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7월 문을 연 새희망샛별교회는 ‘통일을 준비하는 교회’다. 교회 성도들 30-40여명 중 탈북민과 비탈북민 비율이 반반이다. 사역자인 탈북민 이소망 목사(가명)는 “사람의 통일이 진정한 통일”이라며 “통일이 되면 원하든 원치 않든 남북한 사람이 섞일 수밖에 없는데 그때도 북한 교회에는 북한 사람들만, 남한 교회에는 남한 사람들만 교회 다닐 수는 없지 않느냐”고 말한다. 현재 탈북민 2만5천여명이 한국에 들어왔지만 제대로 정착하지 못한 채 물과 기름처럼 분리돼 있는데, 이 목사는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도 ‘복음’ 뿐이라고 강조했다.
-탈북 후 신학을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탈북 후) 중국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훈련을 받으면서 사역을 하게 됐는데, 하나님께서 북한과 이 민족의 회복을 위해 저를 부르셨다는 소명을 느꼈습니다. 사실 중국에서 사역하다 북송돼 굉장히 많은 어려움을 겪었는데, 그곳에서 더욱 확실히 그 소명을 느꼈습니다. 다들 최소한 수용소행이라 생각했는데 살아서 나오게 됐어요. 그때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이 일을 위해 나를 살리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2001년 다시 탈북해 2002년 신학을 하러 한국에 왔습니다.
사실 한 차례 잡히기 전 선교사님들께서 한국으로 가 신학을 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는데, 그때는 거부했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당장 북한이 무너지고 열릴 것 같았거든요. 소위 신앙심에 불타서(웃음), 신학을 배우고 이럴 새가 없어 보였어요. 그랬는데 북한에 들어가서 보니 북한 상황이 굉장히 어두웠고, 하나님의 때에 회복하려면 더 많이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믿음도 있는 줄 알았는데 현장(북한)에 가 보니 별로 신앙도 없었음을 체험했어요.”
-북송됐을 때 있었던 일이 궁금하다. 어떻게 풀려날 수 있었는지는 더욱 궁금합니다.
“고문보다는, 감방에서 규칙을 어겼다는 명목으로 간수들이 형벌을 가했습니다. 저보다는 옆방 사람들이 고문당하는 걸 계속 목격했었죠. 졸거나 움직이면 갇혀있는 쇠창살에 머리를 대라고 해서 때리거나 배식구에 다리를 내밀라 하고는 밟고, 발목에 걸고 비틀면 엄청나게 고통스러운 북한식 족쇄를 찼습니다. 다리 굽혔다 펴기나 팔굽혀펴기 몇백 회 등 정말 곤욕스러운 기합들을 일상적으로 진행했어요.
사실 보위부 사람들도 신앙은 바꿀 수 없다는 걸 알아요. 그래서 ‘다시는 예수 믿지 마라’ 이런 말 대신, ‘너희는 죽어야 바뀐다’고들 합니다. 취조받기 전 ‘오늘도 취조 잘 이기게 해 주시고 조사관의 마음을 바꿔 주시고…’ 하면서 매일 기도했는데, 취조관들이 그걸 보면 ‘이제 기도 끝났어? 무슨 기도 했는지 맞춰볼까?’ 하고는 제가 속으로 한 기도를 그대로 말하더라고요. 섬뜩했어요. 그만큼 노련합니다. 북한에서는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 자체가 반역행위이기 때문에 모두가 저에게 사형감이라고 했고, 어떤 취조관은 ‘내가 나서서 널 죽이겠다’고까지 말했습니다.
