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목사.
(Photo : ) ▲이경섭 목사.

 

 

상당수 사람들이 칭의와 구원에 대해 오해하는 듯합니다. 특히 '칭의'와 '구원'을 양분하여, 의롭다 함은 받지만 구원은 못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에 대한 논거로 즐겨 들고 나오는 구절 중 하나가 이 말씀입니다.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롬 5:9-10)."

그들은 여기서 '칭의'와 '구원'이 구분지어진 것은 둘 사이에 뭔가 채워져야 할 간격이 있기 때문이며, 그 간격이 채워지지 않을 때 칭의받은 자는 구원에서 탈락될 수 있다는 듯한 주장을 폅니다. 종말론적 구원은 성도가 죽는 날 혹은 그리스도 재림 때 받을 것이기에, 칭의받은 자가 종말에 어떻게 될지는 장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들에겐 로마천주교도들이나 기독교 실존주의자들처럼 구원의 확신이 불가능하며, 의심은 당연시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칭의와 구원을 구분지은 것은, 둘의 본질적 차이를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서정(order Salvation)'상 칭의가 구원의 전제라는 것과, 그리스도의 피는 죄인을 의롭다 해줄 뿐더러, 최종적인 구원까지 능히 보장한다는 피의 영원한 효용성을 강조한 것입니다.

칭의는 법적 선언이고, 구원은 칭의에서 천국 입성까지를 아우른 유기적이고 종합적이고 종말론적 개념을 담지합니다. 동시에 칭의의 법적 효력이 최종적 구원까지 아우르기에, 오히려 구원이 칭의에 빚지고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예정과 삼위 하나님의 유기적이고 종합적인 역사이지만, 협의적으로는 칭의(죄사함)의 결과, 곧 심판에서의 건짐이라고 할 때, 칭의와 구원은 그 무게에서 차이가 없습니다. 바울 사도가 로마서에서 구원의 서정(order Salvation)을 말하면서 '칭의'를 말한 후 구원의 정점인 '영화'로 막바로 진입한 것은(롬 8:30), 칭의와 구원을 동일시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을 처음 믿은 사마리아 문둥병자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눅 17:19)"고 선언하신 것은, 최초의 믿음으로 칭의를 넘어 완전하고도 최종적인 구원에 이른다는 뜻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완전하고 최종적인 칭의(구원)를 받는다는 이신칭의 교리는, '칭의는 다만 현재의 법적인 선언일 뿐 구원이(최종적 칭의가) 아니'라는 칭의유보자들의 주장을 뒤집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칭의'는 법적 사면(赦免)을 받는 것이고, '구원'은 사면을 집행하여 심판에서 벗어나는 것이기에, 둘은 결코 나뉠 수 없습니다. 사면의 선언인 칭의가 있다면, 반드시 사면의 집행인 구원이 따릅니다.

만일 의롭다 함을 받고 구원을 얻지 못한다면, 법적으로 사면을 받아놓고 감옥에 계속 구금돼 있는 것처럼 불법이 됩니다. 방면(放免)하지 않을 것이면 사면을 하지 않듯, 구원하지 않을 것이면 아예 의롭다 하지 않습니다. 칭의만 받고 구원받지 못하는 경우는 결코 없습니다. 따라서 칭의와 구원의 본질적인 차이는 없으며, 구원의 현재 완료적 확신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구원의 전제인 칭의를 제쳐놓고,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는 구원에만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러다 보니 '칭의' 그리고 '칭의와 구원의 관계'에 대한 이해가 결핍되고, 구원의 확신도 갖지 못합니다. 자신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아 하나님과 화목해졌다는 것을 알면, 당연히 자신이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났다는 구원의 확신도 갖습니다. 따라서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이신득구(以信得救)'의 지식 전에,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이신칭의(以信稱義)'의 지식이 먼저 요구됩니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가 유기적이고 종합적이고 종말론적인 '구원' 교리를 제쳐두고 '칭의' 교리에 자신을 올인시킨 이유도, 구원이 칭의에 전적으로 의존돼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옥중 간수가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행 16:30)" 라고 물었을 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고 했습니다. 이를 이신칭의와 결부지어 풀이하면 "주 예수를 믿어 의롭다 함을 입으라 그리하면 구원을 받으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칭의와 구원을 본질상 다른 것으로 주장합니다. 칭의를 받는다고 다 구원받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성화를 둘 사이에 집어넣어 그것을 구원의 조건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주장을 변호하기 위해 곧잘 들고 나오는 내용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유월절 해방, 광야 40년 여정, 가나안 입성입니다. 유월절 애굽 해방은 '칭의'에 해당되고, 광야 40년 여정은 '성화', 가나안 입성은  '구원'에 해당됩니다.

그들은 어린양의 피로 '칭의'를 받았어도, 광야의 '성화'를 일구지 못하면 가나안 입성 곧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 증거로 애굽에서 나온 다수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은 사실을 말합니다. 만일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가나안 입성을 목전에 두고 죽은 모세를 비롯해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원받지 못한 것이 됩니다. 가나안 입성의 불발을 구원실패와 동일시하는 것은 신학적 근거가 없습니다.

