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무술년(戊戌年) 새해가 밝았다.'지성'을 대표하는 이어령 박사를 최근 영인문학관에서 만나, 교회와 기독교, 성경 읽기, 부쩍 다가온 인공지능(AI) 시대 등에 대해 대담을 나눴다. 세례 10년째인 이어령 박사는 3여년만의 만남에서, 이 박사는 '마지막'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음은 이 박사와의 일문일답. 

세례 10년째? 문지방에서 서성거린 10년

-지난 2017년이 세례받은 지 10년째였습니다.

"저에게 주님을 영접할 수 있게 한 딸 민아와 세례를 해 주신 하용조 목사님이 모두 세상을 떠났습니다. 가까운 사람들로 치면, 저에게 있어서 그것은 잃어버린 십년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 서러운 것은 그러한 상실이 탐스러운 열매를 맺지 못한 십년이라는 데 있습니다. 딸도 목사님도 병고를 치르느라 힘이 들었고 거기에 남의 아픔까지 짊어지고 가시느라 힘든 이 속세의 삶에서 벗어난 것이, 그리고 주님 곁으로 가신 것이 큰 축복인데도 왜 눈물이 나오고 가슴이 터지는지.... 역시 저에게는 신앙의 힘이 부족했던 문지방에서 서성거린 십년이었다고 봅니다.

그리고 급기야 제 자신의 차례가 되어 지금 투병중이지요. 내 몸 가까운 곁에서 잠시도 떠나지 않고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질병인 게지요. 그러나 나의 신앙이 조금만 두터워진다면 주님이 제 머리맡에 계실 겁니다."

-신앙적으로 달라진 부분이 많은 한 해였을 것 같습니다.

"역설적이지요. 죽음이 있기 때문에 생명이 있는 것이지요. 만약 우리가 불사(不死)의 존재라면, 생명이란 것도 없었을 것입니다. 어둠이 없다면 빛 또한 존재하지 않지요. 수술을 세 번이나 하고 내 바로 코끝에서 죽음의 발자국 소리가 들릴 때, 비로소 나는 '아! 내가 지금까지 살아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모든 것이 새롭게 보였던 것이지요.

십자가란 곧 죽음입니다. 형틀이고 그것에 매달리게 되면 누구나 죽게 됩니다. 교회에 걸려 있는 무수한 십자가의 상징은 바로 죽음 속에서 생명이 부활하는 주님의 모습이었던 거지요. 그 십자가(十字架)는 바로 십자로(十字路)이기도 합니다. 사방으로 뚫려 있는 교차점입니다.

하박국의 처절한 메시지.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으로 향한 조건 없는 믿음과 열정 또 하나의 열병이 우리를 구원해 주는 것이지요."

이어령
▲3년 전 만났던 이어령 박사의 모습.

한국에서만 통용되는 '왜곡된 종교' 있을 것

-지난해 한국교회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많은 기념행사가 있었습니다.

"저 개인에게는 '루터 다시보기'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지요. 아주 사소한 일부터 말입니다.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나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한 말이 우리나라에서만 스피노자의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그러나 인터넷 검색을 해보면 알 수 있듯이, 가까운 이웃 일본만 해도 그 말을 한 사람은 마르틴 루터라고 되어 있지요. 그의 묘비명에도 뚜렷이 이 말이 새겨져 있어요. 아주 상징적인 오류이지요.

루터만이 아니라 한국에서만 통용되는 왜곡된 종교가 있을지 모릅니다. 잘못 알려진 루터, 개신교의 정신 등..., 사실 루터는 겁쟁이였지요. 애초부터 종교에는 관심이 없었고 대학에서 법을 전공하기 시작했을 무렵이었어요. 부모님을 만나고 학교로 돌아가는 길에 스토테른하임 근처 벌판에서 난데없는 벼락을 만나게 됩니다. 그 바람에 혼비백산하여 목숨만 살려주면 수도사가 되겠다는 기도를 합니다.

