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혁 목사(한복협 명예회장)와 강승삼 박사(KWMA 공동회장)는 김철영 목사(세계성시화운동본부 사무총장) 사회로 '이기풍 목사님의 회개의 기도와 사랑과 섬김의 영성을 염원하며' 발표에 이어 토론을 진행했다.
다음은 지난 21일 오전 서울 도곡동 강변교회(담임 이수환 목사)에서 열린 토론 주요 내용.
-마포삼열 선교사님은 언어적 장벽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오자마자 노방전도를 하며 당시 조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우리나라에서 파송한 선교사들도 선교지에서 박해와 핍박 가운데 맺어진 변화나 열매의 기록들이 있지요.
강승삼 박사: 한국 선교사님들의 경우 해외에 나가서 순직하신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순직과 순교 사이에 혼돈을 일으킬 수 있는데, 직접적으로 예수를 전하다 핍박을 받고 죽게 되면 순교입니다. 하지만 선교하러 갔다가 교통사고로 죽은 것은 순교가 아니라 순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기풍 선교사님의 경우 순교로 보는 것이 맞습니다. 질병과 고령에도 전도를 계속 하다 일제에 의해 감옥살이를 하다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그의 믿음과 신사참배 거부 운동 등을 고려한다면 순교가 맞을 것입니다.
김명혁 목사: 선교사들이 선교에 그치지 않고 모두를 끌어안는 사랑을 전했습니다. 이것이 한국에 온 선교사들의 특징 아닐까요. 이기풍 목사님이 깡패들을 데려와 젊은 시절 교회를 다 때려부쉈을 때, 마포삼열 선교사님이 부드럽게 대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평양 시민들이 마포 선교사님을 존경하게 됐습니다. 언더우드, 아펜젤러 선교사님도 그랬습니다. 그들은 교회를 세우기보다 불쌍한 사람들을 돕고 가르쳐 주고 병원을 세운 다음에야 교회를 세웠다고 합니다. 선배들로부터 그렇게 하라는 권유도 받았지요.
우리 한국 선교사님들도 선교지에서 진리만 외칠 것이 아니라, 종교도 민족도 다른 그 분들을 끌어안고 울 수 있는 자세를 지녔으면 좋겠습니다.
-한국교회 초기 인물들을 보면, 이기풍 목사님처럼 사도 바울과 비슷한 회심을 거친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김명혁 목사: 손양원·주기철 목사님을 보면, 부모님들로부터 신앙을 물려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학교에서 매를 맞거나 맞아서 피를 흘리면서도 기뻐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주기철 목사님에게 배웠다고 말씀하시곤 했다고 합니다. 그 분들의 순교 신앙은 선배님들로부터 물려받은 것입니다.
-네비우스 선교 전략이 한국 선교에서 구체적으로 채택되고 시행된 계기가 있을까요.
강승삼 박사: 네비우스 선교 정책은 중국에서 시작됐지만, 정작 거기서는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네비우스가 한국 선교사 수련회에 초청받아 자신의 정책을 2주간 나누면서 선교사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된 것입니다.
자립, 자전, 자치뿐 아니라, 성경공부를 통해 그룹을 만들어 많은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그것이 한국교회에서 파송된 선교사들에게도 적용됐습니다. 지금은 네비우스 선교 정책 말고는 현지 교회를 세울 길이 많지 않습니다.
-역으로 생각하면, 한국교회 성도들이 그만큼 자립적 신앙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적극 참여했다고 볼 수 있을까요.
강승삼 박사: 성미 제도를 보십시오. 목회자나 선교사들이 가르쳐 준 것이 아닙니다. 여전도회에서 자발적으로 십시일반하여 '우리 목회자들 굶겨선 안 되겠다'며 집에서 밥을 하며 한 줌씩 가져온 것입니다. 이런 제도들이 한국교회 자립에 큰 공헌을 했습니다.
-이기풍 목사님은 안창호 선생님을 존경해서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중국으로 떠나려 했지만, 결국 그러지 못했습니다.
김명혁 목사: 전적으로 십자가의 복음과 사랑을 전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 아닐까요? 저는 이것도 귀중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요즘 민족주의나 국가주의, 이스라엘주의 등은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회복보다 하나님 나라 건설을 더 중시하셨습니다.
