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현지시간으로 지난 3월 22일, 국회의사당 근처 웨스트민스터 다리. 맹렬히 돌진하던 차량이 행인들을 덮쳤다.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한국인 5명도 부상을 입었는데, 그 중 사람들에게 떠밀린 박춘애 할머니(70)가 있었다. 머리에 중상을 입었다. 그녀는 약 4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런던의 한 병원에 있다. 그 사이 뇌수술을 3차례나 받았다.
그 날의 끔찍했던 기억. 자녀들이 보내준 효도관광의 들뜬 마음은 영국에 도착한 뒤 불과 하루 만에 산산조각이 났다. 당시 남편과 함께 있었지만 잠시 떨어진 사이 불행히도 홀로 변을 당했다.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사고. 하지만 어둠의 그림자는 그렇게 예고 없이 찾아왔다.
박 할머니는 급히 병원으로 옮겨졌다. 소식을 들은 자녀들도 한 걸음에 달려왔다. 황망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말부터 통하지 않았다. 기댈 곳이 없었다. 까마득한 곳에서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마침내 만난 전공수 목사(55, 런던열린문교회 담임). 그는 18년 전 영국으로 건너와 한인들을 대상으로 목회했고, 지금은 영국 현지 57개 한인교회가 회원으로 있는 재영한인교회연합회 부회장이다.
전 목사가 박 할머니 소식을 들은 건 그가 난민 사역을 위해 그리스 아테네에 잠시 있을 때였다. 전화가 걸려왔다. 경북 영천에 있는 대창중앙교회 주종근 목사였다. 교인 중 한 명이 런던에서 머리를 다쳤는데 도와줄 사람이 없다고. 혹시 그를 좀 찾아가 주면 안 되겠느냐는 부탁이었다. 바로 박 할머니 얘기였다.
그토록 다급하게 전화를 걸어온 주종근 목사는, 지금은 고인이 된 전공수 목사의 부친과만 아는 사이였다. 그러니 전 목사와는 가깝지 않았다. 하지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영국이라는 낯선 땅에서 교인이 사고를 당했으니. 그렇게 수소문 끝에 전 목사와 연락이 닿은 것이다.
주 목사와 통화를 끝낸 전 목사. 그는 곧 런던으로 향했다.
이윽고 박 할머니가 있는 병원(St. Mary's Hospital, 지금은 재활병원인 Charing Cross Hospital로 옮겼다-편집자 주)을 찾은 날. 40대의 큰 아들이 전 목사 앞에 섰다. 눈빛에 날 서 있다. 전 목사를 경계하는 큰 아들. 사투라 할 만큼 치열했던 가족들은 이미 예민할 대로 예민해진 상태였다. 전 목사는 일단 이들을 안심시키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찾아온 경위를 정중히 설명했고, 영국이 어떤 곳인지, 자신이 이곳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차근차근 전달했다.
가족들은 온화한 전 목사에게 서서히 마음의 빗장을 풀기 시작했다. 일면식도 없던 이가 같은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먼저 내민 손. 박 할머니와 가족들은 그제야 속에 있던 이야기를 털어놓은 뒤 그 손을 잡았다.
박 할머니는 모태신앙인이었다. 그녀의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신실하신 분들이었다고. 그랬던 박 할머니는 젊은 시절, 지금의 남편과 결혼했다. 하지만 그에겐 기독교 신앙이 없었다. 결혼 후에도 박 할머니는 교회를 다녔지만 이런 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왜냐하면, 시부모님의 모진 반대 때문이었다. 그렇게 무려 45여 년 동안 교회와 떨어져야 했던 박 할머니. 그러던 중 시부모님이 세상을 떠나셨고, 박 할머니는 약 1년 6개월 전부터 다시 교회를 나가기 시작했다. 매우 열심히. 바로 경북 영천에 있는 대창중앙교회다.
"내가 하나님을 떠났기에 이런 벌을 받는구나..."
전 목사에 따르면 박 할머니는 이런 말로 자신을 자책했다고 한다. 전 목사는 그런 할머니를 위해 조용히 기도했다.
"망설이지 않았어요, 저 역시 그랬으니까!"
전 목사가 할 수 있는 건, 할머니가 퇴원해 건강히 한국으로 돌아가실 때까지 그녀를 간호하는 일, 그리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일이었다. 박 할머니는 오른쪽 머리에 큰 상처를 입어 왼쪽 몸에 마비가 왔다. 뇌를 다친 할머니는 언어가 통하지 않는 환경에서 혼자 중환자실에 있어야 했다. 때문에 극도로 불안한 증세를 보였다. 설상가상 헛것이 보이는 '섬망'까지 찾아왔다. 간호사들과 보호자들은 당황했다.
