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미국 한 대학의 연구에 따르면 종교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근심·걱정과 우울증에 시달릴 확률이 무려 81%나 적은 것으로 조사됐다. 설사 병에 걸리더라도 회복되리라는 확신도 더 강한 것으로 나타났다.
직업별 평균수명을 살펴봐도 목회자를 포함한 ‘종교인’은 82세로 모든 직업군 중 가장 높다. 이 대학 연구진은 “독실한 종교적 신념이 있는 사람일수록 확실한 자신감과 목적의식이 있다”며 “보통은 제어할 수 없는 환경에 처하면 근심걱정과 불안 또는 우울증이 몰려오지만, 종교인들은 간접적인 형태의 제어 능력에 의지해 안정을 취하게 된다”고 분석했다. 하나님을 믿고 일어서거나 견뎌낸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크리스천들의 일상에는 여전히 걱정과 근심, 불안과 의심이 가시질 않는다. 당장 목회자들부터 성도들 걱정만 해도 밤잠을 설칠 때가 부지기수이다. 설교는 또 얼마나 노심초사 심혈을 기울여야 하는 작업인가. 직장에서, 가정에서 매일같이 전쟁 같은 삶을 살고 있는 평신도들은 말할 것도 없다.
이러한 이들에게 <나는 크리스천인데 왜 걱정할까(아드폰테스)>는 ‘습관적인 걱정’에서 벗어나는 가장 성경적인 방법들을 제시한다. 저자인 목회자 윌 하트와 정신과 의사 롭 월러는 기독교와 정신건강의 상관관계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훈련하는 영국 단체 ‘마인드 앤드 소울(Mind & soul)’의 공동 대표이다.
적절한 역할분담으로 걱정의 실체와 원인을 파악하고 단계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저자들은 앞부분부터 “모든 걱정을 단번에 해결해줄 비법을 찾는 사람은 이 책에서 비결을 찾지 못할 것”이라고 선포한다. 걱정은 인간이 느끼는 지극히 정상적인 감정의 하나이고, 성격적으로 걱정이 많을 수도 있다. 위험한 상황에서 적절히 대비할 수 있게 하는 등 걱정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 정도 수준에 ‘쓸데없는 역할’이 추가되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걱정에는 크게 두 유형이 있는데, 현재 진행중인 문제를 위한 ‘해결을 위한 걱정’과 당장 급하지 않고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문제에서 비롯되는 ‘떠도는 걱정’, 걱정을 위한 걱정이다. 둘을 판별하려면, 내가 하는 걱정에 ‘만약에…’를 붙여보면 된다. 이 ‘떠도는 걱정’은 범불안장애와 우울증으로 발전하는 악순환의 시작이며, 심지어 ‘걱정에 대해’ 걱정하기도 한다.
저자들은 걱정에서 벗어나려면 먼저 ‘반드시 ~해야 한다’, ‘항상, 절대로’, ‘만약 ~라면’ 등에서 비롯되는 ‘걱정 법칙들’의 뿌리를 잘라내야 한다고 말한다. 걱정하는 사람들은 선천적으로 조심성이 많고 윤리적이어서 인생의 여러 법칙들을 존중하기 마련이지만, 가장 약한 걱정 법칙부터 도전해 나가거나, 논리적인 걱정 또는 걱정은 유익하다는 자신의 생각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것.
무엇보다 ‘걱정 법칙 위에 계신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 걱정 법칙에는 대부분 ‘감정’이 깊이 연루돼 있는데, 그리스도인으로서 누구를 신뢰해야 하는지를 자문하면서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선포하신 예수님을 받아들여야 한다.
또 크리스천들에게는, ‘걱정하면 믿음 없어 보일까’ 하는 하나의 걱정이 추가된다. 이를 고백하면 정죄당할까봐 쉬쉬하면서 남몰래 고통당하는 성도들이 적지 않다.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 라는 찬송 가사는 들을 때마다 ‘걱정거리’다. 저자들은 이를 “‘걱정(염려)하지 말라’는 성경 말씀에 대한 몰이해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이 말씀을 읽고 걱정하는 자신을 자책하며 괴로워하라고 주신 말씀이 아니지 않느냐는 것.