이렇게 시작한 그의 구도와 신앙의 삶이 엄청난 종교개혁의 태풍의 눈이 되어 세계에 새 바람을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종국에는 천둥벽력이 귓전을 때려도 놀라지 않는, 담대하고 흔들림 없는 믿음의 반석 위에서 오백년의 세월이 흘러도 불멸의 상으로 떠오르게 된 것이지요.

그러나 루터의 힘에는 26명의 '납병정(알파벳 활자)'들이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종교개혁은 인쇄 혁명 미디어의 혁명이기도 했지요. 사원의 대리석과 조각들을 성경의 문자들이 압도하였기에 가능한 것이었지요. 동시에 당시에 밀어났던 농민 혁명, 민중들의 정치혁명도 일어났고요.

인간 세상에는 혼자 힘으로 되는 일이 없어요. 그래서 인간의 모든 혁명에는 변수가 생기고 애초의 초심대로 되지 않는 굴절이 생겨납니다. 오늘의 교회가 500년 전 개혁하려던 당시와 같은 상황에 처해 있는 것도 그 때문이지요."

하나님, 스스로 있는 자... 인간은 홀로 존재 못해

-인간 자신의 힘으로 초월할 수 없다는 건가요.             

"이 세상 어느 곳에도 인간은 그리고 모든 생물들은 혼자서 존재할 능력이 없어요. 외부의 아무런 영향도 의존도 없이 살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말씀해 보세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 하나밖에 없는 유일자이고 절대자인 하나님이지요. 무신론자들이 그런 존재를 하나님이라고 부르지 않더라도 인정할 겁니다.

그것이 바로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 그 이름을 물었을 때 '나는 내 자신으로 스스로 있는 자'라고 말씀하신 것이지요. 그것이 바로 '에고 에이미(ego eimi, 내가 있다)'입니다. 영어로 하면 'I AM'인 거죠. 구약에서도 하나님은 자신을 '여호와'라고 하시지 않고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이게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우주에 있는 모든 것은 서로 맞물려 존재합니다. 지구는 태양을, 태양은 은하계를.... 별들의 무덤인 블랙홀을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그런 우주를 벗어나 혼자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런 우주의 질서를 만들어낸 창조자일 뿐입니다. 이것은 종교가 아니라 과학적 논리이지요. 타자 없이 홀로 존재하는 자족적인 것.

그래서 노자는 '인법지 지법천 천법도 도법자연(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이라고 했어요. 사람은 땅을, 땅은 하늘을, 하늘은 도를, 도는 자연을 따른다는 말이지요. 문자 그대로 자연(自然), 스스로 있는 것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자족(自足), 오토포이에시스(autopoiesis). 바렐라(Varela) 같은 생물학자가 내놓은 최신 이론으로 보면, 밖에서 인풋(input) 없이도 무엇인가를 창조해낼 수 있는 것과 같지요.

예수님께서 '내가 생명의 떡이라'고 하셨잖아요. 먹으면 죽는 빵이 아니라, 영원히 배고프지 않는 생명의 떡입니다. 광야에서 왜 돌을 빵으로 만들라는 말을 거부하고 하나님 말씀의 양식을 말했는가. 야곱의 우물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났을 때도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물'을 말씀하십니다. 이곳에 존재하는 것은 열역학 엔트로피의 법칙에 의해 영구한 게 없습니다. 모두 소멸하지요."

