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에 대한 이해 

청년 시절, 말을 더듬는 후배가 있었다. 말을 왜 더듬게 되었느냐고 사연을 물으니, 말을 더듬는 친구를 흉내 내다 더듬게 되었다 했다.

말을 정상적으로 하던 사람이 흉내를 냈다고 더듬는 언어로 변형이 오는가? 의학적 소견들이 분분하나, 적어도 이 친구의 경우는 전적으로 자기가 하는 것이었다. 자기 자신이 더듬는 언어를 하는 것이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

왜? 말이란 자기 자신이 발화를 하는 까닭이다. 명쾌하지 못한 말을 하는 것은 자기가 그렇게 말을 구현하는 것이다. 욕을 안 하던 사람이 점점 욕을 섞어가며 말하는 것은 그 자신이 그런 말을 쓰는 것이지, 다른 무엇이 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9가지 은사와 언어

고린도전서 12장은 우리가 잘 아는 성령의 은사 9가지를 정리하고 있는데, 이 중 5가지가 언어와 관련된 은사다. 여기서 9가지라 함은 정형화된 규격이 아니라 일종의 요약이다.

어떤 직임과 적용이 시대와 제도에 따라 변하듯 서로 내포된 작용을 요약한 것이지, 무 자르듯 분리한 게 아니다. 가령 '믿음의 은사'란 그 사람 외에 다른 사람에게는 믿음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여러 은사가 한 성령에 작용하듯, 여러 직임이 같은 주인(主)을 모신다 한 것은 그런 내포를 의미한 것이다.

그런데 이 언어 관련 은사 5가지 중 2가지가 '덕'과 직결된 은사이다. 예언과 방언이 그렇다.

비밀의 언어

왜냐하면 사랑이 없으면 방언도 소용 없고, 예언도 소용없다며 권도하기 때문이다. 이 사랑 장(章)을 넘어 14장에선 보다 구체적인 덕을 교시하는데, 유독 예언과 방언에 대한 부연인 것이다.

그럼 먼저, 예언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미래를 알아맞히는 행위인가? 어떤 면에선 맞고 어떤 면에선 틀리다. 미래를 알아맞히는 것은 예언에 포함되는 것이지, 예언이 그 알아맞히는 신점 행위에 귀속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이 중요하다.

미래를 알아맞히는 능력, 즉 예지력은 세속 무(巫)도 구사하는 매우 저차원적인 것이다. 마치 병 고치는 능력이 종교에 상관없이 의술로 구현되듯, 세속 의술을 배운 의사가 기독교에 귀의해 의술을 펼치면 같은 치료 결과가 거룩성을 띠는 이치이다.

하지만 의술 자체는 신적인 위대한 능력이다. 죽음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지란 그 자체만으로도 신적이나, 자체만으로 거룩성을 띠는 것은 아니다.

방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어떤 목사가 '천주교 방언, 불교 방언'이라면서 페이스북에 올려대며 기독교 방언을 조롱하지만, 가톨릭 신부도 한글로 말하며 승려도 한글을 쓰듯 기독교인도 한글로 신앙을 고백하기 마련이다.

차이가 무엇이냐. 승려의 한글은 교회와 전혀 무관한 것이듯, 제 아무리 방언을 페이스북에 올려 조롱해도 교회와 무관한 방언과 무관하지 않은 방언이 있을 뿐, 교회에서 사용하는 방언이 방언이 아닌 것은 아니다. 방언이 언어이기 때문이다.

한국말로 사람 죽이는 언어를 썼을 때, 한국어이지만 그것은 사탄의 언어이다.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는 언어의 경우는 한국어이지만,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하는 언어이다.

승려는 한국어를 유창하게 말하지만,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할 줄 모른다. 방언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면 다시 예언으로 돌아가 보자.

가나의 혼인잔치 파올로 베로네세(Paolo Veronese)
▲그림 일부를 확대한 모습. 이 그림에서도 극명한 차이가 좌우 구도로 나타난다. 왼쪽에 있는 사람들은 표정이 안 좋고 이쑤시개로 이빨이나 쑤시고 있다.

 

다시, 예언이란 무엇인가

예언은 방언 통역과 일반이라 했다. 그럼 방언 통역은 무엇인가? 방언은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은 교회의 덕을 세운다 하였다.

방언은 알아들을 수 없는 비밀을 말하고, 예언은 비밀을 아는(알아맞히는 게 아니라) 행위이다. 그래서 방언 통역과 예언은 동급이라 한 것이다.

예언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방언과 방언 통역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과 통한다. 통역은 해석(ἑρμηνεία)이다. 낱말 풀이가 아니라 해석이다. 고도의 능력인 것이다. 그래서 예언이 '알아맞히는' 신점의 차원을 넘어선다 했던 것이다.

상대의 은밀한 죄를 '해석'하지 못한 채 까발리기만 한다면, 해석 능력의 부족이다. 무당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무당은 은밀한 것을 까발려 상대의 영혼을 자기 소유로 만든다.

그 해석의 결과가 교회로 귀속돼야 하는데, 해석해 주고 그 결과를 개인 소유로 착취하거나, 명목상 교회로 돌려놓고 교회를 통째로 마시는 것은 다 무당 행위이다. 꽹과리인 셈이다.

예언과 방언의 사용

이들이 초대교회 당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아는 일은 중요하다. 신점(神占)의 형식이 어떻게 해석의 권능으로 귀속되는지, 그 접경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한 사람이 방언하면 통역을 하고, 다른 한 사람이 방언하면 또 통역을 하고, 예언도 마찬가지로 한 사람이 예언하면 다음 사람이..., 하는 식으로 진행되었던 듯하다.

