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에 뉴저지에 목회자 세미나가 있어서 비행기를 타기 위해 공항을 향해 출발한 적이 있었다. 더운 날씨 탓에 타자마자 차 안은 그야말로 한증막 같았다. 그래서 창문을 열고 바깥 공기를 마시며 운전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얼마 후 로컬 길을 벗어나 고속도로에 들어서는 순간,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것을 하나 느끼게 되었다. 평소 고속도로를 달릴 때는 창문을 닫고 운전했기에 몰랐는데, 창문을 열고 달리니까 시속 70마일의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를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그 속도 때문에 차 안에 있었던 나는 무서운 느낌과 함께 야릇한 스릴을 느꼈다. ‘아! 이래서 젊은 사람들이 스포츠카를 타는구나….’

공항에 도착한 후 한 시간 쯤 지났을 때 내가 탄 비행기는 맑은 날씨와 함께 노련한 조종사 덕분에 아주 순적하게 뉴저지를 향해 비행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방금 공항에 오기 전까지는 시속 70마일의 속도도 그렇게 빠르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시속 500마일로 비행을 하고 있는데도 전혀 빠르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냥 편안하게 자리에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그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감각이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 사람들마다 이 감각의 기준이 달라서 같은 온도일지라도 어떤 사람은 춥다 하고 어떤 사람은 덥다 한다.

어떤 이는 교회에 10분 거리를 오면서도 멀다고 느끼는 이가 있는가 하면, 어떤 이는 1시간의 거리를 오면서도 교회가 가깝다고 느끼는 이도 있다.

이처럼 인간의 감각은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감정이나 느낌에 기초를 둔 판단과 결정이 얼마나 어리석고 위험한가를 우리는 알 수 있다.

요즘 들어서 많은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판단하려 할 때, 내가 좋으면 옳은 것이고, 내가 싫으면 틀린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옳고 그름의 문제를 따질 때에 자신의 느낌과 주관에 의해서 하는 것이다. 이것은 포스트 모더니즘의 시대를 살고 있는 이 시대 사람들의 대표적인 특성이다.

그러나, 이 특성이 얼마나 위험하냐면, 이 기준대로 한다면, 도덕과 윤리가 필요 없어지게 된다. ‘내가 좋아서 하는데 왜 못하게 하느냐’는 것이 대세를 이루게 된다. 그 대표적인 것이 동성애와 낙태이다. ‘내가 좋으니 내 맘대로 하겠다’라는 무서운 자기편의와 이기주의가 그 속에 스며들어 있다.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자신의 느낌과 주관대로 살면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인간의 느낌과 주관을 제어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 인간이 넘어서는 안되는 기준이 무엇이며 인간이 바로 가야 할 삶의 방향이 뭔지 알아야 한다. 이것은 법으로도 강압할 수 없고 물리적인 제재도 가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인간은 곧 법을 바꾸고 더 큰 힘과 강압을 동원하여 자신의 느낌과 주관을 관철하려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 밖에 없다. 바로 말씀이다. 말씀은 인간의 마음을 움직여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능력이다. 말씀은 인간의 마음 속에 생명의 역사를 이룬다. 인간을 살리는 능력이 말씀에 있다. 참 기준을 찾지 못해 저마다 느낌과 주관대로 살아가며 흔들리고 있는 이 시대 앞에, 진정으로 흔들리지 않는 기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