 양성에 몰두
박종화 목사는 이승훈 선생에 대해 간략히 소개했다. 그는 "이승훈 선생은 기독교 신앙에 투철한 개화기 교육의 선구자였다. 지금까지 오산학교에 그의 흔적이 남아있다"며 "더 중요한 것은 3.1운동을 중심으로 한 민족의 독립운동에 앞장선 기독교 대표 독립운동가"라고 밝혔다.
박 목사는 "이승훈 선생을 보는 입장을 어디서 출발할지 생각해 보면, 과거 지도자들을 평가할 때 굉장히 중요한 관점이 있다"며 "3.1운동 이후 해외로 망명하지 않고 국내에 머물면서 후진들의 교육과 인재 양성, 경제 회복 운동 등에 힘쓰셨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승훈 선생처럼 정치적 역량이 탁월했던 분이 전혀 정치적인 일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치적 욕망이 있었다면 임시정부에 개입해서 요원으로 섬길 수도 있었을텐데, 협력은 했을망정 지분을 차지하거나 한 일이 없었다"며 "독립운동을 보면서 추구해야 할 지도자상이 이런 것 아닐까. 그렇게 열심히 하고서도 사상가와 신앙가, 사업가와 교육자로 남아 거기에 충실했다는 것이 대단하다"고 호평했다.
기독교뿐 아니라 다 포용할 수 있는 큰 그릇
박종화 목사는 "또 하나, '사고의 넓이'를 거론하고자 한다. 3.1운동은 기독교 혼자 하지 않고 천도교·불교 등과 함께했다. 이승훈 선생은 종교가 다르지만 뜻을 모아 독립과 자주를 위해 함께 모여야 한다는 넓은 생각을 갖고 있었다"며 "3.1운동 당시 기독교 일각에서는 '다른 종교와 협력하는 것이 신앙 양심상 가한가' 의문 제기가 있었을 때, 이승훈 선생은 '기독교 신앙에 서면서도 협력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입장을 정리하는 신앙의 넓이를 갖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박 목사는 "지금 생각하면 쉬운 일이 아니지만, 기독교 신앙의 넓이와 깊이에 정통하셨던 분"이라며 "이승훈 선생은 그런 점에서 기독교만의 지도자가 아니라, 신앙의 터 위에서 다 포용할 수 있는 큰 그릇이었다"고 전했다.
▲박종화 목사. ⓒ이대웅 기자 |
또 "목사님들 가운데 독립을 선포하는 문서를 '선언서'로 할지 '청원서'로 할지 갈등이 있었다. 청원서라는 것은 일제의 침략이 하나님께서 우리 민중에 주시는 회초리이자 고난이므로, 일제가 싫지만 청원하는 방식이 좋다는 신앙적 사관"이라며 "다른 쪽에서는 '누구에게 청원한단 말인가. 우리가 독자적으로 선언해야 한다'는 것이었다"고 소개했다.
그는 "둘 다 방식과 해석의 문제였는데, 정리는 물론 독립선언서였는데, 이것 역시 이승훈 선생이 한 것으로 안다. '지금 이 시대는 자주독립을 선언하고 만방에 선포해야 한다'는 것"이라며 "'청원인가 선언인가'는 노선 차이라기보다 역사적이고 신앙적인 의미에 대한 것이었는데, 이승훈 선생은 강한 신념에 기초한 참여적 신앙을 가졌던 것이다. 정말 폭이 넓고 깊은 신앙"이라고 했다.
3.1운동 비폭력 정신, 예수님의 정신에 따라
박종화 목사는 "기독교에서 당시 독립운동을 하면서 가장 강조했던 것은 바로 비폭력이었다. 이승훈 선생은 철저히 예수의 정신에 따라 비폭력에, 평화에 힘이 있다고 주장했다"며 "단순한 방법론이 아니라 행동의 규범이었고, 무슨 일을 하든 기초가 되는 것이었다. 예수의 정신, 십자가는 비폭력적 저항이 부활의 신념으로 일어났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박 목사는 "비폭력이란, 원수를 갚는 것이 아니라, 원수까지 사랑으로 삼켜서 원수를 녹여내겠다는 것이다. 비폭력으로 원수를 삼켜서 원수를 내 편으로 만든다는 훨씬 더 강한 개념"이라며 "그리고 조선의 독립은 우리뿐 아니라 압제하는 일본, 함께 고통받는 중국 등 동북아 주변 국가들과의 평화가 독립의 목적이지, 우리 힘으로만 독립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라고 했다.
또 "비폭력은 넓은 의미의 사랑의 표현이다. 비폭력은 폭력의 반대가 아니라 사랑이라는 것이다. 원수까지 녹여내는 사랑이고, 평화를 만들어내는 사랑"이라며 "비폭력과 평화와 사랑, 이 3가지가 함께 언급되는데, 우리도 이 3가지를 후손들에게 심어줘야 한다"고 했다.
박종화 목사는 "그래서 세워진 것이 오산학교였다. 교육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이 3가지를 통해 미래를 위해 역량 있는 일꾼과 많은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사명이었다"며 "여러 형태 지도자가 있을 수 있는데, 이승훈 선생 같은 지도자는 시간이 흘러도 존경받을 수 있다. 예수 제자로서의 사명을 스스로 택해 성실하게 사신 분이라고 그렇게 생각한다"고 정리했다.
