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 메시아

앤 라이스 | 포이에마 | 372쪽

결국 모든 책의 존재 이유는 물음표(?)를 느낌표(!)로 바꾸는 데 있는 것이다. 그것이 신학이든, 문학이든, 경제학이든, 철학이든. 모르는 것(?)을 알려 주는 데(!) 책의 목적이 있고, 그것이 우리가 비싼 돈을 주고 책을 사는 이유이다.

여기서 하나 묻게 되는 건 '우리가 무엇을 모르고 있고, 무엇을 알고 싶은가'이다. 어떤 책은 정말 우리가 몰라서 궁금해하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존재하지만, 다른 어떤 책은 우리가 궁금해하진 않았지만 잠재의식 속에 모르고 있는 것을 포착하여 '당신은 이것을 모르고 있다!'고 일깨워 준 뒤 답을 주기 위해 존재하기도 한다.

가령 경제서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돈을 잘 버는지 모르기에 그것을 알려주지만, 철학서는 우리가 평소에 궁금해하지는 않지만 '알고 있어야 한다'는 강제적인 물음표를 던져 준 뒤 느낌표를 찾아간다. 대개 인문학은 후자, 궁금해하지 않지만 궁금하게 만든 다음 답을 알려 주는 장르다.

앞말이 길고 어려웠겠다. 책으로 들어간다. 이 책, 표지가 강렬하다. 어느 어머니가 아이를 숨기려는 듯 끌어안으며 초조한 눈빛으로 화가(또는 독자)를 응시한다. 마리아와 어린 예수님의 모습이다. 이 표지 그림은 원서와 다른 것이다. 원서에는 평범한 아이(예수님)의 모습이 담겨 있는데, 책을 옮기면서 고심하다 우리나라에선 잘 알려지지 않은 프랑스 화가 레옹 코니에의 '베들레헴의 영아 학살' 작품을 썼다. 나는 효과적이라고 본다. 주제와 잘 맞으면서 손이 가게 하기 때문이다. 디자이너의 지적·예술적 소양을 보게 한다.

내용으로 들어가 보자. 소설은 남의 이야기다. 그것이 실화를 바탕으로 하건 완전한 허구건, 내 이야기가 아니기에 사실 우리는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러나 소설은 궁금해하게 하는 힘이 있고, 이 힘의 강도가 소설의 가독성을 좌우한다.

소설 <영 메시아>는 예수님의 어린 시절 1년 동안을 이야기한다. 성경에는 나오지 않는 이야기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우리는 예수님의 그 1년을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소설은 궁금해하게 하는 힘이 있고, 기어코 마지막까지 읽게 만든다.

예수님의 어린 시절 1년은 어떤 의미일까? 이 궁금증은 '예수님은 태어날 때부터 자신의 정체성(영혼 구원)을 알지는 않았을 거다'를 전제로 두고 있다. 작가는 '예수님은 자신의 정체성을 언제 알았을까?'를 궁금해했고, 이 궁금증을 상상력을 바탕으로 그 시대의 자료를 가지고 풀어 나갔다. 난 이 부분이 놀라웠다. 작가는 독자들이 무엇을 궁금해하고 어디에서 선을 그어야 다음의 자신의 책을 기다릴지 잘 알고 있는 듯, 첫 부분에서 보여 준 사건부터 끝부분의 마무리까지 몰입감 있게 처리하였다.

이 책을 통해 새로 알게 된 가설이 있다. 예수님이 장남이 아니라는 거다. 예수님이 태어나기 전에 형이 있었다(여기에선 '야고보'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난 처음에 '이게 뭔가?' 했는데, 알아 보니 신학적인 근거가 두 가지 있다고 한다. 당시에는 아무리 장남이 다른 주장을 한다 해도 동생들이 장남을 비판(요 7:3-5)할 수 없었다는 것과, 형제가 있음에도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사도 요한에게 맡긴 일(요 19:27)이다. 그래서 마리아가 요셉의 첩이라는 주장이다.

이 책에선 이 가설(假說)을 진설(眞說)로 정하고 이야기를 전개한다. 책을 읽을 때 이 부분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이야기를 잇는 요소로 '사건'을 삼는데, 이 사건을 의도치 않게 보여 주는 예수님의 기적으로 했다. 몇 번의 기적으로 예수님은 자신이 어떤 사람이고,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깨닫게 된다. 드라마틱하고 환상적이지만, 30세 이후 예수님이 행하신 일들을 알고 있는 독자들에게는 수긍할 수 있게 한다.

한 가지 걸리는 건 한글 제목이다. 원제는 'Christ the Lord(예수 그리스도)'인데, 한글 제목은 <영 메시아(어린 예수님)>이다. 원제도 주제를 제대로 담지 않고 있지만, 한글 제목은 조금 유치하지 않나 싶다. 그래도 이건 굳이 단점을 찾자고 했을 때 지적할 수 있는 부분일 뿐이다.

이 책의 유익 중 가장 큰 건, '성경을 다시 읽게 되었다'는 점이다. 또한 성경이 그리 자세히 기록되지 않았고, 우리는 거룩한 상상력과 호기심으로 이 빈 부분을 채워 나가면서 은혜를 느낄 수 있다는 점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이 기독교 소설과 일반 소설의 가장 큰 차이점이고, 기독교 소설을 읽어야 하는 이유라고 본다.

하나, 신학자나 읽는 이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건 융통성이다. 소설 시장이 활성화되려면 확실치 않은 부분을 허구로 메우는 것에 대한 아량이 필요하다. '그것은 성경에 나와 있지 않으므로 함부로 주장해선 안 된다'는 아집이 소설 시장의 성장을 퇴보하게 하며, 나아가 성경에 대한 이해마저 떨어뜨리게 하는 것 아닐까.

또 하나, 작가에게 당부하고 싶은 건 그래서 기독교 소설가들은 신학자 못지 않은 신학과 영성가 못지 않은 영성을 겸비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은 '허구의 성경 이야기'는 지탄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 <영 메시아>는 신자들이 궁금해할 성경의 빈 부분을 정확히 잡으면서, 신학과 영성을 잘 버무려 매끄러운 이야기로 잘 만들었다. 소설임을 잊지 않고 읽는다면 충분한 재미와 은혜를 받게 될 거다.

/이성구 부장(출판사 순전한나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