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립보서 2:3)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긴다는 것” 정말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만일 누군가 이렇게 물어본다면 제 자신, 목사이지만 “그럴 수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을 낫게 여긴다는 것은 솔직히 내 생각과 사람들에 대한 평가와 기준이 허용하는 정도까지만 일 때가 많습니다. 때론 내 입장과 상황이 손해를 보지 않고 적당하게 체면을 유지하는 정도이지요. 그래서 상대방이 도에 지나치는 행동을 하거나 정말 형편 없는 모습을 보일 때는 이 성경 구절을 문자 그대로 적용하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감정을 묻지 않습니다. 우리의 생각도 묻지 않습니다.
다만 남을 낫게 여기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를 빌립보서 2:5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남을 낫게 여겨야 되는 이유..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만이 이유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 무엇인지 그 다음에 빌립보서 기자는 설명을 덧 붙였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의 마음은 우리를 낫게 여기시기 위해(구원을 위해) 십자가까지 복종하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생각해 봅니다. 남을 위해 십자가를 지겠다는 마음이 내게 있었는가? 솔직히 얼굴이 붉어집니다.
지난 목요일 생명의 삶 예화를 읽다가 마음에 다가와 지면에 옮깁니다. 이 예화의 얘기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삶의 현장의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초등학교 4학년때, 어머니 고향인 미국으로 긴 여행을 떠났다. 낯선 나라에서 외롭게 사신 어머니와 혼혈아로 한국 학교를 다닌 내게 선물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미국인 기독 학교에서는 아이들이 날 좋아할까? 생김새가 비슷하니 놀리는 아이들은 없을지도 몰라!’
첫 수업은 철자 수업이었다. “앞줄부터 시작이야. 스프링!” 선생님 말씀에 맨 앞 줄 아이가 대답했다. “에스 피 알 아이 엔 지!” “좋아. 다음! 요셉이는 앞으로 나와 봐.” 영어는 들을 줄만 알지, 철자를 모르는 나는 숨고만 싶었다. “얘들아, 선교사님 자녀인 요셉이는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어를 아주 잘 한단다. 요셉아, 선생님 이름을 한국어로 써 줄래?”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칠판에 한글을 또박또박 적자,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내 이름도 써 줘!” 친구들의 이름을 적을 때마다 아이들은 박수를 했다.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얘들아, 요셉이가 한국어를 참 잘하지? 너희도 선교사가 되려면 다른 나라 말을 이렇게 잘해야 한단다.”
[삶으로 가르치는 것만 남는다]/ 김요셉. 생명의 삶 9월 4일자 예화에서 인용.
예화에서 우린 낯선 나라에서 온 학생을 위해 학생의 마음으로 배려했던 선생님의 따뜻한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작은 배려가 우리의 삶을 조금은 더 따뜻하고 풍성하게 해 줄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 교우들이 이 마음으로 한 주간을 호흡하고 살아가게 될 것을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