이런 행위가 무엇인지는 예언을 뜻하는 어휘 '프로페테오(προφητεία)'에 담겨 있다. 프로페테오의 '페미(φημί)'라는 '말하다'라는 말에서 비롯됐다.

'말하다'라는 헬라어 동사는 셋이다. '로고스(λογος)'가 균형을 뜻하는 이성 언어라면, 주관 언어를 뜻하는 '레마(ῥῆμα)'는 '흐름(ῥέω)'이라는 말에 비롯됐다. 예언에 사용된 이 '페미'는 빛을 뜻하는 '포스(φῶς)'에서 온 말이다.

즉 점치듯 알아맞히는 것을 예언인 줄 알지만, 상대가 인정하지 않거나 간과해 모르는 것을 내가 알고 있으면 그것도 예언이다. 직격탄을 날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당신은 전공(직업)을 바꾸십시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겁니다"라는 말은 신점(神占)의 형식으로도 말할 수 있지만, 충고의 형식으로도 얼마든지 말할 수 있다. "술, 담배를 끊으십시오"도 예언이라는 소리이다. 미개할수록, 전자를 선호한다.

게다가 이것이 기록될 당시의 예배 예전과 지금의 예전에는 차이가 있다.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은 별도의 설교가 없었다.

바로 위에 언급한 (차서(次序) 있게 '말'을 하는) 교회활동(activity)이 그것을 대신했다. 방언이든 예언이든 복수의 사람이 차서 있게 돌아가면서 해야 하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고전 14:27).

그런데 그 예언이 전혀 지혜롭지도 못하고 엉뚱할 때, (교회생활 하면서 모임 같은 거 하다 보면 엉뚱한 말을 하거나 전혀 포인트 없이 말하는 사람 때문에 시간 낭비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보다 지혜로운 예언에 의해 제지 받아야 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32절).

예언으로 어지러웠던 것도 그 때문이며(33절), 특히 여성에게 잠잠하라고 했던 성차별적 명령은 바울이 여성을 인정치 않는 성차별 때문이 아니라, 당시 교육 혜택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던 여성의 발언은 예언에 적합하지 못했던 까닭이다.

가나의 혼인잔치 파올로 베로네세(Paolo Veronese)
▲그림 일부를 확대한 모습.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이 태도와 반응이 바로 프로페터이아 예언의 시작이다. 그래서 방언을 첫 은사라 한 것이다. 이 상징언어를 보전하는 교회에선 점쟁이가 나올래야 나올 수 없으며, 사회주의 주사파 기독교가 나올래야 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앞서 말을 더듬던 그 친구는 나와 함께 기도하여 방언을 받은 이후 다시는 말을 더듬지 않게 되었다...

 

예언의 발전

바울은 그 어지러움과 질서를 이렇게 통제하고 있다.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고전 14:37)."

사도나 선지자보다 더 높은 표준이 바로 '편지'라고 말하는 사실도 놀랍지만, "주의 명령이 편지인 줄 알라"고 쓰지 않고 "편지가 주의 명령인 줄 알라"고 표현한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오늘날의 설교가 나왔고, 설교는 그 편지의 표준을 보충한다. 따라서 우리는 예언의 사용과 발전 단계에 관해 이런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첫째, 설교가 편지의 기능을 상실하면, 표준으로서 지위를 상실한 것이다.

둘째, 설교가 '프로페테오(예언)' 기능을 상실하면, 여러 사람의 방언과 예언을 제도로 독식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셋째, 교회가 또 다시 복수의 '프로페테오' 시절로 돌아간다면, 그것은 초대교회로의 회귀가 아니라 점집으로의 회귀에 지나지 않는다. 어지러움의 '프로페테오'를 개혁 과정을 통해 다 다듬어낸 것이 설교이기 때문이다.

물론 오늘날처럼 설교가 어지러워졌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면 넷째, 설교가 어지러워졌을 때는 복수의 '프로페테오'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라 편지로 회귀하면 된다.

이것이 성경에 임하는 자세의 기본이기도 하다. 이는 교의학에서 제정한 특별계시 양식의 원천이 됐다.

※ 그림 설명: 파올로 베로네세(Paolo Veronese)의 가나의 혼인잔치(1563). 요한복음에 나오는 가나의 혼인잔치가 초대교회에서 첫 번째 표적이라 말한 것은 전통적으로 성령 강림의 징후를 방언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때 어떤 이는 새 술에 취했다 하고, 어떤 이는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다" 하였다.

바로 이 그림에서도 극명한 차이가 좌우 구도로 나타난다. 왼쪽에 있는 사람들은 표정이 안 좋고 이쑤시개로 이빨이나 쑤시고 있지만,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이 태도와 반응이 바로 프로페터이아 예언의 시작이다. 그래서 방언을 첫 은사라 한 것이다.

이 상징언어를 보전하는 교회에선 점쟁이가 나올래야 나올 수 없으며, 사회주의 주사파 기독교가 나올래야 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앞서 말을 더듬던 그 친구는 나와 함께 기도하여 방언을 받은 이후 다시는 말을 더듬지 않게 되었다...

YOUNG JIN LEE이영진.
호서대학교 평생교육원 신학과 주임교수. '기호와 해석의 몽타주(홍성사)', '영혼사용설명서(샘솟는기쁨)',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홍성사)', '자본적 교회(대장간)' 등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