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하이데거(Martin Heidegger)가 인간을 가리켜 ‘죽음에 이르는 존재’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죽음이 자기 실존의 한계임을 자각하는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지간해서 죽음을 생각하려 하지 않습니다. 두렵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죽습니다.

몇 일 전에 장례식에 다녀왔습니다. 목사로 장례식장에 자주 가는 것이 일상입니다만 이번 걸음은 의미가 더했습니다.

예식 중에 추모사를 하시던 분이 “지난주에도 만났는데 같이 하기로 한 일들이 많은데 이렇게 가시다니요”라고 추모하며 눈물을 흘리시는 모습은 보며, 죽음은 언제인지 예고 없이 찾아올 수 있기에 인생 함부로 살 수 없는 것이구나 생각해 봅니다. 고인을 추모하던 한 분이 이런 말을 더 했습니다. “고인은 평소에도 물질에 대하여 자기 것이란 생각 없이 잘 베풀며 어려운 이웃들을 섬기며 사셨노라”고 말입니다. “어차피 죽어 가져갈 수 없는 재물이니 이 땅 위에 사는 동안 좋은 일에 써야 한다”고 말하며 사셨다고 합니다.

고인이 ‘기독도’였기에 입버릇처럼 하신 이야기였을까요? 평소 그리 사신 인생 모습이었을까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만 분명한 것 한 가지는 고인은 ‘인생의 바른 기준’을 가지고 사셨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수많은 곳에 인생을 ‘종’과 ‘청지기’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꼭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라 할지라도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해보면 이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신에게 지식과 지혜가 있습니까? 재능이나 시간이 있습니까? 건강과 재물이 있습니까? 자식이 있습니까? 그 양과 만족감이야 생각에 따라 다르겠습니다. 그런데 지금 가지고 누리는 모든 것이 당신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죄송하지만 당신 것이 아님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수고하고 내가 고생해서 모은 것이니 내 것이라 생각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수고와 고생들이 당신의 감당 영역을 넓힌 것에 불과 한 것입니다. 그 증거가 바로 ‘죽음’입니다.

어떤 죽음도 자신이 세상에서 누리던 것을 가져간 경우를 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이 땅 위에 사는 동안 절대자이신 하나님께서 잠시 맡겨두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정말 지혜로운 인생은 이 비밀을 빨리 깨닫는 인생입니다.

성경 누가복음12장에는 인생을 가리켜 ‘주인이 출타하며, 모든 것을 맡긴 청지기와 같다’고 가르쳐 주십니다. 이것을 잘 깨달아 주인이 돌아오는 그날까지 진실하게 살아간 청지기는 그 후 칭찬과 함께 더 많은 주인의 것들을 얻어 누리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위치를 알지 못하고 주인의 것으로 제 것 인양 ‘호가호위(狐假虎威)’하는 자는 돌아온 후에 아주 비참한 말로는 경험하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성경에 원어로 보니 아주 혹독합니다. ‘엄히 때리다’로 표현되어 있으나 실상은 ‘디코토메세이’, 토막을 내고 자르다. 아주 참혹하게 처형을 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 청지기입니다. 문제는 주인이 언제 오실지 알지 못한 채 너무 많은 것을 맡은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 코에 생기 있는 동안에 주인 오신다면 결산하겠거니와 그렇지 않다고 할지라도 우린 모두 죽음이라는 문을 통과해 여전히 우리 인생에 모든 것을 맡기신 주인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잘 삽시다. 청지기답게, 맡기신 주인의 원하는 모습으로 말입니다. 아직도 이 깊은 진리를 깨닫지 못한 분이 있다면 먼저 가까운 장례식에 참여해 보시길 바랍니다. 좀더 가까이 계신 주인의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kisu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