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로기 이후를 배경으로 하는 구약성경 세 권이 있다. 이 가운데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가 유다 땅으로 돌아온 유대인들의 삶을 다루었다면, 에스더서는 귀향하지 않고 페르시아 땅에 남아 살기로 결정했던 유대인들의 삶을 다룬 책이다.
이런 에스더서의 매우 잘 알려진 특징 중 하나가 '하나님'이라는 말이 한 번도 언급되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 이유는 에스더가 하나님이 없는 것 같은 세상에서, 즉 이방 땅에서, 이방 왕의 통치 아래서 유대인들의 삶을 보여주는 책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오늘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과 관련하여, 에스더 3장에 주목하려 한다. 에스더 3장은 페르시아의 왕 아하수에로가 아각 사람 하만을 국정 운영의 최고 2인자로 세우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이 일 후에 아하수에로 왕은 아각 사람... 하만의 지위를 높여 그와 함께한 고관들 위에 두었으므로, 왕궁 문에 있던 왕의 모든 신하가 왕의 명령대로 하만에게 꿇어 절하였다(바른성경)".
그러나 모르드개는 하만에게 꿇어 절하기를 거부한다. 신하들이 "왜 너는 어찌하여 왕의 명령을 거역하느냐?"라고 말했을 때, 모르드개는 자신이 유대인임을 밝힌다. 유대인 모르드개가 자신에게 꿇어 경배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분개한 하만은, 모르드개 한 사람만 손대는 것을 부족하다고 느꼈는지 왕국에 있는 모든 유대인들을 전멸시키려 한다. 그리고 유대인의 전멸을 명하는 조서에 왕의 인장을 찍어 전국에 배포한다.
3장의 메시지를 이해하기 위한 핵심적 질문은 "왜 모르드개가 하만에게 꿇어 절하기를 거부했는가"에 있다. 왜 모르드게는 왕의 명령을 어겨가며 하만에게 꿇어 절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것이 그가 유대인이라는 사실과 무슨 관계가 있었을까? (이하의 핵심 통찰은 요람 하조니의 <하나님과 정치: 에스더 이야기(홍성사, 근간)>에서 온 것이다)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유대 법이나 관습에 세속 왕이나 권력자에게 절하지 말라는 내용은 없다는 사실이다. 세속 왕이나 권위자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을 율법이 금하진 않는다. 하만에게 꿇어 경배하지 않은 모르드개이지만, 아하수로에 왕에게는 분명 그리 했을 것이다. 8장 3절에 따르면, 에스더도 아하수에로 왕에게 나아갈 때 땅에 엎드려 절했다.
그렇다면, 페르시아 왕 아하수에로에게 절하는 것과 그가 임명한 제2인자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을까? 권세자에게 꿇어 절함으로써 예를 표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더구나 왕이 그에게 꿇어 절하라 명령했다면 더욱 그래야 하는 것이 아닐까?
만약 모르드개가 하만에 대한 질투나 감정으로 절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모르드개에게 중대한 잘못을 물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의 무모한 행동으로 민족 전체가 위험에 빠졌으니 말이다.
더구나 모르드개가 하만에게 절하지 않은 것은 지금까지의 그의 삶을 볼 때도 잘 이해되지 않는다. 그는 그 때까지 페르시아 사회에 철저히 동화되어 적응하는 삶을 살았다. 그가 페르시아 주류 사회에 들기 위해 얼마나 적극적으로 노력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그의 거주지이다.
그는 '수산 성(이르 수산)'에 살지 않고, '도성 수산(수산 하비라)'에 살았다. 에스더서에서 전자는 유대 이민자들의 정착지를 일관되게 가리키고, 후자는 왕궁이 있던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를 가리킨다. 그가 유대인 정착지를 나와 수도에 살았다는 것은, 모르드개가 페르시아 사회에서 단순히 살아남기 위해 애썼다기보다 그 안에서 성공하기 위해 노력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모르드개가 "궁 뜰 앞을 오갔다(2:11)", 그리고 "왕궁 문에 앉았다(2:19)"는 표현으로 판단할 때, 그가 페르시아 왕을 위해 일하는 관료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마치 이민자가 '청와대'에서 일하게 된 것과 같다. 특히 2장 19절의 "왕궁 문"이라는 장소는 중요한 국사가 결정되는 곳으로, 온갖 정보들이 교환되는 곳이다. 소위 말해 '고대인들의 정치 일번가'라고 할 수 있다.
