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부터 필리핀에서 어린이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김형석 선교사는 마닐라에서 북쪽으로 4시간 거리에 위치한 제네럴 티니 오에서 둥지 고아원과 교회를 섬기며 사랑의 집 짓기를 통한 '예수마을 공동체'를 일구고 있다.
인생의 방향을 하나님께로 정하고 신학을 시작한 후 한국 교회에 교회학교 전문인 사역자가 부족함을 느끼면서 '어린이 전문 사역자로 섬기고 싶다'고 기도했다. 30세에 목사 안수를 받고 한국의 두 교회에서 사역을 하다가 본격적으로 어린이 사역에 뛰어든 건 2002년 필리핀을 방문하면서부터다.
당시 필리핀에는 약 1천5백 명 이상의 한국인 선교사들이 많게는 40개에서 50개까지 현지인 교회를 개척해 사역하고 있었지만 이상하리만큼 교회학교에는 어린이들이 많지 않았다. 김형석 선교사는 이점에 착안해 새롭게 교회를 건축하거나 개척하기보다는 이미 개척된 교회에서 교회 학교 부흥운동을 일으키기로 사역 방향을 정했다.
신학교 시절, 어린이 사역에 유독 관심이 많아 배워두었던 인형극, 레크레이션 지도자, 노래와 율동 세미나, 풍선 아트 등은 필리핀 선교에 매우 큰 도움이 됐다. 인형 몇 개만 들고나가도 300명에서 900여 명의 아이들이 몰릴 만큼 필리핀 아이들은 열광했다.
선교사들과 팀 사역을 10년 동안 하면서 한 교회에서 6개월에서 1년 동안 어린이들을 전도하고 교회를 훈련하는 기간을 가지면서 16개 현지인 교회의 주일학교 부흥을 위해 노력했다.
둥지 고아원의 시작 "매일 성탄절이면 좋겠어요"
그가 교회학교 사역과 더불어 진행하는 둥지 고아원은 당초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필리핀에서 사역을 시작한 지 2년째 되는 12월, 미국 선교사로부터 인형극 공연 요청으로 찾은 교회에는 50여 명의 집 없는 아이들이 성탄 축하잔치에 초청받아, 게임과 찬양, 성경공부, 재미있는 인형극 등으로 즐거운 하루를 보냈다. 그러다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자 집이 없던 아이들 가운데 한 명이 "매일 이런 곳에서 살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김 선교사의 마음을 울렸다.
선교사들은 "내년 성탄절에 다시 초청하겠다"는 말로 위로했지만, 아이들은 "매일 성탄절이면 좋겠다"며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그날 집으로 돌아온 김형석 선교사는 그 아이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지 생각하며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어린이 사역을 하겠다고 이곳 필리핀까지 왔지만 집도 없는 고아와 같이 버려진 아이를 외면하고 돌아온 제 모습은 누가복음 10장의 강도 만난 사람을 외면한 제사장과 바리새인의 모습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김 선교사는 그날 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아이들을 외면했던 저를 용서해달라고, 부모의 돌봄을 받지 못하고 길에서 헤매는 어린이들을 돌볼 수 있도록 고아원 사역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렇게 10년의 과정을 거쳐 2012년 둥지 고아원을 짓고 아이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고아원 이름은 어린 새가 둥지에서 어미 새의 돌봄 속에 자라다 창공을 향해 날아가듯, 아이들이 기도와 사랑의 양식으로 성장하고,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꿈을 갖고 날아오르길 소망하는 마음으로 지었다.
가장 어려웠던 순간, 아내와 사별
한국 사람이 아무도 없는 시골 마을에서 순간마다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고아원 건축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그렇게 순조롭게 건축을 마치고 들뜬 마음으로 개원을 준비할 때 즈음 김 선교사의 아내가 뇌출혈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함께 동고동락하며 준비해온 고아원 건축을 앞두고 갑작스러운 이별이었기에 충격은 더했다. 아내의 빈자리는 예상보다 훨씬 컸지만 고아원 사역을 그만둘 수는 없었다. 아픔과 고통이 찾아올 때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지시고 돌아가신 예수님을 기억했다. 그렇게 희생과 은혜의 터 위에 생명의 역사를 이어갈 고아원은 개원할 수 있었다.
