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요 목사
김한요 목사(베델한인교회)

복음의 최고봉에서 외친 첫 외침이 ‘이제는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정죄함이 없다’(롬 8:1)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또 그리스도인들을 더 매도하는 것은 이것을 빌미로 그리스도인들이 죄를 더 뻔뻔스럽게 짓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말 오해입니다. 복음을 이해하지 못한 소치입니다. 만약, 자신이 짓는 죄를 더 이상 정죄함이 없다는 하나님 말씀으로 합리화 내지 책임회피를 한다면, 이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정죄함이 더 이상 없음을 선포하는 그리스도인은 오히려 믿지 않는 자가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것보다 더욱 죄를 아파하며 회개할 수밖에 없습니다.

실질적으로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도 죄를 짓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도 죄를 짓습니다. 믿지 않는 자가 죄를 짓는 것을 교통법규 위반하는 것에 비한다면, 믿는 자의 죄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깊은 상처를 주는 것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일반인들에게 죄는 코드 위반이며, 경찰관에게 어쩌다 들킨 것이라면, 믿는 자의 죄는 아내의 마음을 배신한 남편의 죄, 존경하는 스승을 배반하고, 혹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자녀들의 마음에 못질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은 더 이상 정죄함이 없음을 세상에 천명한 그리스도인은 죄를 더 엄격하고, 더 심각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그래서 죄지은 후 믿지 않는 사람보다 수백 배 더 마음 아픔과 통한의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복음을 믿고 나의 죄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 지신 것을 믿는다면 당연한 모습일 것입니다.

교통법규를 어기면 벌금을 내는 대신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추운 감옥에 일주일 보내는 것으로 한다면 교통법규를 지키는 자세가 달라질 것입니다. 벌금이 무서워 교통법규를 지키는 차원과 사랑하는 이를 지키기 위해서 법을 지키는 것은 차원이 다릅니다. 이처럼 죄를 대하는 그리스도인의 각오는 나를 위해 생명 주신 주님을 배신할 수 없다는 다짐이어야 합니다. ‘두려움’이나 ‘공포’를 뛰어넘는 ‘사랑’의 수준이어야 합니다. 더 이상 정죄함이 없으니, 협박이나 두려움이 아닌,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에서 다루어야 합니다. 형벌을 무섭게 해서 겁을 더 크게 주면 일반인은 죄의 유혹을 이기는 데 조금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죄를 이길 수 있는 더 큰 힘은 ‘내가 주님을 배신할 수 없다’는 사랑입니다. 이것이 정죄함이 없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 그리스도인들이 죄의 행실을 죽이는 방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