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조 선행부부' 최수종·하희라 부부가 자신들의 삶에 함께하신 하나님에 대해 진솔하게 이야기했다. 용인 새에덴교회(담임 소강석 목사)는 '행복한 동행'이라는 주제로 최수종 장로와 하희라 집사 초청 간증집회를 20일 개최했다.
부부가 함께 간증집회에 나서는 것은 오랜만이다. 불신자였다가 신자가 된 하희라 집사가 중간 중간 찬양을 불러가며 주로 간증을 맡았고, 최수종 장로는 뒤에서 보태는 역할을 했다. 최수종·하희라 부부는 가수 출신 조하문 목사가 담임을 맡은 사랑의빛공동체 교회를 출석하고 있다.
찬양 '예수 피를 힘입어'를 부른 뒤 하희라 집사는 "간증은 아무래도 조심스럽다. 어쩔 수 없이 제 이야기가 드러나기 때문"이라며 "제가 만난 하나님이 아니라, 제게 찾아오신 하나님을 나누고자 한다"는 말로 간증을 시작했다.
하 집사는 원래 불교 신자였다. 아버지가 화교였기에 현관 입구에 관음보살상이 서 있었고, 아침저녁으로 향을 피울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다 기독교인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그는 "결혼 전 친정어머니가 궁합을 봤는데, 절대 결혼하면 안 된다고, 1년 전에 이혼 안 하면 장을 지진다고 했다"며 "그런데 올해가 결혼 25주년이다. 은혼식을 했다"고 말해 박수를 받았다.
자연스럽게 남편을 따라 교회를 나갔지만, 한 달도 안 되어 직분을 맡은 어떤 분에게 상처를 받고 나가지 않았다. 하 집사는 "어찌 믿음이 크다는 사람이 그럴 수 있는지, 기독교를 믿지 않겠다고 했다"며 "사실 사건 자체가 아니라 제 마음이 문제였다. 시어머니 눈치를 보면서 교회를 다니다 좋은 핑계가 생긴 것이다. 그땐 하나님이 계신지 믿어지지도 않았다"고 회고했다.
하 집사는 "그러나 못나고 교만한 마음을 하나님께서 선으로 바꿔 주셨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 바라봐야 함을 훈련받게 됐고, 이는 아직도 훈련받고 있는 숙제"라며 "작은 사건으로 상처를 받고 속으로 미워하면서 '내 믿음이 이 정도밖에 안 되는구나' 자책도 했지만, 지금은 그럴 때마다 기도한다. '하나님의 눈으로 보게 해 달라'고. 그러면 상한 마음이 위로받으면서 조금씩 회복되더라"고 말했다.
다시 교회 대신 친정어머니와 절에 다녔다. 오래 전 돌아가신 시아버지를 위해 천도제도 지내고, 네 번의 유산 끝에 얻은 첫 아이를 위해 백일기도도 했다. 남편도 저 때문에 주일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 그는 "그렇게 남편은 저를 15년이나 기다려줬다. 오랜 시간 묵묵하게 기다렸다"고 전했다.
▲최수종 장로와 하희라 집사가 마지막으로 '야곱의 축복'을 함께 부르고 있다. ⓒ이대웅 기자 |
하희라 집사는 "교회에 다닐 수 없었던 큰 이유가 있었다. 결혼 2년 전부터 가위눌림이 시작됐다. 단순히 악몽을 꾸는 게 아니라, 잠이 들거나 눈만 감으면 귀신들이 보였다. 심할 때는 낮에도 따라다녔고, 밤에 잘 때 무서워서 불을 켜고 잠들었다"며 "눈을 감으면 더 잘 보였기에 세수도 눈을 뜨고 했다. 비눗물로 눈이 매워도 감을 수 없었다. 상갓집을 다녀오면 꿈에 귀신들이 나타났다. 무당도 찾아가고 부적도 붙였지만 해결되지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무엇보다, 개종하면 몸이 약한 첫째 아이가 더 아플 것 같았다고 한다. 그는 "미신을 믿으면서도 마음은 늘 불안하고 두려웠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언젠가는 교회에 다닐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며 "그래서 '교회에 가야 한다면 확실한 징표를 보여달라'고, 막연히 하늘을 보고 이야기하곤 했다. 귀신은 눈에 보였지만,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다 2008년 10월 어느 날 미국에서 온 언니 동생과 밥을 먹는데, 동생이 갑자기 말했다고 한다. '나 이제부터 교회 다닐거야. 엄마가 뭐라고 해도 나가겠어.' 그 말을 듣는 순간, 갑자기 '나도 가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바로 남편에게 전화해서 '교회에 가겠다'고 말한 뒤 그 주 수요예배부터 곧바로 출석했다.
