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6장에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는 말씀이 나온다.

바울은 몸에 '흔적'이 있다. 전도자이기에 입은 상처다. 복음을 전하느라 당한 고통과 아픔, 수치와 모욕의 '상처'다.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 없이 맞고 여러번 죽을 뻔하고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였으며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굶고 춥고 헐벗었다.'

이 길이 바울이 걸어 갔던 길이다. 오늘도 복음 전하는자들이 가야 할 길 아닐까?
눈물 없이 못가는 길 피 없이 못가는 길
골고다의 좁은 길이 영문 밖의 길이다.

그리스도교가 시작된 후 처음으로 감독, 신부, 장로, 집사, 조사들이 모인 니케야 회의가 325년 비두니아주 니케야에서 열렸다. 참석한 대표가 318명이었는데 그중에 12명만 몸이 성하고 나머지 306명은 그동안 당한 신앙의 박해로 불구자가 많았다고 한다.

기독교 역사 2천년은 고난의 역사요, 순교의 역사다.
고난 없는 영광이 어디 있나, 가시관 후에야 면류관 쓰는 법이다.

우리는 알고 있다. 바울이 가졌던 '상처'는 천국에서 받을 영광과 상급의 표식이라는 것을 ...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라'고 기다리고 있다. 전도자의 소망이 이생뿐이면 우리만큼 어리석고 불쌍한 자가 어디 있겠느냐고 바울 사도가 묻고 있다.

의로우신 재판장 앞에 서는 그 날, 받을 보상과 새롭게 시작될 영광의 삶, 바로 그 천국 소망에서 끝을 보려고 한다.
아 - 바울 사도의 노년이 부럽다.

'천로역정'에서 진중도 '나는 나의 상처와 흔적들을 증거로서 이제 나에게 상 주실 이에게 가지고 가서 보이련다.'라고 한다.

인생 일생이 길지 않다.
돌아 보니 목회도 순식간에 지나 갔다.
말씀 앞에 서니 후회스럽고 부끄럽다.
대우 받고, 쉬운 길 택하고 편한 길을 가려고 한것만 같다.
바울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는데
주님 앞에 보여 드릴 '흔적'이 없어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