이어령 2018년 신년 대담
▲이 박사는 "완벽한 교회는 없다"며 "완벽한 교회가 있다고 하는 순간, 그 옛날 교황처럼 면죄부를 팔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성경은 '지상낙원'을 말하지 않았다

-기독교만이 그 본질을 갖고 있군요. 하지만 오늘날 교회는 사회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새롭다는 말을 함부로 써선 안 됩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게 없습니다. 제도를 고치고 고쳐 봐도 새로운 제도가 생겨날 뿐입니다. 베드로가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는 순간, 옛날과 다를 것이 없는 종교라는 또 하나의 인간이 만든 제도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게 가능해지려면 막시스트들이 외친 '영구 혁명', 혁명을 해서 고치는 순간 또 혁명을 하는, 끝없는 그 길뿐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언제나 사회적 비난과 핍박과 비판 속에서 거듭났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고칠 것이 없는 그런 교회는 일찍이 지상에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었습니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그게 가능하다면, 기독교의 메시지도 다 끝나는 것입니다. '개신(改新)'할 필요 없는 기독교가 이 지상에 이뤄졌다면, 그야말로 지상에 하늘나라를 만들어 세운 것이니까요.

성서에서 언제 이 지상에 낙원을 만든다고 했습니까? 늘 말씀드리지만, 오병이어가 기적이고 하늘의 뜻이라면 왜 예수님이 구름떼처럼 모여든 군중을 보고 산으로 피신하셨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왜 돌멩이로 빵을 만들지 않으셨습니까? 군중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온 게 아니라, 오병이어로 온 세상을 구원하는 사람을 예수로 잘못 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빵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먹으면 죽는 빵이 아니라 그 이상의 영원한 생명의 빵을 주시려고 한 것이 아닙니까. 교회는 혁신되어야 하고 세상의 비난에 대해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세속적 의미의 개신이 아니라, 기독교의 본질을 되찾는 개신에 소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교회를 돌로 빵을 만들어주는 '빈자의 빵공장'처럼 알고 있다면, 그것이 교회의 사명이라고 생각한다면, 오병이어의 기적을 주는 것이 교회라고 본다면, 구름떼처럼 군중이 모여 오겠지만 그 교회에 예수님은 안 계십니다. 그것을 교회의 혁신이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그 이상의 혁신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지금 교회가 비판받는 건, '진짜'가 있기 때문

-그것이 교회를 잘 다니시지 않는 이유라고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10년 전) 세례받았을 때 하용조 목사님과 약속한 것을 솔직히 말씀드릴 때가 온 것 같습니다. 저는 교회에 나가 사역하는 일보다는 강연이나 글로 사역을 하겠다고 말입니다. 각자 자신의 능력을 통해서 봉사하고 경배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싫어서도 아닙니다. 요즘 교회의 유행어 '가나안 성도'가 아닙니다. 가나안을 거꾸로 읽으면 '안 나가', 교회를 안 나간다는 은어와는 상관이 없다는 말입니다(웃음).

그래도 갈 만한 곳은 교회 밖에 없는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교회에 기대가 크기 때문에, 그만큼 교회에 대한 반감과 비난이 드세다고 봅니다. 물론 이름만 교회지 가짜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가짜, '짝퉁'이 많다는 건 진짜가 있다는 증거입니다(웃음).

진짜가 없는데 가짜가 나와요? 가짜 교회가 많다는 건, 진짜 교회가 어디엔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기를 칠 수 있는 거예요. 진짜 다이아몬드 없이 어떻게 짝퉁 다이아를 만들겠어요? 가짜가 진짜를 욕할 순 없지요.

지금 교회가 비판받고 있는 것은 진짜가 있기 때문에, 역설적인 게 아닙니다. 한국교회에 이만큼 많이 모이고 있는 것은 진짜가 있었다는 이야기이지요. 모두 비난받을 교회만 있다면, 거길 왜 가겠습니까?

집까지 내부순환도로를 이용할 때가 많은데, 항상 출구에서 막혀요. 차들이 정체되니 줄 서야 나갈 수 있어요. 그런데 차선을 위반하고 끼어드는 차들이 있어요. 그럴 때 절망하다가도 '아, 그래도 손해 보는 줄 알면서도 법을 지키고 줄서 기다리는 차들이 새치기하는 차들보다 많구나'하고 생각하면 희망이 생겨요.

