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윤환 목사.
(Photo: 기독일보) 최윤환 목사.

사막의 땅 한가운데 왠 작은 파란유리 빛 호수가 펼쳤는가.
가물가물 계곡 아래 사막 바닥으로
내린 물줄기일가, 아니면
겨울 年, 한차례의 雨氣에 퍼부은 물 비 이였을 가
저수지라고 불리 우는 사막의 바닥 가운데, 파란 거울 빛

계곡 한 중간에 멈춰서
땅에서 주은 몇 개의 작은 차돌들,
홍수가 머물렀던 자리 이였을 것일 테니
나 혼자서, 그리 생각해 버리고
계곡 저 아래로 바닥까지 내려갔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고
구불, 구불
내려 온 길을 다시 되 올려 다 본다.

펼쳐진 매 마른 계곡으로_ 아, 요르단의 그랜케년인가.
회색과 갈색 대 自然, 쏟아져 내린
돌아, 돌아 땅에 붙어 기어오르는, 차 길 먼지바람
그림 속의 壯觀이여!

그러든 사이, 하늘에 닿은 언덕바지 윗녘
갑작스레 시야에 한 가득 전개되어 나타나오는,
서구식 켓슬(궁성)이 천 년 전의 납작 엎드린,
十字軍 흔적 城郭으로
한 눈 안에 들어오는 사막 속의 비탈길 길목이여,

대 自然 바닥에 붙어서 기어 다니 듯
개미 같은 생명이 우리네들 의 것이었다면
이렇듯 반드시 한 창조주의 設定에
소굿 하게 내 머리 숙여내려야 할 수 바께 없는
넓고 도 드넓은 사막 한가운데로의 숨, 저리 게
떨어져 내린 無我여..

사람들은 여기를 요르단의 그렌케년이라고 불러주고 있었습니다. 한 눈에, 한마디로 自然의 壯觀이었습니다. 나무 한 그루 없이 드넓은 사막과 잿빛 풀포기 드믄, 드믄 엇갈리는 비탈, 구불, 구불 트랙타가 마치 굴러다니듯 비탈길을 만들어 내어 뽀얀 먼지를 저 아래 비탈길로 이어내고 있었습니다. 사막이지만, 회색빛, 흑갈색, 누런 흙빛이 에노그 물감 흩뜨러 놓은 것처럼 흐므적 거리는 비탈바닥이 펼쳐져 내려 있었습니다. 사막의 절묘한 아름다움이었습니다.

그리고 눈길 윗 편에는, 나타나오는 납작 엎드려 누어있듯이, 길게 마름모 꼴 검은 상자 같게, 천 년 전의 십자군 성터가 비탈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사막 한 중간의 언덕에 서 있는 나는, 사막가운데 붙어 있는 하나의 먼지 같이 느껴져 왔습니다. 그러면서 또 잠시 후엔 나는 또 여기에 심장과 숨이 튀고 있는 살아 있는 생명임으로도 헐떡이면서도 따뜻하게 느껴져 왔습니다. 하나의 인간 생명은 살아 있는 신비와 비밀입니다. 그리고 확실히 창조주의 영혼을 담은 生覺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아무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자기 삶으로 움직여 가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이 生覺의 끝으로 時間 다할 때에는, 성서의 豫見대로 하나님 세계로 찾아 올라가 내 영혼의 본연 모습을 찾아서, 지상에서 못 다한 나의 활동을 더 힘차게 일하여 내 갈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도, 내일도, 또 영원히 살아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