▲김명혁 목사가 박종화 목사와 이야기하고 있다. ⓒ이대웅 기자 |
학교와 하나님과 민족을 사랑한 애국자 이승훈
이어 김명혁 목사는 '학교와 하나님과 민족을 사랑한 애국자, 이승훈 선생'이라는 제목으로 그에 대해 민족 지도자, 신앙인, 애국자 등 세 가지로 나눠 발표했다. 그는 "이승훈 선생은 조만식 장로와 함께 오산학교를 일으켜 세워, 주기철, 한경직, 함석헌 목사와 같은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을 일으켜 키운 분"이라며 "또한 3.1운동을 일으킨 애국운동의 주역이었다. 그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이고 모험적인 성격을 지닌 행동의 사람이었다"고 평가했다.
1. 오산학교를 세운 민족 지도자
먼저 '오산학교를 세운 민족 지도자'에 대해 "어린 시절부터 가난과 고난과 불행의 삶을 살았지만, 그것이 도리어 자극과 도전이 되어 어렸을 때는 열심히 공부했고 무슨 일이든 마다하지 않고 시키기 전에 알아서 열심히 했다"며 "청장년 시절 평양에서 장사해 큰 부자가 됐고, 1백억 가까운 엄청난 재산을 가진 대 사업가가 됐다. 그는 가난했을 때도 비굴하지 않았고, 부자가 됐을 때도 거드름을 피우지 않았다"고 말했다.
김 목사는 "그는 나라 걱정만 하고 나라 살리는 길을 찾다, 우연히 도산 안창호 선생의 강연을 듣고 사재를 털어 고향 정주에 오산학교를 세웠다. 나라를 지키고 세우려면 인재를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며 "한일합방 후 어느 날 평양 거리를 헤매다 산정현교회로 발길을 옮겨 한석진 목사의 설교에 큰 감명을 받고 그날부터 예수를 믿기로 했다. 십자가에 나타난 희생과 사랑의 정신이 자신과 민족을 구원할 수 있다는 진리를 발견한 것"이라고 전했다.
그는 "이승훈 선생은 예수를 믿은 지 3개월이 1910년 12월 일본경찰에 붙잡혀 극심한 고문을 당했지만, 십자가 신앙으로 모든 고문을 이길 수 있었다"며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오산학교로 돌아왔고, 1913년에 부임한 조만식 선생과 함께 오산학교를 기독교 신앙과 민족 사랑의 요람으로 키워갔다"고 설명했다.
▲김명혁 목사. ⓒ이대웅 기자 |
2. 하나님과 교회를 사랑한 신앙인
둘째로 '하나님과 교회를 사랑한 신앙인'으로서 이승훈 선생에 대해선 "예수를 믿은지 한 달만에 교회를 지을 정도로 정말 화끈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정주에는 교육의 불길에 이어 신앙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며 "또 다시 105인 사건으로 형무소에 끌려가 온갖 고문을 당했을 때, 감옥에서 기도하던 중 그리스도의 모습을 환상 중에 보는 놀라운 체험을 했다. 그 후 고난을 이겨내며 하나님 사랑과 나라 사랑에 진력했다"고 했다.
김 목사는 "그는 풀려난 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하나님께 쓰임 받는 일꾼이 되기 위해 신앙과 신학의 훈련을 받았다"며 "이후 오산으로 돌아와서 장로로 장립받고 오산학교와 오산교회를 생명을 바쳐 받들어 섬겼다. 3.1 운동이 일어난 1919년까지 4년 동안, 신앙이 가장 뜨겁게 불타 올랐다"고 전했다.
3. 민족과 나라를 사랑한 애국자
셋째로 '민족과 나라를 사랑한 애국자'로서의 면모에 대해 "3.1운동 독립선언서에서명한 33인 중의 한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운동의 주역이었다. 어떤 사람은 이승훈 선생이 조금이라도 지체했다면 3월 1일 거사 기회는 놓쳤을 것이라고 했다"며 "동분서주하면서 길선주 등 기독교계 인사들을 설득해 기독교 지도자 16명이 33인 중에 포함되도록 했다"고 소개했다.
김명혁 목사는 "이승훈 선생의 열성과 지혜와 용기 그리고 이해관계를 초월한 의연한 태도가 없었다면 과연 3.1운동이 질서정연하게 결행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이후 세 번째로 투옥돼 온갖 고초를 당하면서도, 날마다 시간을 정해 통성기도했다고 한다"며 "그는 옥중에서 구약을 20번, 신약을 40번이나 읽을 수 있었다. 그는 기도로 모든 고난을 이기고 1922년 7월 감옥에서 풀려나, 불타버린 오산학교를 재건했다"고 말했다.
김 목사는 "그러나 이승훈 선생은 조만식 장로님과 마찬가지로, 국수적이고 배타적이고 편협한 민족주의가 아니었다"며 "그는 한때 우리 민족만 생각하면서 살았지만, 하나님을 믿기 시작하면서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말했다. 일본에 대항해 싸운 것은 그들의 불의 때문에지, 민족이 다르기 때문은 아니라는 것"이라고 밝혔다.
또 "이승훈 선생은 학교와 하나님과 민족을 사랑하는데 한 평생을 바치다 1930년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가 세상을 떠난 지 44년이 지난 1974년, 그의 나라 사랑과 민족 사랑을 기리기 위해 서울 어린이대공원 남쪽 폭포 옆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며 "동상 건립 위원장은 오산학교 출신 한경직 목사였다. 한 사람의 삶이 한 나라와 민족의 역사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게 된다"고 평가했다.
김명혁 목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는가? 이승훈 선생은 학교와 민족과 하나님을 사랑하며 한 평생을 희생제물로 바치는 삶이 가장 값짐을 보여준다"며 "우리도 청소년들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민족과 교회를 사랑하고 세계의 백성들을 사랑하는 값진 삶을 살길 바란다"고 역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