모르드개가 왕의 암살에 대한 계획을 알아낼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정치적 지위에서 오는 정보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왕의 암살 계획을 지나가다가 우연히 엿듣게 되는 법은 없다. 이처럼 모르드개는 페르시아 사회에 적응하여 성공했을 뿐 아니라, 궁에 들어가서는 페르시아 왕의 안위를 위해 적극적으로 '정치'했던 사람이다.
이 과정에서 그는 궁전에서 자리를 얻고 성공하기 위해 자신이 유대인임을 숨겼다. 뿐만 아니라 에스더에게도 그리 하라고 지시한다. 성경에는 구체적으로 명시되지 않지만, 우리는 모르드개가 불가피하게 유대인 음식법이나 정결법을 어겼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니, 그가 그런 유대법과 관습에 관심이 있었는지도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그는 에스더에게 페르시아 왕의 왕비가 되도록 격려했기 때문이다. 같은 시대의 영적 지도자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이방인과의 결혼을 엄금하고, 심지어 이미 이방인과 결혼한 사람에게도 이혼하라고 명했지만, 모르드개는 에스더가 이방인 왕의 후궁이 되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았던 것 같다.
즉 모르드개의 삶은 절처히 페르시아 왕국에 적응하는 삶이었다. 왕의 폭정과 방탕을 묵인하면서 어느 정도의 정치적 지위를 유지한 모르드개가, 자신의 조카 에스더를 왕비로 만든 것도 그런 그의 삶의 철학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그가 갑자기 그가 왕의 명령을 거역한다. 왕이 새로 임명한 총리에게 꿇어 절함으로써 신하로서 마땅한 예의를 갖추기를 거부한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일종의 '커밍아웃'을 하는데, 자신이 유대인임을 처음으로 밝혔다.
왜 모르드개는 갑자기 하만이 페르시아의 2인자가 되자 페르시아 정부에 대한 태도를 바꾸어 불복종과 저항의 길을 택했을까? 그리고 그런 저항이 그가 유대인이라는 사실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어떤 사람들은 모르드개가 변했다고 말하지만, 성경을 자세히 보면 모르드개가 변한 것이 아니라, 하만의 등극과 함께 페르시아 정부가 변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에스더 1-2장에서 아하수에로가 국정을 어떻게 운영했는지를 살필 필요가 있다. 에스더 1장과 2장에 따르면 왕에게는 왕국 국사를 논하는 일곱명의 행정 보좌관과 일곱명의 학자 보좌관이 있었고, 왕은 이들의 다양한 조언들을 듣고 국사를 결정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구절이 1장 13절에 나타난다.
"왕이 관습에 정통한 지혜로운 자들에게 물어 보았으니, 이는 왕이 규례와 법률에 밝은 사람들과 상의하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이다(바른성경)."
7명의 행정 보좌관과 다른 7명의 학자 보좌관들이 비교적 자유롭게 그리고 소신있게 왕에게 조언했고, 왕도 어느 한 사람의 의견만을 들은 것이 아니아, 골고루 의견을 청취했던 것 같다.
예를 들어 왕비 와스디의 처분 문제에 대해 왕은 므무간이라는 사람의 조언을 듣고 일을 처리하는데, 이 므무간은 일곱 학자 보좌관 중 가장 서열이 낮은 자였다. 또한 근거리에서 왕을 보좌하는 14명의 신하 외에도 다른 신하들이 왕에게 조언할 언로 역시 열려 있었다. 2장 2절에 따르면 왕비 와스디를 대체할 왕비를 찾는 방법에 대해, 이름 없는 신하들의 조언이 채택된다. 모르드개도 측근 14명에 포함되지는 않지만, 왕에게 자신이 얻은 정보를 전달했고 왕은 그 말을 심각히 받아들여 특별 조사단을 꾸려 암살범을 색출할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은 하만 등극 이전의 페르시아 정부 체제가 다양한 전문가들과 신하들의 언로가 열려있는 체제임을 보여준다. 즉 여러 사람들과 상의하는 것이 하만 등극 이전 아하수에로 정부의 특징이었고, 그것이 최선이고 상식적이다.
왜냐하면 한 나라를 다스리는 데는 다양한 분야의 전문지식이 필요한데, 현실적으로 한 사람이 모든 분야를 섭렵하기는 불가능하고, 동일한 분야의 전문가들도 모두 의견이 같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모든 문제에 정답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왕은 거의 모든 결정에 있어 왕은 여러 명의 신하들과 상의해야 한다. 다양한 의견을 청취한 후 왕으로서 최선의 결정, 가장 합리적인 결정을 해야 한다. 그것이 왕의 책임이다.
