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20독, 신약 100독 등 말씀에 파묻혀
1906년 새벽 4시마다 기도, 한국교회 정착
김익두·이용도 목사와 부흥운동에 앞장서
토마스 선교사 순교 3년 후 태어난 길선주
하나님께서 순교의 피 통해 부흥 주셨을 것
'천국 소망' 치우쳐 현세 외면? 잘못된 비판
김명혁 목사(한복협 명예회장, 강변교회 원로)가 '길선주 목사님의 회개의 기도와 부흥과 재림의 영성을 염원하며'라는 주제로 교회사 학자 이상규 박사(고신대 명예교수)와 25일 오전 서울 도곡동 강변교회(담임 이수환 목사)에서 대담을 펼쳤다.
먼저 두 사람은 길선주 목사의 영성과 신앙에 대해 발표했다. 이상규 교수는 "길선주 목사님은 한국교회가 낳은 위대한 부흥사이자 민족 지도자였다. 1869년 태어나 올해가 출생 150년째"라며 "선도와 불교 등 여러 종교를 섭렵하다, 기독교 복음만이 참된 삶과 진리가 있음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그래서 김명혁 목사님은 길선주 목사님을 '한국의 어거스틴'이라고 표현하셨다"며 "당시 기독교로 개종하는 사람들은 두 가지 부류였다. 순수하게 종교적으로 받아들인 경우, 민족운동과 독립운동 차원에서 선택하는 경우였다. 길 목사님은 철저하게 전자에 해당한다"고 소개했다.
그는 "길선주 목사님은 성경 말씀과 기도, 그리고 부흥 등 3가지 키워드로 소개할 수 있다. 먼저 성경에 대해 보면, 신구약 20독과 신약 100독, 요한계시록을 1만독 할 정도로 성경에 천착했다"며 "요한계시록은 암송하셨을 것이다. 집회를 인도하면서도 성경을 찾아서 읽지 않고 다 외워 설교하신다는 말도 있었다"고 전했다.
이상규 교수는 "기도의 경우 오전 9시와 밤 10시마다 기도하셨고, 철야기도도 드리는 등 하루 1-2시간은 기도하는 '기도의 사람'이었다"며 "길 목사님이 1906년 가을부터 시작한 새벽기도는 한국교회만의 독특함을 상징한다"고 했다.
▲이상규 박사가 이야기하고 있다. ⓒ이대웅 기자 |
이 교수는 "길선주 목사님은 무엇보다 한국교회 부흥에 큰 역할을 하셨다. 1920년대 김익두, 1930년대 이용도 목사와 함께 부흥을 주도했다"며 "1907년 평양대부흥도 장대현교회 담임목사였던 길선주 목사님이 1월 14일 밤 회중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면서 시작됐다. 이후 부흥의 물결이 전국으로 퍼졌다"고 강조했다.
또 "1920년대 500여곳에서 집회를 하셨다. 1905-35년 30년간 설교 횟수가 1만 7천회에 달한다. 부흥사로 잘 알려진 조지 휫필드가 1만 8천번 설교했다는데, 그에 맞먹는 횟수"라며 "이동 거리만 해도 8만km에 달했다. 지구 둘레가 4만km이니, 지구를 두 바퀴 돌 정도의 강행군이었다"고 했다.
그는 "길선주 목사님은 아주 보수적인 신앙과 신학을 견지했다. 박형룡 박사님의 그의 정신적 제자로 불릴 정도"라며 "그러나 형식에 구애받지 않았다. 예배음악에 우리 고유의 멜로디를 넣었고, 한국식 건물을 교회로 사용했으며, 남녀 구분 좌석도 철폐했다"고 했다.
이상규 교수는 "위대한 교회 지도자인 동시에 민족운동가였다. 한일합방 후 태극기를 강단 다락에 숨겨놓고 언젠가 자유롭게 게양할 날을 기다렸다. 독립협회 평양지부 설립 시에도 안창호와 함께 강연했다"며 "1911년 소위 '105인 사건'에 연루돼 장남이 고문으로 죽었다. 이후 더욱 조국의 독립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고, 1919년 3·1 독립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참여했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이런 점들을 통틀어 보면 길선주 목사님은 위대한 부흥사이자 목회자였고, 민족을 위해 앞장섰던 분이기도 했다"며 "한국교회에 큰 영향을 끼쳤고, 한국교회의 초석을 다지신 분이라고 할 수 있다"고 정리했다.
김명혁 목사는 "1866년 신미양요 당시 토마스 선교사님의 순교가 있었기에 길선주 목사님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토마스 선교사 순교 3년 후에 길선주 목사님이 태어나셨다"며 "그 순교의 피를 보시고, 하나님께서 이 땅에 부흥을 주신 것이 아닌가 한다"고 말했다.
▲김명혁 목사가 이야기하고 있다. ⓒ이대웅 기자 |
김 목사는 "길선주 목사님은 이전에 반기독교적인 삶을 살고 여러 종교를 거쳤다. 그러나 마음에 만족함이 없었고, 끊임없이 진리를 추구했다. 이 점에서 어거스틴과 비슷하다"며 "이런 분들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귀한지 모른다. 우리는 이러한 믿음의 선배들의 발자취를 뒤따라야 한다"고 했다.
그는 "길선주 목사님은 사경회 때마다 찬송을 부르면서 '회개'와 '천국 소망'의 메시지를 전하셨다. 사도 요한처럼 하늘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면서, '천국 소망'으로 가볍고 청빈하게 사셨다"며 "길선주 목사님은 사경회에서 '종말'과 '재림 신앙'을 통해, 고난받던 이 땅의 백성들에게 '천국 소망'을 심었다"고 설명했다.
김명혁 목사는 "어떤 무식한 학자는 길선주 목사님이 '천국 소망'에 치우치다 현세적 삶의 중요성을 부인하는 잘못을 범했다고 비판했는데, 이는 정신 나간 잘못된 비판이라 생각한다"며 "길선주 목사님께서는 3·1 운동에 적극 참여하시면서 33인 중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신 분"이라고 반박했다.
또 "물론 길선주 목사님도 죄인이지만, 너무 귀한 신앙을 지니고 한국교회를 살린 분이다. 평양을 '한국의 예루살렘'으로 만드는데 큰 역할을 하셨다"며 "우리는 길선주 목사님을 비롯해 이기풍·최권능·주기철·손양원·한경직·방지일 목사님까지, 믿음의 선배님들의 발자취를 뒤따라야 한다"고 했다.
김 목사는 "길선주 목사님은 '회개 기도와 부흥과 재림과 청빈 신앙'을 몸에 지니고 수고롭게 사시다 천국으로 옮겨가셨다"며 "또 우리 민족을 어두움과 절망 속에서 건지고 빛과 생명을 받게 하셨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한국교회의 아버지 길선주 목사님께 무한한 감사와 존경과 사랑을 드리고 또 드린다"며 "부족하고 또 부족한 우리들도 길선주 목사님께서 지녔던 철저한 '회개 기도와 부흥과 재림과 청빈 신앙을 조금, 아주 조금이라도 몸에 지니고 살다 죽게 되기를 바라고 소원한다"고 역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