취조관들이 중국에서 있었던 일들을 일 단위로 쪼개서 쓰게 합니다. 2백장 가까이 쓴 것 같은데, 너무 쓰다 보니 손에 굳은살이 배길 정도였어요. 그런데 제가 중국에서 한 일이라곤 성경공부나 성경통독 뿐이어서, 구체적으로 쓰라니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다 써야 했어요. ‘이걸 보고 저들이 혹시 하나님을 믿게 된다면…’ 이런 기도도 했죠. 그렇게 한 달 반이 지나니 몸에 힘이 다 빠지고 여위어갔습니다. 하루종일 쓰면서 기도만 한 것 같아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죽지 않는다’는 마음을 주셨어요. 이런 고난도 하나님의 때에 저를 사용하기 위해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강제노동 6개월형을 받고 나왔는데, 모두들 기적이라고 했어요.
한 달간 몸을 추스르고 나니 다시 나가야겠다는 생각 뿐이었습니다. 부모님은 반 년만 있다가 가라고 하셨지만, 예배가 너무 갈급했어요. 하나님께서 목적이 있으셔서 살리셨는데, 언제 다시 잡힐지 모르는 이곳에 더 있으면 안 되겠더라고요. 그렇게 다시 두만강을 건넜는데, 이제는 두렵지 않았습니다. 다시 잡힐 거라면 살리지도 않으셨으리라고 믿었어요. 다시 나왔더니, 죽어야 했을 사람이 살아왔다며 스파이라는 오해도 많이 받았습니다(웃음). 물론 불효한 부분은 너무나 마음이 아픕니다. 어머니는 제가 한국 온 뒤에, 아버지는 몇 년 전에 돌아가셨거든요.”
-하나님을 전혀 모르고 살다가 신학을 시작했는데, 이해하기 힘든 부분은 없었나요.
“사실 중국에서 처음 성경공부를 할 때는 다 믿기질 않았습니다. 특히 구약에 나오는 기적 같은 것들은 도무지 믿기질 않았죠. 4-5개월간 밥 먹고 성경 읽고 예배드리고를 반복했는데, 어느 때인가 성령님께서 만지셨는지 갑자기 모든 것이 그대로 믿게 됐어요. ‘다른 건 다 믿어도, 이런 부분들은 믿지 못하겠다’던 것들도 믿을 수 있게 되기 시작했죠. 한국 들어와서 신학 공부를 할 때도 그러한 경험이 큰 영향을 줬습니다. 오히려 신학교에서 ‘성경에 오류가 있다’는 등 많은 학설들은 믿지 못하겠더라고요. 저는 성경무오설을 믿습니다.”
-그러한 경험들이 탈북민 목회에 어떤 영향을 끼쳤나요.
“우리 교회 성도들 중 절반 정도가 탈북민입니다. 한국의 탈북민 사역에 있어 보편적 방법 중 하나가 ‘물질적 접근’인데, 저는 여기에 별로 동의하지 않아요. 바른 신앙을 갖게 하는 데는 걸림돌이 됩니다. 그런 잘못된 접근 때문에 탈북민들이 바른 신앙을 갖지 못하고 오락가락하고 있어 안타까워요.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는건 아니지만, 탈북민들을 북한의 문이 열릴 때 회복시킬 사명자들로 준비시키는 데 관심을 더 쏟아야 한다고 봅니다. 상황별로 올바로 준비를 시켜야지, 일방적으로 모든 것을 지원하는 태도는 문제가 있습니다.
탈북민 사역을 하면서, 단지 물질로 교회에 데려와서 마음을 사고 변하는 건 아니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탈북민들을 변화시키는 것도 결국은 ‘온전한 복음’밖에 없습니다. 우리 교회 탈북 청년들만 봐도, 지원을 하지 않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를 다니면서 십일조도 하고 여러 헌금도 하고 있습니다. 그게 신앙의 유일한 기준은 아니지만, 헌금에 대해 일체 얘기한 적도 강조한 적도 없지만 바른 신앙을 갖게 되더라고요. 오히려 물질적으로 힘든 대학생들이 헌금을 하는 모습을 봅니다.”
-그렇다면, 한국교회가 탈북민 선교에 있어 무엇을 도와야겠습니까.
