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만난 후 두문불출하고 기도와 성경 전력

1907년 사경회서 회개기도로 평양대부흥 촉발

복음 전파와 민족 복음화에 남은 생애 불살라

김명혁 목사는 이날 발표문을 통해 길선주 목사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다. 그는 "길선주 목사님은 한국교회를 태동케 한 1907년 '회개와 부흥 운동'의 주역이었다"며 "29세 때 예수님을 믿은 다음부터 40여년 동안 380만여명에게 복음을 전했고, 3천여명에게 세례를 베풀었으며, 8백여명을 목사와 전도사와 장로로 세웠고, 60여곳의 교회를 세운, 한국교회의 아버지"라고 평가했다.

1869년 3월 15일 평안남도 안주에서 태어난 길선주 목사는 19살 때부터 산속에 들어가 도를 닦기 시작했다. 그는 "절에 가서 1주일 동안 밤낮으로 주문을 외우자, 영이 내려 온 몸이 떨리고 기력이 살아나기 시작했다고 한다"며 "21살부터는 깊은 산속에 들어가서 밤낮으로 옥경의 구령삼정 주문을 외웠고, 21일, 49일, 100일씩 기도하며 주문을 외웠다. 결국 선도의 영험과 신통력을 얻게 됐다"고 소개했다.

김 목사는 "차력에 성공하고 선도에 통달한 길선주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자, 평양 시내에 그가 나타나면 '길 도사'로 부르며 수군거릴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아직 영생의 진리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느끼며 계속 수도에 힘을 다했다"며 "저는 여기서 길선주를 어거스틴과 비교해 보게 된다"고 전했다.

그에 따르면, 어거스틴도 젊은 시절에 나름대로 진리를 추구했다. 19세 때 <호르텐시우스>라는 철학 책을 읽으면서 세상이 모두 무가치해 보였고,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가슴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했다. 다음에는 마니교와 신플라톤주의에 빠졌지만, 영생의 진리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한다. 김 목사는 "길선주도 마찬가지였다"며 "도는 터득했지만, 아직 영생의 진리를 발견하지 못해 계속 수도에 힘을 다했다"고 했다.

진리를 찾던 길선주 목사는 결국 '예수'를 만난다. 김 목사는 "당시 평양 시내에 이상한 소문이 퍼졌다. 괴상한 서양 사람이 나타나 종교를 전하는데, 한 번 빠지면 혼이 뽑혀 미치고 만다는 소문"이라며 "길선주는 호기심이 동해 마펫 선교사를 찾아가 담론을 나눴고, 결국 자신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설명했다.

김명혁 목사는 "예수님을 만난 길선주는 두문불출하고 기도와 성경에 전력했다. 그는 성령으로 충만해 예수와 만나고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에 도취됐다"며 "많은 사람들이 그를 조롱했지만, 만나는 사람마다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했다. 결국 목사가 되고 두 아들도 목사가 됐는데, 두 아들 중 한 명은 저희 아버지와 평양에서 목회하다 함께 순교했다"고 전했다.

길선주는 1898년 30세 때 평양 널다리 교회의 '영수'가 됐고, 널다리 교회는 이듬해 장대현으로 옮겨 1900년 2천명 수용 가능한 예배당을 건축했다. 33세 때인 1901년 장대현교회 장로로 장립됐고, 1902년 조사(전도사)가 돼 목회에 전념했다.

김 목사는 "해박한 성경 지식과 유창한 설교와 기도와 성령으로 충만한 길선주의 목회 사역은 장대현교회의 급속한 성장과 부흥을 가져왔다"며 "조사가 된 후부터는 돈과 부에 대한 관심을 모두 버리고, 평생 '청빈'의 생활을 했다. 많은 핍박과 탄압에도 더욱 기도에 파묻혔고, 1903년 평양 신학교에 입학했다"고 했다.

영화 로마서 8:37
▲길선주 목사와 평양 장대현교회. 평양대부흥운동을 주도한 길선주 목사는 성적 타락의 위기를 단호하게 물리친 일화로도 유명하다.

길선주 조사는 1905년 영국 웨일즈 지방에 부흥 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평양 지역의 부흥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몇몇과 함께 새벽 4시에 일어나 새벽기도회를 시작했고, 그것이 한국교회 새벽기도의 시작이었다.

이후 1906년부터 회개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1906년 황해도 재령에서 길선주 조사가 사경회를 인도하는데, 회개와 부흥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07년 1월 장대현교회에서 사경회가 열렸다. 전국 각처에서 1,500여명의 신자들이 장대현교회에 모여 10일 동안 사경회를 가졌다. 거기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고, '회개와 부흥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김 목사는 당시 상황을 묘사한 글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2천명 이상을 수용하는 장대현 예배당에 회중이 차고 넘치도록 모인 사경회원 전체가 성령의 휩쓸린바 되어 혹은 소리쳐 울고 혹은 가슴쳐 통곡하며 혹은 흐느껴 울면서 기도하고 혹은 발을 구르고 자복하며 혹은 춤을 추면서 찬미하니 소리 소리 합하여 소리의 기둥은 번제단에 타오르는 불기둥 같이 하늘로 떠올랐다('신학지남' 14권 제2호)."

"설교가 끝나고 길 장로의 기도가 시작되자 감동을 받은 회중은 자기들도 모르게 '아이고 아이고' 소리를 지르며 통회 자복했다. 장내는 금새 울음바다가 되었다. 회중들은 온 몸이 불덩어리처럼 달아오르고 많은 병자가 고침을 받았다. 회중은 은혜의 도가니에 묻혀 교회당을 떠나지 않았다. 죄인 잡으러 왔던 순표가 회개하고, 기독교를 비판하려 왔던 중이 개종하고, 신부가 은혜 받고 감격하여 염주를 길 장로에게 기념으로 주기도 했다(최현, '빛을 남긴 믿음의 위인')."

"그는 기도회 도중 갑자기 일어나 큰 소리로 외치기를 '나는 아간과 같은 죄인이올시다' 라고 하면서 지난날 죄를 뉘우치면서 회개했다. 그가 친구 한 사람이 죽으면서 남은 재산을 잘 처리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유산을 정리하기는 했으나, 그 중 1백원은 수고비 조로 인정하여 자기가 소유했다.

길 장로는 기도하기를 '나는 하나님을 속였고 그 친구와 그의 부인을 속인 도둑놈입니다. 내일 아침 일찍이 그 돈을 부인에게 돌려주겠습니다'라고 공중 앞에서 눈물과 함께 자복했다. '나 때문에 온 회중이 은혜를 받지 못하고 있으니 나는 죄인 중의 죄인이올시다'라는 자복기도를 쉬지 않고 계속했다. 회중은 이 때 모두 마루 바닥을 치면서 회개하기를 시작하였다(김광수, '한국기독교 인물사')."

길선주 목사는 1907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한국 최초로 목사 안수를 받은 7인 중 한 사람이 돼, 섬기던 장대현교회 담임목사로 취임했다. 또 총회 전도국장이 되어 6년간 시무했고, 3.1 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독립운동에 앞장서다 2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김 목사는 "길선주 목사님은 옥중에서도 기도와 성경 읽기와 전도에 전념하셨다. 출옥 후 세상을 떠나기까지는 전국을 누비며 사경회를 인도하셨는데, 십자가의 복음 전파와 민족 복음화에 남은 생애를 전부 바치셨다"며 "그러다 1935년 11월 26일 평남 강서군 고창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고 축도를 마친 후 뇌출혈로 쓰러져, 35곳의 집회를 남겨두고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하나님 품으로 옮겨가셨다"고 정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