이와 관련해 재미있는 사실이 있다. 하만 등극 이전을 다루는 에스더 1장과 2장에서 성경 저자는 아하수에로의 신하 18명의 이름을 일일이 나열한다. 법률과 관습에 능한 학자 보좌관 7인의 이름(1:14), 행정 환관과 7인의 이름(1:10), 그 외 4명의 신하들 이름이 추가 언급된다. 이것은 아하수에로가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들으면서 정치했음을 보여주는 간접적 지표이다.
그러나 하만의 등극은 이런 다양한 언로의 차단을 의미한다. 이것은 왕이 모든 신하를 하만에게 꿇어 절하게 했다는 사실에서 암시된다. 그 때부터는 아하수에로 왕에게 하만 한 사람만의 의견이 중요해졌다. 신하들이 국가를 위해 왕에게 소신 있게 조언할 수 있는 길이 막혀 버린 것이다. 왕궁에서 중요해진 것은 오로지 2인자 하만에게 어떻게 보이느냐였다. 그래야 살아남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은 3장 이후 하만 이외의 다른 궁정 신하들의 이름이 전혀 언급되지 않고, 하만과 그의 의견만이 언급된다는 사실과 교묘하게 일치한다. 그리고 하만이 왕의 유일한 통로가 돼 다른 신하들이 소신을 가지고 왕을 도울 길이 없어진 지금, 모든 신하들은 살아남기 위해, 공직을 보존하기 위해, 하만의 눈에 들기 위해 노력한다. 때문에 아하수에로 정부는 한 개인을 위한 체제가 되고 말았다. 모르드개가 하만에게 꿇어 절하지 않은 것은 바로 이런 정부의 변화와 관련이 있다.
모르드개에게 3장 이전의 통치는 방탕하고 허영심 많은 왕에 의한 것이었지만, 그런대로 견딜만 한 것(tolerable)이었다. 왜냐하면 왕의 결정이 많은 신하들의 다양한 조언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에스더서의 저자는 처음 두 장에서 아하수에로를 이상적인 왕으로 그리지는 않지만, 방탕하고 허영심 많은 왕이라도 다양한 사람들의 조언에 귀를 귀울였을 때 백성에게 끼칠 수 있는 해악이 제한됨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와스디 문제가 어떻게 처리되었나 생각해 보자. 와스디가 왕의 소환 명령에 불복함으로 왕이 큰 수치를 당하지만, 그에 대한 형벌은 왕비 개인을 폐위시키고, 전국에 모든 여인들이 남편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취지의 조서를 내리는 것에 그쳤다.
남편에게 순종하라는 조서는 당시의 미덕을 강화시키는 것일 뿐, 백성의 삶을 파괴하는 반인류적이거나 광적인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적어도 아하수에로 왕은 한 여자의 불순종을 핑계 삼아 남편에게 불순종하는 모든 여인이 사형에 처해져야 한다는 조서를 내리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것은 왕이 여러 신하들과 상의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하만의 등극 이후 페르시아 정부는 매우 위험스러운 존재가 되고 말았다. 하만을 통한 왕의 결정들은 백성들의 삶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그가 모르드개 문제를 처리한 방식인데, 자신에게 꿇어 절하지 않은 모르드개 때문에 화가 난 하만은 광기 가득한 명령을 내린다.
즉 그의 명령은 모르드개 개인에 대한 처벌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과 아무 관련 없는 무고한 유대인들도 모두 죽이는 조치로 확대된다. 그리고 그런 광기 서린 정책이 국가의 이름으로 정당화됐다. 왕의 조서를 통해 합법화되어, 공권력이라는 이름으로 무고한 생명들이 희생될 것이었다.
이것은 매우 무서운 일이다. 하지만 하만이 절대 권력의 제2인자로 다스리는 정부에서는, 이 같은 무서운 악이 합법의 이름으로 행해질 수 있었다.
유대인이었던 모르드개에게 그런 정부는 더 이상 정부가 아닌 것이다. 그런 정부는 더 이상 존재가치를 가지지 않았다. 모르드개가 하만을 절대 2인자로 하는 페르시아 정부에 불복종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모르드개는 불의한 정부에 꿇어 절할 수 없었다.
