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혁 교수
(Photo : ) 하인혁 교수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딨어?'

사실 세상에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많은 법들이 있다. 감히 장담하건데 미국의 대법관이나 법학과 교수라고 하더라도 모든 법을 다 알지는 못할 것이다. 하물며 우리같은 일반인들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나? 그럼에도 우리가 자신있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이유는 분명히 있다. 법은 상식에 어긋나지 말아야 하고 이치에 맞아야 한다. 모든 법조문을 다 알지는 못해도 법이 어떠해야 한다는 것은 안다. 그런데 상식이라는 것이 그렇게 만만하지는 않다. 나에게는 상식이지만 남에게는 그렇지 않을 때가 많다. 상식이 문화적인 것을 포함하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남의 얘기를 할 것도 없이 나 스스로에게도 상식에 대한 기준이 쉽게 변하는 것을 관찰한다. 세상에 이치에 대해서도 이렇다 저렇다 말들이 많다. 역설적으로 그래서 법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그런 상식이나 이치의 범주에 포함되는 중요한 요소중의 한나가 바로 “공정성”에 관한 것이다. 법은 공정해야하고 또 공정하게 적용이 되어야 한다. 그 정도쯤은 나도 안다. 그런데 과연 모두에게 공정하다고 느껴지는 기준이 있을까?

비행기를 탈 때 일등석을 구입한 승객이 제일 좋은 대우를 받는다. 탑승을 제일 먼저 하고 음식도 더 좋은 것을 대접받는다. 이것을 보고 불공정하다고 우기는 사람은 없다. 그들은 더 많은 요금을 내기 때문이다. 가격별로 서비스가 정해져 있다. 돈있는 사람을 더 대우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많이 낸 사람을 더 대우한다. 세상이 그렇다. 억울하면 나도 일등석을 구입하면 된다. 하지만 내가 일등석을 사려고 하는데 나에게만 팔지 않는다면 우리는 정당하지 못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일등석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한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차별이라고 부른다.

운동경기에서 승리한 팀에게 영광이 돌아가고 공부를 잘 한 학생이 상을 받는다. 결과에 따라 대우가 달라진다. 왜 일등이 이등보다 더 많은 상금을 받는지를 놓고 시비거는 사람은 없다. 대우는 똑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정함이란 대우의 균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기회의 균등을 말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대우가 다를수록 동기를 유발하게 되고 경쟁심을 부추기게 된다. 일등을 해도 마땅한 대우가 없다면 애써 노력할 이유를 찾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세상에 이런 논리만 존재한다면 그야말로 무한경쟁체제에 돌입하게 된다. 경쟁에서는 성공한 사람보다 실패한 사람이 더 많기 마련이다. 성공한 사람도 언젠가는 실패할 수 있고,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시합에서 패배했다고 해서 그 인생이 실패는 아니다. 일등은 여전히 칭찬을 해주지만 일등을 하지 못한 사람들도 격려를 받을 수 있는 사회가 성숙한 사회이다.

일평생을 차별에 대항해서 살았던 넬슨 만델라가 지난 주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이런 말을 남겼다.

"나의 성공으로 나를 판단하지 말고, 오히려 내가 몇번이나 넘어지고 다시 일어났는지로 판단해 달라"

만델라의 삶을 보면 참으로 대단한 인물이라는 생각뿐이다. 처한 상황에 굴복하지 않고 한 영혼이 이렇게까지 훌륭해질 수 있을까 싶을 정도이다. 그런데 아마도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만델라와 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에는 알려지지 않았고, 생전에 만델라와 같은 인정을 받지 못했다고 해서, 즉 성공을 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 사람들의 삶이 실패작인 것은 아니다. 만델라가 하려고 했던 말은 바로 이것이다. 만델라는 그의 성공(남들이 인정해주는)으로가 아니라 자신의 삶의 과정(어쩌면 자신밖에 모르는)으로 스스로를 평가하고 있었다. 이 말은 세상을 향해서 던진 말이 아니라 바로 자기 스스로를 다스리는 좌우명이었을 것이다. 나는 쓰러져도 다시 일어난다는.

지난 학기에 72세된 할아버지 학생을 가르쳤다. 학부생이다. 이제서 대학졸업장을 받으면 무엇을 하려는지 묻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나도 그 답을 알 것 같았다. 우리는 무언가에 쓰려고 어떤 일을 하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그 무언가가 목표이기도 하다. 쓸모없다고 다 필요없는 것은 아니다. 내가 한번 만난 적도 없는 세상사람들의 눈이 나의 삶의 기준일 수는 없다. 그런 기준은 헛된 것이 아니라 헛것이다.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두가 경쟁에서 성공하고 싶어하고 또 그 성공으로 평가받고 싶어하는 이 시대에, 감히 만델라와 같은 용기를 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그래서 그의 또 다른 조언을 기억한다. 용감한 사람은 겁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겁을 정복하는 사람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