“사랑과 진심이 답입니다. 탈북민들이 굉장히 눈치가 빨라요. 진심이냐 아니냐를 다 알고 있습니다. 진정성 있게 하면 돈보다 큰 효과를 낼 수 있습니다. 탈북민 돕는 걸 반대하는 게 아니라, 진심을 보여주면서 어려움을 겪고 있으면 함께 돕고 이런 부분들이 오히려 더 큰 효과가 있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돈으로 조정하려 하면 진정한 감사도 없어지고 상황에 따라 굉장히 자존심이 상하기도 합니다. 어려운 삶 때문에 탈북민들이 물질을 좇아가는 것도 사실이지만, 자존심은 있어요. 어느 정도 의식이 바뀌면 이런 부분을 수치스럽게 생각합니다.
이런 부분들에서 한국교회가 좀더 연구하고 신중히 할 필요는 있습니다. 장학금 주는 게 나쁘다는 말이 아니라,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 라는 마음으로 감사하면서 바른 신앙을 세울 방법을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거에요. ‘장학금 준다’고 소문 내서 사람들을 모으기보다, 믿음 안에서 몸부림치는 탈북민들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정말 생활비가 없어서 어려워하는 이들을 소리없이 도와주는 건 어떨까요? 사랑하면 다 보이잖아요. 자랑하지 않고, 가족처럼 소리없이 주는 것이 진정한 도움이 아닌가 합니다. ‘어느 교회 나간다’ 하면 사람들이 ‘장학금 때문에 나가는구나’ 하고 다 판단하고 있습니다.”
-통일을 준비하는 교회가 되겠다고 하셨는데요.
“‘또 하나의 교회’를 세우기보다, 진짜 통일을 준비하는 교회를 세우는 게 설립의 목적이었습니다. 북한의 때가 가까왔기 때문에 빨리 준비해야 한다는 마음을 많이 주십니다. 아직 탈북민들이 남한 사회에 제대로 정착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나마 교회에서 하나가 되는 모습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통일 후에 북한과 남한 사람들이 따로 예배드려서는 안 되지 않겠습니까? 저는 ‘사람의 통일’이 진정한 통일이라 생각합니다.
한국교회도 북한선교를 ‘특수사역’처럼 여기는데, 이런 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실까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공동체도 다르고, 예배도 따로 드리고 있잖아요. 하나님께서 ‘하나 되라’고 하신 건, 이런 점들을 하나가 되라시는 게 아닐까요. 그래서 저희가 이런 부분들의 ‘모델 교회’를 세우려 합니다. 이러한 교회들 1천곳을 세우는 것이 비전입니다. 교회는 작지만, 사람을 준비하는 사명자들을 준비시키는 게 목적입니다. 이를 위해 한국교회가 동참해 주시고 동역자가 되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는 탈북민들 뿐 아니라 한국교회도 함께 준비해야 할 일입니다. 남한 사람들이 뒤에서 응원하고 기도만 할 것이 아니라, 함께 가야죠. 저희들에게도 아직 동역자들이 너무 적습니다. 우선 개척교회에는 관심도 없고 함께 하려고도 하지 않고…. 저희 교회가 처음 반주자가 없어 여러 분들에게 부탁해 봤는데, 그때 ‘이 사역에 참 관심이 없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힘든 일이라 동참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요. 결국 능숙하진 못하지만 저희가 기도하면서 하자고 결정하고, 한 집사님이 하다 보니 실력도 늘고 그렇게 했습니다.
북한에 세워질 교회는 정말 ‘초대교회’처럼 지어져야 합니다. 오랫동안 공허하고 눌려 있던 자들과 함께 울고 웃을 수 있는 교회들이 세워져야 합니다. 화려하진 않지만 함께할 수 있는 교회들이 북한 지역에서 시작되고 세워져야 순수성을 오래 지켜갈 수 있지 않을까요. 그래야 하나님께서도 통일된 한국교회를 열방을 위해 사용할 것입니다. 너무 잘 짜여지고 화려한 예배나 교회가 들어가면 북한 교회도 금방 세속화되고 타락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습니다. 주제넘은 소리인지 모르지만, 우리가 그때 그런 교회들을 들어오지 못하게 막자는 얘기들도 나눕니다(웃음).”