하지만 모르드개가 하만에게 꿇어 절하지 않은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어떤 의미에서 하만은 페르시아 제국에서 우상이 됐기 때문이다.
페르시아 제국에서는 하만이라는 한 사람의 마음에 드는지의 여부가 축복과 저주를 결정했다. 사람들은 하만의 축복을 받기 위해 그가 시키는 것은 무엇이든지 한다. 아니 하만의 진노의 대상이 되지 않기 위해, 즉 살아남기 위해 그가 시키는 것은 무엇이든지 한다. 그것이 무고한 생명을 죽이는 일이라도 말이다.
유대인 철학자 요람 하조니에 따르면 가나안 종교와 이스라엘 종교의 가장 중요한 차이가 인신 제사의 여부였다. 신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무고한 인간 생명을 죽일 수 있는 가나안 우상 종교와 달리, 이스라엘 종교는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자신을 위해 무고한 유대인들을 학살하도록 명령한 하만은 우상이다. 백성들의 삶이 그에게 꿇어 절하는지의 여부에 달려 있다. 후대에 유대인 미드라쉬에서 모르드개가 하만에게 절하지 않은 것을 우상숭배와 연결시킨 것도 이런 이유일 것이다.
그럼 왜 아하수에로는 3장에서 정부 운영의 기조를 바꾸었을까? 한 사람으로 언로와 권세를 집중시키는 체제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왜 그 한 사람이 하필 하만이었을까?
아하수에로가 정책을 변화를 가져다 준 결정적 사건은 2장 19-23절에 묘사된 황제 암살 미수 사건입니다. 이 점을 보여주는 것이 3장 1절에서 저자가 "이 일 후에"라는 말을 사용했다는 사실이다. "이 일 후에 아하수에로 왕은 아각 사람... 하만의 지위를 높여 그와 함께한 고관들 위에 두었다"고 기록한다.
비록 모르드개의 제보로 암살자들을 색출하여 처형했지만, 그 암살자들이 왕이 신뢰하던 신하들이었다는 사실은 아하수에로 왕에게 큰 트라우마가 됐다. 이 일 후에 왕은 더 이상 신하들을 신뢰할 수 없었다. 신하들, 나아가 사람에 대한 신뢰가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신하들 가운데 잠재적 반역자들이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또한 자신의 권력이 하루 아침에 날아갈 수 있겠다는 생각을 본격적으로 하게 된 때도 바로 이 때 일 수 있다. 권력 상실에 대한 불안감은 권력에 대한 집착과 욕구를 더욱 크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런 가운데 아하수에로가 선택한 것은 한 사람에게 전권을 부여하여 통치하는 방식이었다. 자신이 신뢰하는 한 사람을 통해서만 국사를 듣고 처리한 것이다. 그는 한 사람의 눈과 귀를 통해 세상을 보고 듣는다. 한 사람만의 해석을 통해 세상을 이해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왕은 듣기 싫은 반대 의견을 듣지 않을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만약 일이 잘못되었을 때에는 그 잘못의 책임을 모두 2인자에게 돌릴 수 있는 장치도 갖게 된 것이다. 매우 편리하지만 무책임하고 비겁한 선택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적임자로 선택된 사람이 하만이었다.
왜 하필 하만이었을까? 일곱 행정 보좌관 중 하나도 아니고, 일곱 측근 학자들 가운데 하나도 아닌 하만을 모든 신하보다 높였을까? 정확한 이유는 성경에 나오지 않지만, 재미있는 사실은 하만이 왕에게 여자를 공급하던 자였다는 것이다. 하만은 후궁전을 책임지던 자, 왕의 여자들로 만족시키던 사람이었다는 사실이다.
최순실 사건으로 나라가 시끄럽다. 박근혜 대통령은 다양한 언로를 폐쇄하고 자신이 믿는 한 사람의 의견에 의존했다. 민심을 갈등하는 다양한 목소리를 통해 파악하려 하지 않고, 하나의 목소리를 높이고 다른 반대 목소리들을 침묵시키는 것은 통치자로서의 직무 유기를 넘어, 정부 안에 우상을 만들고 주변 사람들에게는 우상숭배를 강요하는 것이다.
실제로 최순실은 청와대 공무원들 사이에 곧 우상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청와대 공무원들이 그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를 우상 섬기듯 섬길 때, 백성들은 아무런 이유도 모른 채 고통 가운데 살아야 했다. 우리는 세월호의 어린 아이들이 왜 희생당해야 했는지 아직도 모른다. 그리고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들을 안보, 경제, 합법, 형평성이라는 이름으로 폄하하고 사장시켰다.
