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유대전쟁의 마자막 장소로 예루살렘 다음 가는 성지
천연암벽을 이용해 만든 헤롯대왕 시대의 천연 요새지

◈마사다(Masada)

마사다(Masada)는 히브리어로 '요새'라는 뜻이다. 이스라엘 예루살렘 남쪽으로 1번 국도를 타고 가다, 사해를 끼고 90번 도로를 타고 1시간 35분 정도 가는 64마일(104km) 지점에 위치한다. 이스라엘 남단 에일랏에서는 90번 도로를 타고 아라바 광야를 거쳐 136.7마일(220km), 2시간 23분이 걸리는 곳이다. 서쪽으로는 유대 사막, 동쪽으로는 사해가 있고 사해에서 약 8km 동쪽에 우뚝 솟은 거대한 바위 절벽에 자리 잡은 고대의 왕궁이자 요새이다. 이스라엘의 국립공원 겸 유대인 성지로 제 1차 유대전쟁의 마지막을 장식한 장소로, 예루살렘 다음 가는 유대인의 성지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73년 제1차 유대-로마 전쟁 당시 끝까지 로마군에 항거하던 유대인 저항군이 로마군의 공격에 패배가 임박하자 포로가 되지 않기 위해 전원 자살한 것으로 유명하다. 열심당원을 주축으로 한 유대인들이 로마에 대항하여 끝까지 투쟁하다가 마지막에는 모두 자결한 패기가 흘러넘치는 장렬한 스토리의 무대이다. 이후 유대인들의 민족정신을 상징하는 성지가 되었다. 현재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 중 하나이며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다.

마사다

◈난공불락의 요새

히브리어 '요새' 라는 뜻의 어근에 걸맞게 마사다는 사해 바다 서쪽의 유대광야의 절벽 위에 만들어진 난공불락의 성채이다. 절벽 높이 450m, 둘레 1,280m, 길이 남북 800m, 동서 300m나 되는 이 요새는 천연적인 암벽을 이용하여 만든 요새이다. 사해 바다를 기준으로 마사다를 거슬러 올라가려면 암벽길 같은 절벽을 약 450m나 올라가야 한다. 그나마 좀 괜찮다 싶은 서쪽의 90m는 절벽인지라 사람이 오르는 것조차가 불가능한 곳이다. 동서남북이 절벽에 가로 막혀 있고, 동쪽으로 오르는 길은 오직 몇 사람 정도만 오르도록 되어 있는 뱀길 같은 길이 있다.

마사다

◈마사다 건축

사람들이 이곳에 언제부터 살았는가의 문제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으나, 이곳에 군사적인 목적으로 요새가 만들어진 것은 하스모니안 왕조 시대 요나단 마카비(142BCE) 시대와 알렉산더 얀네우스(103~76 BCE) 시대였다. 남쪽으로는 이두메 사람들, 그리고 동쪽으로는 나바테 사람들의 침략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한 목적의 요새였다. 하지만 이 요새가 정말 요새답게 무장을 하고, 오늘날 이스라엘 관광객들이 보는 건물들이 축조된 것은 헤롯대왕(37~4BCE) 시대였다.

헤롯 대왕은 안티고누스가 파르티아를 등에 업고 공격해오자 본인은 가족과 병력을 데리고 마사다 요새로 피신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 뒤 로마로 건너가 원로원으로부터 유대 왕으로 인정받고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등에 업고 전쟁에서 승리한다. 왕이 된 뒤, 헤롯 대왕은 마사다를 개조시키기 시작했다. 왕이 되었지만 정치적 위험도 있었기에 지리적으로 방어하기가 매우 유리한 이곳을 요새화시킨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이 피난 갈 별장까지 만들었으며 로마의 영향을 받아 수로는 물론이고 목욕탕까지 만들었다. 바위를 파서 거대한 물 저장탱크를 만들고 수십 년을 먹을 곡물과 과일을 저장하는 걸로 모자라 만 명을 무장시킬 수 있는 무기까지 보관했다. 하지만 이렇게 만든 마사다 요새는 헤롯 대왕이 죽고 로마의 속주가 되자 로마군이 쓰게 되었다.

1세기의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마사다는 기원전 37년부터 31년 사이에 헤롯 대왕이 악정으로 인해, 자기에게 대항한 반란이 일어날 것에 대비해 피난 요새이자 왕궁으로 세웠다고 한다. 수천 명이 몇 년간 충분히 먹을 수 있을 정도 분량의 식량을 쌓을 수 있는 식량창고도 만들었다.