이들은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으면, 뭐라고 말씀하시겠는가?” 라고 반문하며 “예수님은 우리가 필요를 걱정하는 데만 정신이 팔린 나머지 그분과 떨어져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시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시고 모든 필요를 공급하실 줄을 믿고 그 분만 의지하기를 원하신다”고 답한다.
특히 마태복음 6장 34절의 ‘한 날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니라’와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두 구절을 ‘오늘’과 ‘내일’의 걱정이라 칭하면서 “예수님은 걱정하지 말도록 힘쓰라거나 내일은 더 좋아지리라는 막연한 조언이 아닌, 생생하고 지속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강력한 명령을 주신다”고 강조한다. 오늘의 걱정은 ‘해결 가능한 걱정’이고, 내일의 걱정은 ‘떠도는 걱정들’일 뿐이다. “예수님은 걱정하는 사람들을 ‘현재’로 이끄시고 거기에 집중하는 법을 배우라고 말씀하시며 걱정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신다.”
그리고 ‘확실성’을 추구하지 말 것을 조언한다. ‘하나님의 용서’는 믿음과 신뢰의 영역이지, 확실성과 행동의 영역이 아니라는 것. “구원은 ‘대문이 잠겼는지 재차 확인하듯’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예수님을 온전히 신뢰할 뿐이다.” 용서받았다는 ‘느낌’, 지금 하나님과 함께하고 있는 ‘느낌’이 없어 괴로워하는 성도들이 많은데, 걱정에서 벗어나려면 우리가 옳다고 느끼는 것들보다 더 높은 성경의 권위를 믿는 통찰력과 용기가 필요하다. 확실성을 추구하다 보면 절망감만 생길 뿐이다.
“믿음의 본질을 극복하기 위해 당신이 받아야 할 테스트 따위는 없다. 오히려 성경은 주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신다. 확실성을 찾아 헤매는 일을 그만두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지혜로운 처사다.” 교회가 이러한 것들을 요구하기보다, ‘치유’의 역할을 감당해달라는 뜻이다. 책은 이외에도 불확실성을 이기는 법, 걱정을 뛰어넘는 소망을 붙드는 법 등을 영적·의학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직업별 평균수명을 살펴봐도 목회자를 포함한 ‘종교인’은 82세로 모든 직업군 중 가장 높다. 이 대학 연구진은 “독실한 종교적 신념이 있는 사람일수록 확실한 자신감과 목적의식이 있다”며 “보통은 제어할 수 없는 환경에 처하면 근심걱정과 불안 또는 우울증이 몰려오지만, 종교인들은 간접적인 형태의 제어 능력에 의지해 안정을 취하게 된다”고 분석했다. 하나님을 믿고 일어서거나 견뎌낸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크리스천들의 일상에는 여전히 걱정과 근심, 불안과 의심이 가시질 않는다. 당장 목회자들부터 성도들 걱정만 해도 밤잠을 설칠 때가 부지기수이다. 설교는 또 얼마나 노심초사 심혈을 기울여야 하는 작업인가. 직장에서, 가정에서 매일같이 전쟁 같은 삶을 살고 있는 평신도들은 말할 것도 없다.
이러한 이들에게 <나는 크리스천인데 왜 걱정할까(아드폰테스)>는 ‘습관적인 걱정’에서 벗어나는 가장 성경적인 방법들을 제시한다. 저자인 목회자 윌 하트와 정신과 의사 롭 월러는 기독교와 정신건강의 상관관계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훈련하는 영국 단체 ‘마인드 앤드 소울(Mind & soul)’의 공동 대표이다.