에스더 3장 1절을 현 시국에 적용하면 이렇다. 박근혜 대통령은 최순실의 지위를 높여 그와 함께한 고관들 위에 두었고, 청와대에 있던 모든 공무원이 대통령의 '명령'대로 그에게 꿇어 절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일이 잘못되었을 때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비겁한 행위이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우리나라 정치인들을 위한 말씀만은 아니다. 우리 모두에게도 교훈을 준다.
교훈 1.
구약 성경 에스더가 말하는 이상적인 통치자는 주변의 다양하고 갈등하는 의견들을 듣고, '진리'의 근사치를 주체적으로 책임 있게 만들어가는 왕이다. 물론 다양한 의견들이 서로 상충하기 때문에 그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기독교인들을 포함한 모든 인간이 정치적 진리에 접근하는 최선의 길이다.
이와 관련하여 재미있는 유대인 속담이 있다. "하나님의 계시는 70개의 언어로 나뉘어 보존된다." 여기서 '언어'라는 말은 관점이라는 말로 대체될 수 있는데, 이 속담의 본의는 하나님의 계시적 진리가 70개의 서로 다른 관점에 나뉘어 보존된다는 것이다. 서로 다른 언어가 서로 통하지 않듯, 서로 갈등하는 관점들 사이에 하나님의 계시적 진리가 조금씩 나누어져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 유대인 속담에 따르면 계시적 진리에 이르는 길도 다양한 인간 관점들을 자세히 듣고 배워, 진리의 근사치를 주체적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나와 반대되는 의견, 나와 다른 의견을 제거하고, 내가 동의하는 사람들의 말만을 들어서는 절대로 진리에 다가갈 수 없다.
만약 오늘날 하나님이 특정인을 통해 직통 계시로 말씀하신다면, 그 한 사람에게 의존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은 없다. 그런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만 있을 뿐이다. 만약 그런 인간이 자신의 생각이 진리라 주장하며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한다면, 그는 스스로를 우상으로 만드는 것이다. 자신과 반대되는 관점들을 모두 제거하고 없애고, 오로지 자신을 통해서만 세상을 보라고 강요하는 것이 우상이다.
그렇다면, 기독교인들은 완전히 '우상적'이 돼 버린 국가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물론 지혜가 필요하겠지만, 적어도 에스더서가 허락하는 답은 '저항'이고 '시민 불복종'이다. 그리고 성경에는 진리와 정의를 위해 저항한 영웅들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교훈 2.
우리 모두에게 있는 절대 권력의 2인자가 되고자 하는 마음을 경계해야 한다. 우리 모두에게는 권력을 가까이 하고자 하는 본능이 있어서, 누구나 권력자에게 아부하기 쉽다. 벼슬을 마다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권력자의 친구가 되면 영향력도 높아진다. 그래서 우리는 권력자가 나를 신뢰하고 나만을 통해 일하기를 원할 수 있다. 교회에서는 부교역자들, 장로님들, 집사님들이 목사님의 '하만'이 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런 욕망은 불행의 원인일 뿐이다. 우리는 공동체의 비전과 복지에 기여하는 여러 목소리들 중 하나로 남는 것에 만족해야 한다. 만약 어떤 공동체가 한 사람의 목소리에 너무 의존하게 되면, 매우 위험해진다. 그 사람은 우상이 되기 쉽다.
이것은 부교역자, 장로, 집사님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담임목사도, 교단장도 마찬가지다. 담임목사도, 교단장도 하나님 나라를 위한 하나의 목소리에 불과함을 자각해야 한다. 자신만이 '하나님의 뜻'을 전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는 하만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담임목사나 교단장이 있는 교회는 전체주의적이 되고, 그 공동체 안에서는 끔찍하고 광신적인 행위들이 아무렇지 않게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고 정당화 될 수 있다.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이 바로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김구원 교수
서울대 철학과를 거쳐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목회학 석사학위를, 시카고대학교 고대근동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는 서양고대문화사학회 연구이사이며, 개신대학원대학교에서 구약을 가르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주석 통독: 사무엘상>, <성경, 어떻게 읽을 것인가>,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구약 성서로 철학하기>, <고대 근동 문학 선집>, <고대 근동 역사>, <이스라엘의 종교>, <하나님 나라의 서막>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