옛날 '통금'이 있었던 시절, 교회가 가난하고 신도들도 많지 않았을 시절, 크리스마스가 참 요란했지요. 곳곳 상점과 길거리에서는 캐럴이 울리고 크리스마스 트리들이 하늘의 별보다 더 빛났지요. 믿지 않는 사람들이 술 마시고 통금해제로 철야를 하며 자유롭게 밤의 축제를 즐겼어요.

통금해제로 세속적인 향연이라 비난을 받았지만, 그것이 바로 진짜 크리스마스지요. 믿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그게 탈선이라 해도 자유를 맛보게 하고, 하룻밤이라도 밤하늘을 보며 즐거움을 맛보게 한 선물.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도 사랑을 베푸셨던 예수님의 정신."

-인공지능의 시대에 대해 이미 '디지로그, 생명자본' 같은 데서 예견한 글을 쓰셨는데, 그 시대의 기독교란 어떤 형태로 존재할까요.

"500년 전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 하는 짓은 똑같아요. 그래서 하나님도 똑같이 계시지요. 우리가 정말 달라져서 신처럼 인공지능을 만들 수 있다면, 하나님은 존재하시지 않겠지요.

그래서 저는 오히려 완벽한 것이란 없는 이 세상을 보고 '정말 우리가 선악과를 따먹고 추방당했구나, 낙원이 있었구나' 거꾸로 아는 것이지요. 빛을 본 자만이 어둠을 알고, 죽음을 아는 자만이 생명을 알지요. 영원히 죽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생명에 대해 알 수 있을까요?"

이어령 2018년 신년 대담
▲이어령 박사는 "'가나안 성도'들이 다시 돌아올 때까지, 우리는 이사 가지 말고 잘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가나안 성도'라는 말 들으니... 아직 희망 있다

-아까 말씀하셨듯 요즘 교회를 '안 나가는' 사람을 거꾸로 '가나안 성도'라고 합니다. 신앙인들도 교회는 나가지 않는 시대, 교회는 이 사회와 불신자들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요.

"그 사람이야말로 가장 가능성이 많습니다. 뒤집어 읽을 줄 아는 사람이라면, 다시 뒤집어 읽으면 됩니다(웃음). 그게 바로 예수님 잡으러 다니다가 예수님 믿는 사람, 예수님을 부정하다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미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교회는 이미 아니까 안 나가는 것이지요. 다녔으니 알고 있겠지요. 그런 사람들은 <탕자, 돌아오다(탕자의 비유)>처럼 반드시 돌아올 길이 있습니다. '가나안'이라고 뒤집는 사람들이 자꾸 나오면, 또 다시 뒤집으면 됩니다. 하지만 원래 안 나가던 사람은 뒤집으면 더 나빠질 수 있지요.

'안 나간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의지가 있는 사람입니다. 아버지·어머니가 믿으니까, 목사님이 믿으라고 하니까 교회 나가는 사람보다..., 스스로 박차고 나온 사람 아닙니까.

<탕자, 돌아오다>의 형을 보십시오. 알지도 못하면서 아버지를 섬깁니다. 그러니 아버지가 탕자가 돌아올 때 뛰쳐나가는 게 싫었습니다. 돼지나 주는 야생 열매를 먹고 고생하던 사람이, 집으로 돌아오면 비로소 아버지가 잡아주는 양고기의 맛이 어떤 것인가를 알겠지요. 매일 양고기를 먹던 형이 알겠습니까? 다만 상속자로서 권위와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 집에 남아있던 것입니다.

그런데 둘째, 탕자는 아니었어요. 진리를 찾아 떠난 것이지요. 이 집 바깥에 아버지가 모르는,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있나보다', 그것이 구도(求道)입니다. 끝없이 도를 구하는 것이지요.

'가나안 성도'라는 말을 들으니, 한국교회에 몇십 년 후에는 다시 르네상스가 오겠구나 싶습니다. 그렇게 뛰쳐 나가십시오. 탕자는 반드시 돌아옵니다.

다만, 조건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때까지 이사가지 말고 잘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돌아가려야 돌아갈 수가 없지 않습니까(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