민족을 초월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승훈과 조만식 장로님은 나중에 '예전에는 민족주의자였지만, 지금은 아니다'고 했습니다. 해방 후에도 '일본놈이라고 하지 말고 잘 보내드려라'고 했습니다. 민족주의를 초월하신 분들입니다. 폭이 넓었습니다. 우리 강승삼 박사님도 이기풍 목사님의 선교 정신을 이어받아 아프리카로 선교를 떠나셨습니다(웃음).
강승삼 박사: 독립운동을 하지 않은 것은 전적인 성령의 간섭이 아니었을까요? 이기풍 목사님은 김구·안창호 선생과 함께 독립운동을 위해 상해로 떠나려다, 배에서 복통이 심해 중간 몽금포에서 내렸습니다. 독립운동보다는 '복음운동'을 하라는 섭리 아니었을까요(웃음)?
-이기풍 목사님의 제주 선교 시절, 성내교회 집회에 3천여명이 모였다고 합니다. 청년들의 미신적인 놀이 방식을 활용한 '문화 선교'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강승삼 박사: 이기풍 목사님은 오늘날처럼 선교 훈련을 하거나 관련 과목을 전혀 수강하지 못했지만, 정말 훌륭한 선교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몸으로 노동하면서 그들의 필요를 채우는 '사랑 선교'를 하셨습니다.
선교지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제공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 가교를 만들어야 합니다. 저도 아프리카 선교 당시 물이 없는 지역에서 아이들이 죽어가고 있을 때, 우물을 파 주면서 마음 문을 열게 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김명혁 목사: 미국에서 8개월간 안식월을 보낸 적이 있는데, NGO와 함께 아프리카 부르키나파소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전 세계에 편지를 보내 우물을 많이 파 줬습니다. 직접적으로 전도를 하진 않았지만, 그들 마음에 감동이 있었습니다. 필요를 채워주면 마음이 자연스럽게 주님께로 돌아오게 됩니다.
-요즘은 생활의 어려움으로 이중직을 하는 목회자들이 늘고 있습니다. 이기풍 목사님의 제주 선교 모델을 보면서, 오늘날 목회자들이 어떻게 지역 주민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친구가 되어주고 눈물을 닦아줄 수 있을까요.
강승삼 박사: 선교사 훈련에 있어 강조하는 것은, 어디에 가서도 계속 선교할 수 있도록 기술을 하나씩 익혀서 나가는 것입니다. 성경과 제자 양육에 전문가가 됐지만, 만약 교회에서 후원이 끊어지더라도 계속 선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요즘 교회들이 상당히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를 파송해 놓고 후원을 중단하는 곳들이 있습니다. 예전에 유태인들이 했던 것처럼, 선교사들이 그곳에서 '텐트메이킹'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기풍 목사님에게 마포삼열이나 스왈른 선교사님이 있었듯 두 분의 신앙에 있어서도 중요한 전기를 마련해 주신 분이 계신지요.
김명혁 목사: 저는 어릴 때 신의주와 평양에서 목회하시며 감옥을 오가다 순교하신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입니다. 평양에서 배웠던 주일학교 선생님 세 분도 저를 기특하게 보시며 주일성수와 새벽기도, 순교신앙 3가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월남 후에는 이성봉 목사님 부흥회에 중학교 3년간 12번이나 참석했습니다. 이후에는 김치선 박사님에게서 매일 눈물로 기도하는 회개와 은혜의 삶을 배웠습니다. 주기철·손양원 목사님, 한경직 목사님, 박윤선 목사님, 정진경·방지일 목사님 같은 분들이 귀한 역할을 해 주셨습니다.
강승삼 박사: 1960년대 입대해서 첫 휴가를 나왔는데 아버지가 저를 꿇어앉혔습니다. '엄마랑 내가 셋째 너를 하나님께 바쳤으니, 주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하필이면 왜 저냐고 하면서 다른 길로 갔지만, 결국 마음에 부담을 주셨습니다.
결국 선교사로 헌신했고, 조동진 목사님의 동서선교연구센터에서 훈련을 받았습니다. 당시 가장 감동을 준 책이 <선교의 횃불을 밝힌 사람>이었습니다. 북아프리카에서 무슬림에게 복음을 전하다 돌에 맞아 순교하신 분의 이야기였습니다.
귀족 출신으로서 모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고 거리에서 전도하다 스데반처럼 순교하신 것입니다. 그 내용을 읽으면서 무슬림 선교를 꿈꾸게 됐고, 결국 서부 아프리카 무슬림 지역으로 가게 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