위기는 기회, 사역의 발전 가져와
고아원 사역은 예상보다 훨씬 어려웠다. 부모 없이 거칠고 열악한 생활을 이어오던 아이들은 싸움이 잦았고 지갑에 손을 대기도 했다. 어떤 아이들은 아이들에게 매일 일정 금액의 돈을 가져올 것을 요구했고 학업도 낙제 수준이 대부분이었다. 넘어야 할 산이 많았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붙드는 기도가 없이는 견디기 어려웠다.
더욱이 성장기 어린이들은 식사 시간외에도 늘 배가 고파했다. 특히 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아이들에게 식사 시간을 기다리는 것은 고문과도 같았다. 간식을 원했던 아이들은 냉장고를 텅텅 비우기 일쑤였다. 그렇다고 아이들이 냉장고 음식을 먹지 못하도록 자물쇠로 냉장고를 잠글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김 선교사는 '한민족 고구마 나눔 운동본부'를 통해 고구마 종순을 한 박스 기증받아 고아원 주변 밭에 심었다. 고구마는 단순히 학생들의 간식과 배부름을 넘어 노동의 기쁨과 감사를 체험할 수 있게 했다.
어려움의 시간들도 이제는 추억처럼 말할 수 있을 만큼 아이들이 변화됐다. 매일 저녁 8시에 드리는 예배시간, 아이들은 하나님 앞에 정직한 삶을 살겠다고 다짐한다. 열심히 공부하면 대학에 진학할 수 있다는 소망도 생겼다.
쓰레기 더미를 뒤져 오늘 한 끼를 찾는 것이 전부였던 아이들이 이제는 대학에 진학해 선생님, 경찰관, 디자이너를 꿈꾸고 선교사가 돼, 복음 전파의 소망을 기도하는 아이들도 생겨났다. 필리핀 변두리를 방황하던 고아들이 눈을 열어 하나님 나라를 꿈꾸며 필리핀과 세계를 바라보는 시야를 갖게 됐다.
"농구 유니폼 때문에 교회 왔지만, 이제는 하나님 때문에 오겠습니다"
선교지에서 겪는 어려움을 이겨나갈 수 있는 이유는 농부가 수확의 기쁨을 바라보며 한 알의 씨앗을 심듯, 선교의 열매를 거두는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김 선교사도 이런 기쁨과 보람을 맛보며 선교에 힘쓸 수 있었다.
"학생 농구팀을 운영하면서 교회에 출석하는 이들에게 농구 유니폼을 만들어주었는데요. 일 년 후쯤 한 학생이 솔직한 마음을 밝히더라고요 '선교사님 지금까지는 이 농구 유니폼 때문에 교회에 나왔지만 이제는 이 옷을 주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께 나오겠습니다'라고요. 몇 년 후 그는 신학대학에 입학해 목회자가 되어 찾아왔어요. 그때 누리는 선교의 기쁨은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었습니다."
"사랑의 집짓기"로 예수 마을 공동체 꿈꿔
내 집 마련의 꿈은 전 세계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가정을 이루면 가지는 꿈 가운데 하나다. 하루하루 막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필리핀 빈민들에게도 내 집 마련은 간절한 소원이다. 김형석 선교사는 이들을 위해 교인 가정을 통해 교회 주변 4만 스퀘어피트의 땅을 기증받아 40채의 집을 지어 예수 마을 공동체를 만들었다.
300 스퀘어피트의 아담한 집은 시멘트와 벽돌, 나무, 철근 모래, 지붕 재료 등 약 1천 달러의 예산이 필요했고, 포항 늘사랑교회가 중심이 되어 한국 교회와 성도 가정들의 후원으로 꿈의 집이 완성됐다. 집이 필요한 40 가정을 선별하되 20가구는 교인 가정에서 나머지 20 가정은 믿지 않는 가정에게 전달하며 전도의 기회로 삼았다. 내년에는 두 번째 프로젝트로 최종호 장로가 기증한 1만 8백 스퀘어피트 땅에 30가구를 지어 지역 주민을 섬기며 전도의 기회로 삼고자 기도하고 있다.
김형석 선교사는 "둥지 고아원 어린이들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바르게 성장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나눌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길 바란다. 둥지 고아원을 위한 기도의 동역자들이 많아져서 재정적 어려움 없이 어린이들이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양육되길 바란다"고 기도제목을 전했다.
필리핀 둥지 고아원을 후원하길 원하는 개인이나 교회는 주님의 빛 교회 주혁로 목사 562) 896-9191으로 문의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