우리와는 문화가 다른 영국은 그런 박 할머니를 처음엔 혼자 두려 했다. 하지만 할머니의 병세는 도저히 그렇게 둘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전 목사는 옆에서 할머니를 돌볼 수 있게 해 달라고 병원 측을 설득했다. 마침내 허락을 받아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간호할 사람들이 턱없이 부족했다. 가족들의 심신은 이미 지칠 때로 지쳐 있었다. 전 목사는 자신의 아내와 교인들을 동원했다. 또 여기서 그치지 않고 SNS를 통해 자원봉사자들을 모집했다. 이후 수십 명의 한인들이 자원했다. 팔을 걷어붙이고 할머니를 돌보기 시작했다. 기적의 시작이었다.
박 할머니는 차츰 안정을 찾아갔다. 세 번의 수술을 마쳤고 지금은 조금씩 걷기 시작했다고 한다. 전 목사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할머니를 찾았다. 그의 아내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밥과 김치, 장아찌 등을 날랐다. 영국 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는 할머니를 위한 배려였다. 또 전 목사가 담임하는 교회의 교인들도 너나 할 것 없이 할머니의 곁을 지켰다.
"제 아버지 역시 목회자셨습니다. 하지만 35년 전, 교통사고로 어머니와 함께 그만 세상을 떠나셨죠. 그 뒤 저에겐 아무 것도 남은 게 업었습니다. 먹을 쌀이 없어 굶기를 밥 먹듯 했어요. 그런 우리 4남매를 외면하는 이들에게 상처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절 도와주신 분들이 많이 있었어요. 지금의 제가 있는 것은 그런 도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도움이 필요한 사람의 절박함을 잘 압니다. 그래서 박 할머니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단 한 순간도 망설인 적이 없었어요.
'그래 도와드리자. 내가 받았던 걸 돌려드릴 기회구나. 그게 하나님을 믿는 자가 해야 할 일이니까. 옆에서 불안에 떨며 간호하게 될 가족들, 조금이라도 쉬게 해 드리자' 이런 마음뿐이었죠."
전공수 목사의 말이다. 그리고 전 목사는 자신의 이름이나 혹은 그가 시무하는 교회의 이름으로 이런 봉사를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렇게 하면 한 개인과 교회의 선행으로만 그칠 뿐이라고. 대신 그는 재영한인교회연합회를 내세웠다. 영국에 있는 모든 한인교회가 섬김의 본을 보여, 믿지 않는 이들에게 전도의 길이 열리길 바랐던 까닭이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께만 모든영광을 올려드리길 원했다. 현지 한인교회 뿐만 아니라 그것에 사는 한인들을 대상으로 모금운동도 펼쳤다. 이는 재영한인교회연합회가 생긴지 27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한다.
"한국에 있는 교회가 그립네요"
사실 사고가 나고 지금까지 3개월 반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가장 많이 변한 건, 박 할머니도 전공수 목사도 아니다. 다름 아닌 할머니의 남편, 그리고 그녀의 세 자녀들이다. 전 목사 부부를 비롯한 교인들과 한인 자원봉사자들의 극진한 보살핌에 감동한 가족들은 기독교에 대해 갖고 있던 편견을 조금씩 걷어낼 수 있었다.
평소 신앙이 없던 남편은 사고 후 3주가 지난 4월 8일까지 할머니 곁을 지키다 한국으로 돌아가셨고, 그 다음 날부터 대창중앙교회 새벽예배를 나가기 시작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빼놓지 않고 있다. 물론 주일예배도 빠지지 않는단다.
첫째 딸인 방선교 씨는 "전공수 목사님과 교인분들, 그리고 자원봉사자님들이 계시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까지 견딜 수 없었을 것"이라며 "아픈 어머니 곁에서 말벗이 되어 주시고, 먹을 음식을 가져다주시고, 현지인들과 말이 통하지 않는 어머니의 입을 대신해 그 뜻을 전달해 주신 모든 분들께 이 지면을 빌려 감사하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다.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 했다.
그는 "사고가 나고 처음엔, 하나님을 믿는 어머니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나야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 같은 건 없다고 생각했다. 가끔 하나님이라는 말을 어머니가 꺼내실 때면, 그런 말 좀 하지 말라고 독한 말을 하곤 했었다"며 "그런데 전 목사님을 만나고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그런 생각도 달라졌다. 지금까진 종교가 없었는데 이젠 기독교에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고 있다"고 했다.
선한 사마리아인. 강도를 만나 상처를 입고 길에 쓰러진 이를 그냥 지나치지 않고, 도와준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는 "과연 누가 이웃인가?"라는 물음에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말씀이다. 그런 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하셨다. 주님의 이 명령에 전공수 목사는 순종했고, 그렇게 박 할머니와 가족들의 이웃이 되었다.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끝으로 회복 중인 박 할머니의 소박한(?) 소망을 옮긴다.
"얼른 한국으로 돌아가 교회 다니고 싶어요. 교인들도 그립고. 목사님이 많이 보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