하 집사는 "그땐 왜 그런 마음이 생겼는지 잘 몰랐다. 뭔가 징표가 있어야 하고, 확실한 뭔가가 꿈에서라도 나타나야 개종할 수 있을 것 같았다"며 "그런데 그때 동생의 고백을 듣는 순간, 도저히 교회에 다닐 거라 생각도 못한 제 동생의 마음을 움직이신 하나님, 죽음까지 생각한 힘든 삶 속에서 제 동생의 손을 잡아주신 하나님이 동생을 도와주시리라는 믿음이 전해졌고, 동생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모습을 보며 저도 교회에 나갔다"고 했다.
매주 설교 말씀이 다 자신에게 하시는 것 같았다고 한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평온한 마음이 들면서, 계속 눈물만 나왔다. 그런데 슬픔의 눈물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18년 동안 그를 괴롭힌 가위눌림이, 교회에 가기로 결정한 그 날부터 사라졌다.
곧바로 40일 새벽기도를 작정하고 시작했다. 그런데 그 날 양초공예를 하다 손에 화상을 입었다. 병원에 갔을 때, 어린아이가 심한 화상으로 치료받는 모습을 보고 '내 아픔은 아무것도 아니구나' 생각했다. 며칠 후 화상 상처 부위가 너무 깊어서, 피부이식 수술을 해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다. 수술 날짜가 2주 후로 정해졌지만, '나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열심히 새벽기도를 나갔다.
40일 기도가 끝난 후 병원에 갔더니, 그 전까지 딱딱하던 상처가 수술할 필요도 없이 떨어져 나갔다. 하 집사는 "그땐 제가 새벽기도를 하루도 안 빼먹고 열심히 나가서 나은 줄 알았다. 가장 두려웠던 가위눌림도 없애 주시고, 40일 기도가 끝나는 날 제 손을 치료하신 하나님..., 모두 내 열심과 정성으로 이뤄진 일이라고만 생각했다"며 "믿음생활이 열심히만 하면 다 이뤄지는 건 줄 알았다. 불교에서처럼 '하나님, 비나이다 비나이다' 하고 있더라.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나의 열심, 정성과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주신 한량 없는 은혜였음을 한참 지난 후에야 알게 됐다"고 밝혔다.
손이 회복된 후, 병원에서 봤던 어린아이를 기억하면서 이듬해 '화상 환자를 위한 복음성가' 첫 앨범을 발표했다. 모든 수익금은 화상 환자들을 위해 사용했다.
▲하희라 집사가 간증하고 있다. ⓒ이대웅 기자 |
그는 "그땐 선행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주님의 일을 열심히 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싶었고, 복음성가를 부르시면서 찬양을 하는 것이 아니라 노래를 잘 부르려 했다"며 "믿고 나서도 2년간 그렇게 하면서 '모든 일이 다 잘 될 것'이라 생각했다. 열심히 믿으면 모든 일들이 술술 풀리고, 세상 사는데 조금도 어려움이 없을 거라고 했다. 드라마도 무조건 잘 될 거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그러나 예상 밖으로, 그렇지 않았다. 주변에서 안 좋은 일이 벌어지면서, 믿었던 사람에게 상처를 받고 대인기피증도 생겼다. 모든 상황이 어려워졌다. 왜 이런 일어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고, 짜증은 화가 되고 화를 억누르다 보니 우울증이 찾아왔다. 기도도 나오지 않았고, 감사할 일도 보이지 않았다.