-탈북 후 신학을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탈북 후) 중국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훈련을 받으면서 사역을 하게 됐는데, 하나님께서 북한과 이 민족의 회복을 위해 저를 부르셨다는 소명을 느꼈습니다. 사실 중국에서 사역하다 북송돼 굉장히 많은 어려움을 겪었는데, 그곳에서 더욱 확실히 그 소명을 느꼈습니다. 다들 최소한 수용소행이라 생각했는데 살아서 나오게 됐어요. 그때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이 일을 위해 나를 살리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2001년 다시 탈북해 2002년 신학을 하러 한국에 왔습니다.
사실 한 차례 잡히기 전 선교사님들께서 한국으로 가 신학을 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는데, 그때는 거부했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당장 북한이 무너지고 열릴 것 같았거든요. 소위 신앙심에 불타서(웃음), 신학을 배우고 이럴 새가 없어 보였어요. 그랬는데 북한에 들어가서 보니 북한 상황이 굉장히 어두웠고, 하나님의 때에 회복하려면 더 많이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믿음도 있는 줄 알았는데 현장(북한)에 가 보니 별로 신앙도 없었음을 체험했어요.”
-북송됐을 때 있었던 일이 궁금하다. 어떻게 풀려날 수 있었는지는 더욱 궁금합니다.
“고문보다는, 감방에서 규칙을 어겼다는 명목으로 간수들이 형벌을 가했습니다. 저보다는 옆방 사람들이 고문당하는 걸 계속 목격했었죠. 졸거나 움직이면 갇혀있는 쇠창살에 머리를 대라고 해서 때리거나 배식구에 다리를 내밀라 하고는 밟고, 발목에 걸고 비틀면 엄청나게 고통스러운 북한식 족쇄를 찼습니다. 다리 굽혔다 펴기나 팔굽혀펴기 몇백 회 등 정말 곤욕스러운 기합들을 일상적으로 진행했어요.
사실 보위부 사람들도 신앙은 바꿀 수 없다는 걸 알아요. 그래서 ‘다시는 예수 믿지 마라’ 이런 말 대신, ‘너희는 죽어야 바뀐다’고들 합니다. 취조받기 전 ‘오늘도 취조 잘 이기게 해 주시고 조사관의 마음을 바꿔 주시고…’ 하면서 매일 기도했는데, 취조관들이 그걸 보면 ‘이제 기도 끝났어? 무슨 기도 했는지 맞춰볼까?’ 하고는 제가 속으로 한 기도를 그대로 말하더라고요. 섬뜩했어요. 그만큼 노련합니다. 북한에서는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 자체가 반역행위이기 때문에 모두가 저에게 사형감이라고 했고, 어떤 취조관은 ‘내가 나서서 널 죽이겠다’고까지 말했습니다.
취조관들이 중국에서 있었던 일들을 일 단위로 쪼개서 쓰게 합니다. 2백장 가까이 쓴 것 같은데, 너무 쓰다 보니 손에 굳은살이 배길 정도였어요. 그런데 제가 중국에서 한 일이라곤 성경공부나 성경통독 뿐이어서, 구체적으로 쓰라니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다 써야 했어요. ‘이걸 보고 저들이 혹시 하나님을 믿게 된다면…’ 이런 기도도 했죠. 그렇게 한 달 반이 지나니 몸에 힘이 다 빠지고 여위어갔습니다. 하루종일 쓰면서 기도만 한 것 같아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죽지 않는다’는 마음을 주셨어요. 이런 고난도 하나님의 때에 저를 사용하기 위해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강제노동 6개월형을 받고 나왔는데, 모두들 기적이라고 했어요.
