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새벽, 교회를 오려고 집을 나서기위해 문을 여는 순간, 사방이 너무 환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밤사이에 눈이 온 것입니다. 지금이 4월인데, 온 사방이 봄꽃이 피어나고, 잔디가 파릇하고 따스한 봄날인데 눈이 온 것입니다. 하룻밤 사이에 사방은 밤새 온 눈으로 하얗게 덮인 것이 한 겨울날의 풍경 그대로였습니다. 마치 시간을 뒤로 물린 듯 눈 내린 겨울날의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물론 우리가 사는 워싱톤의 봄날에 눈이 온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고, 10년 전쯤인가 에도 3월 중순에 함박눈이 아주 많이 내려서 사방이 온통 눈에 잠긴 적이 있기는 했지만, 4월에 눈이 내린 것은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워싱톤으로 오기 전 위스칸신주에 살던 때, 어느 해인가 5월 중순에 하룻밤사이에 5인치가 넘는 눈이 왔던 것은 기억이 나는데, 그건 위스칸신주이고, 여기 워싱톤의 봄날, 그것도 4월에 눈이 내린 것은 그리 흔한 일은 아닙니다.

어제 라디오에서 밤에 눈발이 좀 날릴 거라는 예보가 있기는 했지만 눈이 와도 그야말로 그냥 좀 날리고 말거라고 생각을 했지, 이렇게 사방을 온통 하얗게 덮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물론 간밤에 내린 눈의 량이 1인치도 채 되지 않아 그리 많은 눈이 온 것은 아니지만 온 사방을 하얗게 덮기에는 충분하고, 더구나 봄철의 푸르름에 이제 막 익숙해져가는 우리네 눈에는 한겨울에 수북이 내린 눈처럼 보였습니다.

잔디마다, 나뭇가지마다 그리고 지붕마다 하얗게 쌓인 눈으로 세상은 영락없는 한겨울의 설경이라서 눈을 좋아하는 저에게는 더없이 아름다운 모습이기는 하지만 한편으론 이제 막 봄이 되어 피어난 꽃이며 잔디가 철 아니게 갑자기 내린 눈으로 인해 얼어 버릴 것을 생각하니 마구 좋아할 기분이 아니라, 오히려 슬며시 걱정이 되었습니다.

나뭇가지에서 아름다운 자태를 한창 뽐내며 온 세상이 자기로 인해 아름다워 진 듯이 피어난 꽃들이 갑자기 내린 눈으로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덮여버려서 덮인 눈 때문에 꽃이 피기는 했는지 조차 분간하기 어렵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얼핏 보기에는 피었던 꽃들이 모두 다 덮인 눈으로 인해 얼어버린 듯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침 해가 떠오르고 햇살이 비취기 시작한지 얼마가 지나자 하얀 눈으로 덮여 있던 잔디가 다시 파란 모습을 드러내더니 언제 눈에 덮여 있었느냐는 듯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푸르른 모습으로 하늘을 향해 곳곳하게 잎을 세우며 서있는 것이었습니다. 수북이 쌓인 눈들로 인해 꽃이 피었는지 조차 알수 없었던 나무 가지에도 비취는 햇살로 인해 쌓인 눈이 녹아 버리자 눈 속에 덮여서 아예 얼어버린 듯이 보였던 꽃잎들이 다시 그 아름다운 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어제 오후, 몇 차례 눈발이 날리고 날씨도 하루 종일 제법 쌀쌀했지만 나뭇가지에 피어난 꽃들이나 파랗게 돋아난 푸른 잎사귀들은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불어 날리는 눈발에도 끄덕하지 않고 여느 봄날의 모습처럼 그렇게 자기들의 모습대로 있는데, 그런 꽃과 잎새들의 모습이 살기 위해 추위에 떨며 움츠리며 버티는 측은한 모습으로 보이지 않고, 이정도 추위쯤이야. 이만한 눈쯤이야 하면서 갑자기 닥친 추위를 우습게 여기며, 때아니게 내린 눈을 하찮게 여기며 당당하게 서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봄날에 핀 꽃들은 봄날에 내린 눈을 두려워하지 않아 보였습니다. 아무리 눈이 내려도 이미 겨울은 지나고 봄이 왔는데 제아무리 눈이 온들 어쪄겠냐는듯이 그렇게 보였습니다. 물론 그렇게 보인 것은 한밤에 내린 눈과 새벽부터 아침까지 눈이 덮여있는 꽃과 잎새를 본 저만의 개인적인, 그러니까 아주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리 제 개인적인 생각이라 할지라도 제게는 좋은 가르침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아무리 눈이 내리고 바람이 차가워도 이미 겨울은 지나고 봄이 왔기에 갑자기 내린 눈으로 잠시 덮여 있다가도 금새 제 모습을 드러내는 봄날의 꽃들을 통해 우리네 삶에 갑자기 눈바람이 몰아친다 해도 이미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 새로운 시간에 살아가기에 두려워하지 말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오늘은 부활의 날입니다. 새로운 시간입니다. 죽음의 날이 지나고 생명의 날입니다. 이제부터 살아갈 날은 봄입니다. 생명입니다. 새로운 시간입니다. 봄날에 핀 꽃들이 봄날에 내린 눈 때문에 움츠려들지 않는 것처럼, 부활의 날, 새로운 생명을 살아가는 우리도 그리 살아야 할 것입니다. 봄날에 핀 꽃은 봄날에 내린 눈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글 이승우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