하 집사는 "원인과 이유를 알 수 없는 우울증이었기에, 주위에 도움을 청하지도 못했다. 자존심 때문에, 아무것도 아닌 일로 그리 힘들어하냐고 할까봐 더욱 말하지 못했다. 제게 실망할까 남편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모든 일이 그렇게 쌓이고 있었다"며 "어느 날 한강대교를 지나면서 '여기서 뛰어내리면 아플까? 죽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아, 달리는 차 안에서 차 문을 열고 뛰어내리고 싶었다. 그러면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고 이야기했다.
집에 돌아와서도 계속 불안하고 집을 뛰쳐나가고 싶다는 생각에, 결국 화장대 앞의 차 열쇠를 집어들었다. 마지막으로 주저앉아 하나님을 찾았다. '하나님, 진짜 살아 계시다면 지금 저 좀 잡아주세요. 저 이대로 나가면 죽을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진짜 살아 계시다면 저 좀 잡아주세요.'
울면서 기도하다 눈을 떴는데, 거울을 통해 본 자신의 눈빛이 낯설었다고 한다. 그리고 갑자기 이런 소리가 들렸다. '내 딸아, 나는 네 눈을 보면서 너를 보고 있는데, 넌 어디를 보면서 나를 찾고 있니?'
하희라 집사는 "깜짝 놀랐다. 그때까지 한 번도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누가 나를 '내 딸'이라고 부르는 거지? 정신없는 상태로 주저앉아 다시 기도드리기 시작했다"며 "그런데 힘들어하던 일들이 필름의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을 지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뭔가 뜨거운 것이 터져나오면서 회개기도가 시작됐다. '내 아픔을 다 아셨구나. 날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얼마나 감사하며 살아야 하는지'. 말도 안 되는 기도로 하나님을 협박했는데도 딸이라고 불러주신 주님, 그렇게 불러주신 것만으로도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다"고 감격했다.
하 집사는 "다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감사하고 순종하면서, 그 시간을 버티며 지나가면 반드시 더 깊은 은혜를 주신다"며 "별명이 종합병원일 정도로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아프지 않았다면, 건강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몰랐을 것이다. 몸이 아픈만큼 선택과 집중을 할 수 있어 감사드린다. 결혼 후 네 번의 유산이 없었다면 부모가 되는 것이 축복임을 몰랐을 것이다. 큰 아이가 몸이 약해서 응급실에 데리고 다니지 않았다면, 아이의 건강이 소중함도 모른 채 세상과 타협하며 '학부모'가 돼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또 "18년 동안 가위눌림이 없었다면 하룻밤의 단잠이 얼마나 행복한지 몰랐을 것이다. 이련 당연한 일상이 누군가에겐 절실한 기도제목이 된다는 것도 몰랐을 것"이라며 "그때 제 손에 화상을 입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화상 환자를 돕지도 못하고 부부가 사후 인체·피부 조직기증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연약하고 못난 모습이 아니었다면, 오히려 교만하고 이기적인 기독교인이 돼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분명 지금은 제 마음이 확정되고 확정됐다고 믿고 간증하며 찬양하지만, 또 다시 언젠가 주저앉을 때가 오리라는 것도 안다"며 "하지만 이제는 다시 일어날 수 있으리라는 것도 분명히 안다.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지금 이 시간 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으로 힘들어하시는 분이 있다면, 오늘 제 연약하고 부족한 고백들이 조금은 위로가 되시길 바란다"며 "그리고 그 힘들고 아픈 마음이 어떤 상황에도 변치 않는 무한하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덮이기를, 꼭 승리하시기를 바란다"고 간증을 마무리했다. 그리고는 찬양 '온 맘 다해'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