한 달간 몸을 추스르고 나니 다시 나가야겠다는 생각 뿐이었습니다. 부모님은 반 년만 있다가 가라고 하셨지만, 예배가 너무 갈급했어요. 하나님께서 목적이 있으셔서 살리셨는데, 언제 다시 잡힐지 모르는 이곳에 더 있으면 안 되겠더라고요. 그렇게 다시 두만강을 건넜는데, 이제는 두렵지 않았습니다. 다시 잡힐 거라면 살리지도 않으셨으리라고 믿었어요. 다시 나왔더니, 죽어야 했을 사람이 살아왔다며 스파이라는 오해도 많이 받았습니다(웃음). 물론 불효한 부분은 너무나 마음이 아픕니다. 어머니는 제가 한국 온 뒤에, 아버지는 몇 년 전에 돌아가셨거든요.”
-하나님을 전혀 모르고 살다가 신학을 시작했는데, 이해하기 힘든 부분은 없었나요.
“사실 중국에서 처음 성경공부를 할 때는 다 믿기질 않았습니다. 특히 구약에 나오는 기적 같은 것들은 도무지 믿기질 않았죠. 4-5개월간 밥 먹고 성경 읽고 예배드리고를 반복했는데, 어느 때인가 성령님께서 만지셨는지 갑자기 모든 것이 그대로 믿게 됐어요. ‘다른 건 다 믿어도, 이런 부분들은 믿지 못하겠다’던 것들도 믿을 수 있게 되기 시작했죠. 한국 들어와서 신학 공부를 할 때도 그러한 경험이 큰 영향을 줬습니다. 오히려 신학교에서 ‘성경에 오류가 있다’는 등 많은 학설들은 믿지 못하겠더라고요. 저는 성경무오설을 믿습니다.”
-그러한 경험들이 탈북민 목회에 어떤 영향을 끼쳤나요.
“우리 교회 성도들 중 절반 정도가 탈북민입니다. 한국의 탈북민 사역에 있어 보편적 방법 중 하나가 ‘물질적 접근’인데, 저는 여기에 별로 동의하지 않아요. 바른 신앙을 갖게 하는 데는 걸림돌이 됩니다. 그런 잘못된 접근 때문에 탈북민들이 바른 신앙을 갖지 못하고 오락가락하고 있어 안타까워요.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는건 아니지만, 탈북민들을 북한의 문이 열릴 때 회복시킬 사명자들로 준비시키는 데 관심을 더 쏟아야 한다고 봅니다. 상황별로 올바로 준비를 시켜야지, 일방적으로 모든 것을 지원하는 태도는 문제가 있습니다.
새희망샛별교회의 예배 모습. ‘샛별’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계 22:16)하고, ‘새희망’은 통일을 준비하면서 하나가 될 우리 민족의 희망을 뜻한다. 여기에 ‘사탄’에게 도용당했던 ‘광명성(샛별)’이라는 이름처럼 북한도 ‘인간 우상’에게 도용당한 하나님의 이름을 되찾아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선포하고 싶다는 의미도 담겨 있다고 한다. ⓒ이대웅 기자 |
탈북민 사역을 하면서, 단지 물질로 교회에 데려와서 마음을 사고 변하는 건 아니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탈북민들을 변화시키는 것도 결국은 ‘온전한 복음’밖에 없습니다. 우리 교회 탈북 청년들만 봐도, 지원을 하지 않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를 다니면서 십일조도 하고 여러 헌금도 하고 있습니다. 그게 신앙의 유일한 기준은 아니지만, 헌금에 대해 일체 얘기한 적도 강조한 적도 없지만 바른 신앙을 갖게 되더라고요. 오히려 물질적으로 힘든 대학생들이 헌금을 하는 모습을 봅니다.”
-그렇다면, 한국교회가 탈북민 선교에 있어 무엇을 도와야겠습니까.