물론 개혁주의자들도 출애굽 후 광야 여정을 성화의 상징으로 보지만, 천국  입성의 조건이 아닌, 천국 백성에 걸맞게 하는 담금질(quenching) 과정으로 봅니다. 이는 성도가 고난을 통해 천국에 걸맞는 자가 된다는 성경 가르침과(행 14:22) 일맥상통합니다. 바울 사도가 안디옥에서 제자들에게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행 14:22)'고 한 것은, 환난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자격을 부여한다는 공로주의를 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가 되게 한다는 뜻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에서는 이를 보다 직접적으로 표현됐습니다. "너희의 참는 모든 핍박과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을 인하여...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함이니(살후 4:5-6)." 만일 칭의유보자들의 주장대로, 성화나 환난이 천국 입성의 조건이 된다면, '거듭남(요 3:5, 고전 15:50)'과 '은혜(갈 3:18)'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성경 가르침은 부정돼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받을 하늘나라의 축복이 율법에 의존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약속에 의존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약속을 통해서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그런 축복을 주신 것입니다(갈 3:18, 현대인의 성경)."

비유컨대 기업가들이 자녀들에게 가업을 물러줄 때, 밑바닥 평사원에서부터 혹독한 수련과정을 거치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식은 상속자의 자격과 권리를 갖고 있지만, 가업을 성공적으로 경영하려면 수련 과정이 필수적입니다. 혹독한 수련과정은 상속자의 자격을 획득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상속자답게 되기 위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는 이미 거듭나 천국민의 자격을 가졌지만, 천국민답기 위해 성화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이 둘을 구분하지 못하므로 성경 해석에 난항을 겪습니다. '자격을 갖춘 것(be qualification)'과 '자격에 걸맞게 되는 것(be counted worthy of qualification)'은 전혀 다릅니다. 이신칭의 논쟁의 중심에 서있는 야고보서의 '칭의와 행함' 역시 이 둘의 혼란에서 비롯됐습니다. 행함은 '칭의의 자격'이 아닌, '칭의에 걸맞음'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약 2:14-26).'

'하나님의 아들 됨(갈 3:26)'과 '하나님아들에 걸맞음(마 5:39-45)' 역시 같은 맥락입니다.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마 5:39-45)."

이렇게 하면 하나님 아들의 '자격 획득(be qualification)'을 한다는 뜻이 아닌, 하나님 아들에 '걸맞게 된다(be counted worthy of qualification)'는 뜻입니다. '됨'과 '걸맞음'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한, 영원히 칭의, 성화, 구원의 관계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40일이면 당도할 수 있는 가나안을 40년 이상 뱅뱅 돌아 도달한 것은, 400년간 종살이로 몸에 배인 구습을 떨어내고 가나안 백성에 걸맞게 되려는 수련 과정이었지, 가나안 입성을 위한 자격 시험이 아니었습니다.

또 칭의유보자들이 법적 칭의와 종말론적인 칭의를 분리하기 위해 전가의 보도처럼 들고 나오는 것이 시제(時制)입니다. 그 중  '이미와 아직(already but not yet)'은 그 백미에 해당됩니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실현과 종말론적 실현을 설명하기 위해 게할더스 보스(Geerhardus Vos)가 그의 저서 <바울의 종말론(The Pauline Eschatology)>에서 도입한 것인데, 그들은 현재적 칭의와 종말적 칭의를 구분짓고, 현재 칭의받은 자라도 미래에 구원의 탈락이 가능하다는 논거를 세우는데 무리하게 차용했습니다.

'현재 완료냐 현재냐'의 시제 구분 강조 역시, 칭의유보자들이 법적 칭의와 종말론적 칭의을 구분 짓기 위해 애용되는 방편입니다. 그들이 시제의 오역이라고 공격하는 구절이 "너희가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엡 2:8)"와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요 5:24)"입니다.

그들은 '구원'과 '영생'이 헬라어 원문에서는 '현재형'으로 서술됐는데, 한역(韓譯)과 영역(英譯)이 현재완료형으로 서술함으로써, 종말론적 칭의론을 훼손시켰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는 설득력이 없어 보입니다. 대부분의 언어들은 불변의 진리나 자연법칙을 말할 때는 시제를 담지 않고 현재형으로 서술하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 "해는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는 불변적이고 자연적인 법칙은, 시제의 구분없이 항상 현재형을 씁니다.

"너희가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엡 2:8)"는, 구원을 현재 완료적으로 받았느냐, 현재적으로 받았느냐가 관건이 아니라, 구원은 오직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받는다'는 불변의 진리를 말한 것입니다.

또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요 5:24)" 역시, 영생을 현재완료적으로 얻었느냐 현재적으로 얻었느냐 가 관건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말을 듣고 그를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는 구속의 진리를 말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들을 현재완료형으로 해석한 한역(韓譯) 영역(英譯)을 오역이라고 비판하기 보다는, 오히려 구속과 영생의 도리를 견고히 확정시켜 준 훌륭한 번역으로 칭송해야 할 듯합니다.

그리고 전문적인 성경 언어학자들이 그런 기초적 시제 구분을 못하고 오역했을 리도 만무합니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쉽게 풀어 쓴 이신칭의(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