적절한 역할분담으로 걱정의 실체와 원인을 파악하고 단계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저자들은 앞부분부터 “모든 걱정을 단번에 해결해줄 비법을 찾는 사람은 이 책에서 비결을 찾지 못할 것”이라고 선포한다. 걱정은 인간이 느끼는 지극히 정상적인 감정의 하나이고, 성격적으로 걱정이 많을 수도 있다. 위험한 상황에서 적절히 대비할 수 있게 하는 등 걱정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 정도 수준에 ‘쓸데없는 역할’이 추가되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걱정에는 크게 두 유형이 있는데, 현재 진행중인 문제를 위한 ‘해결을 위한 걱정’과 당장 급하지 않고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문제에서 비롯되는 ‘떠도는 걱정’, 걱정을 위한 걱정이다. 둘을 판별하려면, 내가 하는 걱정에 ‘만약에…’를 붙여보면 된다. 이 ‘떠도는 걱정’은 범불안장애와 우울증으로 발전하는 악순환의 시작이며, 심지어 ‘걱정에 대해’ 걱정하기도 한다.
저자들은 걱정에서 벗어나려면 먼저 ‘반드시 ~해야 한다’, ‘항상, 절대로’, ‘만약 ~라면’ 등에서 비롯되는 ‘걱정 법칙들’의 뿌리를 잘라내야 한다고 말한다. 걱정하는 사람들은 선천적으로 조심성이 많고 윤리적이어서 인생의 여러 법칙들을 존중하기 마련이지만, 가장 약한 걱정 법칙부터 도전해 나가거나, 논리적인 걱정 또는 걱정은 유익하다는 자신의 생각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것.
무엇보다 ‘걱정 법칙 위에 계신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 걱정 법칙에는 대부분 ‘감정’이 깊이 연루돼 있는데, 그리스도인으로서 누구를 신뢰해야 하는지를 자문하면서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선포하신 예수님을 받아들여야 한다.
또 크리스천들에게는, ‘걱정하면 믿음 없어 보일까’ 하는 하나의 걱정이 추가된다. 이를 고백하면 정죄당할까봐 쉬쉬하면서 남몰래 고통당하는 성도들이 적지 않다.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 라는 찬송 가사는 들을 때마다 ‘걱정거리’다. 저자들은 이를 “‘걱정(염려)하지 말라’는 성경 말씀에 대한 몰이해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이 말씀을 읽고 걱정하는 자신을 자책하며 괴로워하라고 주신 말씀이 아니지 않느냐는 것.
이들은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으면, 뭐라고 말씀하시겠는가?” 라고 반문하며 “예수님은 우리가 필요를 걱정하는 데만 정신이 팔린 나머지 그분과 떨어져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시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시고 모든 필요를 공급하실 줄을 믿고 그 분만 의지하기를 원하신다”고 답한다.
특히 마태복음 6장 34절의 ‘한 날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니라’와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두 구절을 ‘오늘’과 ‘내일’의 걱정이라 칭하면서 “예수님은 걱정하지 말도록 힘쓰라거나 내일은 더 좋아지리라는 막연한 조언이 아닌, 생생하고 지속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강력한 명령을 주신다”고 강조한다. 오늘의 걱정은 ‘해결 가능한 걱정’이고, 내일의 걱정은 ‘떠도는 걱정들’일 뿐이다. “예수님은 걱정하는 사람들을 ‘현재’로 이끄시고 거기에 집중하는 법을 배우라고 말씀하시며 걱정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신다.”
그리고 ‘확실성’을 추구하지 말 것을 조언한다. ‘하나님의 용서’는 믿음과 신뢰의 영역이지, 확실성과 행동의 영역이 아니라는 것. “구원은 ‘대문이 잠겼는지 재차 확인하듯’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예수님을 온전히 신뢰할 뿐이다.” 용서받았다는 ‘느낌’, 지금 하나님과 함께하고 있는 ‘느낌’이 없어 괴로워하는 성도들이 많은데, 걱정에서 벗어나려면 우리가 옳다고 느끼는 것들보다 더 높은 성경의 권위를 믿는 통찰력과 용기가 필요하다. 확실성을 추구하다 보면 절망감만 생길 뿐이다.
“믿음의 본질을 극복하기 위해 당신이 받아야 할 테스트 따위는 없다. 오히려 성경은 주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신다. 확실성을 찾아 헤매는 일을 그만두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지혜로운 처사다.” 교회가 이러한 것들을 요구하기보다, ‘치유’의 역할을 감당해달라는 뜻이다. 책은 이외에도 불확실성을 이기는 법, 걱정을 뛰어넘는 소망을 붙드는 법 등을 영적·의학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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