“사랑과 진심이 답입니다. 탈북민들이 굉장히 눈치가 빨라요. 진심이냐 아니냐를 다 알고 있습니다. 진정성 있게 하면 돈보다 큰 효과를 낼 수 있습니다. 탈북민 돕는 걸 반대하는 게 아니라, 진심을 보여주면서 어려움을 겪고 있으면 함께 돕고 이런 부분들이 오히려 더 큰 효과가 있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돈으로 조정하려 하면 진정한 감사도 없어지고 상황에 따라 굉장히 자존심이 상하기도 합니다. 어려운 삶 때문에 탈북민들이 물질을 좇아가는 것도 사실이지만, 자존심은 있어요. 어느 정도 의식이 바뀌면 이런 부분을 수치스럽게 생각합니다.
이런 부분들에서 한국교회가 좀더 연구하고 신중히 할 필요는 있습니다. 장학금 주는 게 나쁘다는 말이 아니라,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 라는 마음으로 감사하면서 바른 신앙을 세울 방법을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거에요. ‘장학금 준다’고 소문 내서 사람들을 모으기보다, 믿음 안에서 몸부림치는 탈북민들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정말 생활비가 없어서 어려워하는 이들을 소리없이 도와주는 건 어떨까요? 사랑하면 다 보이잖아요. 자랑하지 않고, 가족처럼 소리없이 주는 것이 진정한 도움이 아닌가 합니다. ‘어느 교회 나간다’ 하면 사람들이 ‘장학금 때문에 나가는구나’ 하고 다 판단하고 있습니다.”
-통일을 준비하는 교회가 되겠다고 하셨는데요.
“‘또 하나의 교회’를 세우기보다, 진짜 통일을 준비하는 교회를 세우는 게 설립의 목적이었습니다. 북한의 때가 가까왔기 때문에 빨리 준비해야 한다는 마음을 많이 주십니다. 아직 탈북민들이 남한 사회에 제대로 정착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나마 교회에서 하나가 되는 모습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통일 후에 북한과 남한 사람들이 따로 예배드려서는 안 되지 않겠습니까? 저는 ‘사람의 통일’이 진정한 통일이라 생각합니다.
한국교회도 북한선교를 ‘특수사역’처럼 여기는데, 이런 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실까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공동체도 다르고, 예배도 따로 드리고 있잖아요. 하나님께서 ‘하나 되라’고 하신 건, 이런 점들을 하나가 되라시는 게 아닐까요. 그래서 저희가 이런 부분들의 ‘모델 교회’를 세우려 합니다. 이러한 교회들 1천곳을 세우는 것이 비전입니다. 교회는 작지만, 사람을 준비하는 사명자들을 준비시키는 게 목적입니다. 이를 위해 한국교회가 동참해 주시고 동역자가 되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는 탈북민들 뿐 아니라 한국교회도 함께 준비해야 할 일입니다. 남한 사람들이 뒤에서 응원하고 기도만 할 것이 아니라, 함께 가야죠. 저희들에게도 아직 동역자들이 너무 적습니다. 우선 개척교회에는 관심도 없고 함께 하려고도 하지 않고…. 저희 교회가 처음 반주자가 없어 여러 분들에게 부탁해 봤는데, 그때 ‘이 사역에 참 관심이 없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힘든 일이라 동참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요. 결국 능숙하진 못하지만 저희가 기도하면서 하자고 결정하고, 한 집사님이 하다 보니 실력도 늘고 그렇게 했습니다.
북한에 세워질 교회는 정말 ‘초대교회’처럼 지어져야 합니다. 오랫동안 공허하고 눌려 있던 자들과 함께 울고 웃을 수 있는 교회들이 세워져야 합니다. 화려하진 않지만 함께할 수 있는 교회들이 북한 지역에서 시작되고 세워져야 순수성을 오래 지켜갈 수 있지 않을까요. 그래야 하나님께서도 통일된 한국교회를 열방을 위해 사용할 것입니다. 너무 잘 짜여지고 화려한 예배나 교회가 들어가면 북한 교회도 금방 세속화되고 타락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습니다. 주제넘은 소리인지 모르지만, 우리가 그때 그런 교회들을 들어오지 못하게 막자는 얘기들도 나눕니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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