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 토라의 첫 책, 베레쉬트 (Bereshith, 저자주–태초에라는 뜻으로 창세기라 번역된다)의 그리스어 번역본을 처음보고 나는 정말 크게 놀랐다. 세상이 만들어지고 인간이 타락하고 홍수로 심판받는 전설과 같은 이야기가 정확한 숫자와 등장인물들의 이름, 나이, 계보와 함께 말도 안되게 상세하게 제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시대에 알려진 어떠한 그리스어 라틴어 기록물도 그 정도의 정교함을 보이지 않는다. 내 생각에 베레쉬트는 그 대담한 진술로 볼 때, 뻥이 아주 큰 사람의 저작물이라거나 오랜세월에 거쳐 쓰여진 신화로 폄하하기보다는, 신과 같은 초월적인 존재가 인간에게 전해준 것이라 믿는 편이 더 합리적이다.

베레쉬트에 기록된 여호와는 종종 뻔한 선택을 일부러 피하고 약자의 편을 드는 경향을 보인다. 인류 최초의 죄로 기록된 가인의 아벨 살해도 신이 동생의 제사만 받은 데서 온 결과이다. 에서 대신 동생 야곱을, 그리고 12형제 중 막내 요셉을 선택하고, 형 아론이 아닌 모세를 지도자로 세우는 등 이런 성향은 이스라엘의 초기역사에 계속 반복된다. 신은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택한 이유 역시 그들이 주변에서 가장 보잘 것 없기 때문이라고 직접 밝히기도 했다. 그런데 인간은 여호와의 또다른 품성인 질투심을 닮은 존재이다. 선택받지 못한 가인과 에서의 후손들, 그리고 주위 민족들은 두고두고 이스라엘을 괴롭힌다. 집안내력인지 신의 아들 예수가 유대지도층의 교만을 꾸짖으며 죄인과 약자 편에 섰던 탓에 그들은 예수를 죽이려 하였다.

내가 보기에 인간세상의 모든 싸움과 불행의 근원은, 각 사람이 평등하게 창조된 것이 아니라, 주어진 능력과 조건이 다르다는 데 있다. 뛰어난 인간의 열심은 그에게 필요이상의 재화를 가져다주며, 그에게 특별한 악의가 없다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소유의 불평등을 가져오게 마련이다. 그렇게 시작된 격차는 부족과 나라로 단위가 커지면서 지배와 피지배의 뒤엉킴속에 피비린내를 가져온게 인간의 역사다. 누군가는 그러한 불균형을 가져다 준 신의 창조질서를 비난할 것이다. 부질없는 일이다. 이는 마치 땅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덩이가 나는 왜 빛나는 대리석조각이 되지 않았냐고 조각가인 인간에게 불평하는 것과 다를바 없기 때문이다.

나는 예수의 가르침 속에서 이미 주어진 현실을 불만스럽게 버티는 노예가 되지말고 아예 새로운 판을 소망하라는 음성을 듣는다. 이 세상을 고치려는 그 어떠한 시도도 결국은 모두 부질없을 것이다. 성공하더라도 이내 또다른 불평등이 싹틀 것이기에. 내 보기에 예수의 가르침은 베레쉬트를 일찍이 인간에게 전해준 초월적인 존재가 이스라엘이라는 시행착오 끝에 모든 인간에게 보내는 가장 큰 선물이다. 조각가가 대리석조각상 옆에 떨어진 돌덩이에까지 마음을 주고 있다니 이런 관대한 신이 어디 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