마사다

마사다는 37 BCE 부터 31 BCE 사이에 7년에 걸쳐 건설되었다. 마사다는 남북으로의 길이는 약 650m이고, 동서로의 폭은 약 300m가 되는 다이아몬드 형태의 절벽위의 도시이다. 이 절벽의 주위로 약 1.3km가 되는 4m 높이의 성벽이 쌓여 있으니, 아래에서 위를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이 요새를 점령하려는 군사들의 사기를 꺾어 놓기에 충분한 요새이다. 게다가 이 요새로 올라가는 “뱀 길” (Snake Path)은 이 요새에 접근하기가 매우 힘들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뜨거운 광야의 태양과 후덥지근한 바람이 부는 유대 광야의 남단에 자리잡은, 마사다에서 지낸다는 것이 왕인 헤롯에게는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헤롯은 뜨거운 태양으로부터 그늘을 만들어 주고, 남쪽에서 불어오는 뜨거운 바람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을 마사다의 북쪽 끝자락 절벽에 궁전을 지었는데, 그 궁전은 3층으로 매우 호화로운 궁전이다.

이 궁전의 맨 위는 헤롯의 사무 공간, 또는 생활공간이었다. 그리고 중간 층의 원형 건물은 헤롯이 즐기기 위한 위락의 공간으로 사용되었고, 맨 아래 궁전은 아름다운 프레스코로 장식된 헤롯 전용 공간으로 헤롯만을 위한 사우나 시설이 구비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면, 유대 지역에서는 얼마나 물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는가가 곧, 그 사람의 지위를 말해 주는 것 같기도 하다.

◈헤롯과 마사다

헤롯은 유대인이 아니었다. 헤롯은 74BCE에 이두메(에돔)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이두메 지역은 독립적인 왕국이 아니라, 유대 지방에 편입된 한 개의 지방이었기 때문에 헤롯이 비록 이두메의 귀족 가문 출신이기는 하였지만, 유대 지방에서는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던 것은 확실하다. 헤롯의 나이 갓 25세 때에 갈릴리 지역의 행정 장관으로 임명되었으니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헤롯이 순수한 이방인이었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들은 헤롯의 어머니가 하스모니안 왕조의 공주로 유대인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분명한 역사적 사실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적인 정황으로 볼 때, 헤롯이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순수한 유대인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은 확실하다.
유대 땅에서 165BCE 이래로 지속되던 하스모니안 왕가가 기울어져 갈 무렵인 63BCE부터 37BCE 사이에는 하스모니안 왕가가 유명무실했다.

반대로 로마가 유대 땅에서 적극적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한국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그래도 이름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는 폼페이 장군이 바로 이 통치의 시작을 알리는 인물이었다. 이 시기에 헤롯은 꾸준히 자신의 정치력을 키워 나갔고, 37BCE 에는 로마의 속주인 유대(Judea) 지방을 다스리는 왕으로 지명되었다. 유대 지방의 수도인 예루살렘에 거주하면서 스스로 유대인이 아닌 것에 대해서 매우 큰 부담감을 가졌던 헤롯과 그 일가는 모두가 유대교로 개종을 한다. 정치적인 선택이었다. 그리고는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정책들을 펼쳐 나갔다. 성전을 증축하고, 유대교를 권장하기 위한 프로그램들을 마련해 나갔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두려움,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언제 반란을 일으킬지 아무도 모른다는 생각이 헤롯의 머리 속에서는 많았다. 그래서 만약을 대비하여 피난을 갈 피신처를 물색한 것이다. 그의 눈에는 마사다가 최적지였다. 이미 천혜의 요새로 갖출 수 있는 조건들을 다 갖추고 있는 데다가 이두메 지역과 매우 근접한 지역이기 때문에 자신의 동조자들을 규합하기도 그 보다 좋은 곳이 없었다.

그래서 이 마사다를 자신의 만약을 대비한 피난처로 삼는다. 뿐만 아니라, 이 마사다는 외적으로부터의 침략을 대비하기 위한 목적으로도 헤롯에게는 아주 중요했다. 헤롯에게 치명적인 외적은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였다. 이미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오의 사랑 이야기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다. 그 사랑 때문에 안토니오는 훗날 아우구스투스라고 불리게 되는 옥타비아누스와 전쟁을 하게 된다. 이 전쟁의 틈바구니에서 헤롯은 옥타비아누스의 편에 서게 되는데, 그랬기 때문에 클레오파트라로부터의 위협에 대비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