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복음화와 성시화운동의 선구자이자 한국CCC(대학생선교회) 창립자로 한국교회사에 큰 족적을 남긴, 故 유성(遊星) 김준곤 목사의 3주기 추모예배가 28일 오전 10시 서울 종로구 부암동 CCC본부 브라잇채플에서 열렸다.
김준곤 목사는 1925년 3월 28일 전남 신안군에서 출생했다. 1948년 장로회신학교와 1953년 조선대 문학과를 졸업한 후 광주 숭일중고등학교에서 교목과 교장(1955~56)을 지냈다. 1958년 한국CCC를 설립했고 1965년 국회조찬기도회, 1966년 국가조찬기도회를 창설했다. 1969년 전군신자화운동, 1972년 성시화대회, 1974년 엑스플로74, 1980년 80복음화대성회 개최 및 한국창조과학회 창설을 주도했다.
1988~1990년 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을 역임했고, 1990년 마닐라 뉴라이프2000 준비위원장을 맡았다. 1991년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 이사장, 1995년 GCOWE 세계선교대회 준비위원장, 1997년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상임 공동대표, 1999년 (사)2002년 월드컵 기독시민운동협의회 대표회장, 1999년 기독교 동서화합운동·기독교 민족화합운동 대표회장을 역임했다.
이만신 목사(한기총 명예회장, 중앙성결교회 원로)는 ‘참 좋은 목사(사57:1~2, 고전11:1)’라는 주제의 설교에서 “김준곤 목사님은 지성과 영성이 뛰어난 목회자셨다. 그의 학구열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1925년 일제에 강제징병당해 전쟁터로 끌려갔다가 탈출해서 어느 목사님 댁에 숨어 지냈었는데, 그 집 서재에 있는 책들을 모두 독파했었다”고 고인을 회상했다.
이어 “김준곤 목사님은 어떤 일이든 기도를 먼저 하셨다. 기도는 그의 영성과 설교를 풍성하게 하였다. 김 목사님은 1958년 한국CCC를 창설하면서부터 소천하시기 전까지 매일 민족복음화와 통일한국을 위해 기도하신 분이다. 그의 지도를 받았던 제자들은 모두 교계와 사회의 거목으로 성장했다. 김 목사님은 6.25 당시 공산당에 의해 가족을 모두 잃었지만, 원망하거나 보복하지 아니하고, 아가페의 사랑으로 민족을 사랑했다”고 전했다.
이형자 원장(훼불센터)과 요시다 코지 목사(일본인교회), 김경수 장로(미주 홀리클럽 회장)는 추모사를 전했다. 김경수 장로는 “1962년 김 목사님의 인도로 예수를 믿게 됐는데, 김 목사님은 “나는 예수님 앞으로만 인도하고,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신다”고 말씀하셨었다. 1박2일 금식도 했고 남산에서 합창도 했었는데 큰 추억이 된다”고 했고, 요시다 코지 목사는 “김 목사님이 엑스플로 74 대회 때 일본 목회자와 성도 1천명을 초청하였었는데, 저도 그 곳에서 큰 목회적 전환기를 맞게 됐다. 이후 한일간 화해의 선교사로 가족과 함께 한국에 오게 됐다”고 밝혔다.
딸 김윤희 교수는 유족인사에서 “노년의 얼굴에 어린아이의 미소가 깃든 아버지의 영정이 참 멋있다. 생전 아버지는 이런 미소로 가족을 맞아 주셨다. 아버지는 1980~81년 간 매일 조선일보(2년)와 동아일보(1년)에 예수칼럼을 쓰셨는데,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생명력이 있는 칼럼이었다. 요즘에도 종종 아버지의 칼럼을 보는데 큰 힘이된다”고 회상했다.
고인의 육성메시지 청취 시간도 이어졌는데, 1979년 9월 2일 ‘비전이 없는 민족은 망한다’라는 주제의 설교로, “민족을 위한 에스더와 존 낙스의 기도를 해야 할 때다. 민족의 가슴이 되자. 순종하는 민족에게는 하나님께서 축복하신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는 예수 한국을 이루자”는 메시지였다.
이날 추모예배는 순서는 사회 주수일 장로(진새골사랑의집 이사장), 대표기도 김덕수 장로(전 해군 제독), 이지아 씨(CCC전국부총순장), 성경봉독 하은혜 권사(CCC 어머니순), 설교 이만신 목사, 약력소개 남상옥 회장(한국아브노바), 추모사, 추모시 임만호 장로, 유족인사 김윤희 박사, 구호제창 홍근영 씨(CCC전국총순장), 축도 전병금 목사 순으로 진행됐다. 예배 이후에는 CCC비지니스장학금을 수여식이 진행됐다.
내빈으로는 길자연 목사(전 한기총 대표회장, 왕성교회), 김성진 목사(예장합동 증경총회장), 홍정이 목사, 박진탁 목사(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장), 안준배 목사(한교연사무총장), 김성영 목사(전 성결대 총장) 등이 참석했다.
김준곤 목사는 1925년 3월 28일 전남 신안군에서 출생했다. 1948년 장로회신학교와 1953년 조선대 문학과를 졸업한 후 광주 숭일중고등학교에서 교목과 교장(1955~56)을 지냈다. 1958년 한국CCC를 설립했고 1965년 국회조찬기도회, 1966년 국가조찬기도회를 창설했다. 1969년 전군신자화운동, 1972년 성시화대회, 1974년 엑스플로74, 1980년 80복음화대성회 개최 및 한국창조과학회 창설을 주도했다.
1988~1990년 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을 역임했고, 1990년 마닐라 뉴라이프2000 준비위원장을 맡았다. 1991년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 이사장, 1995년 GCOWE 세계선교대회 준비위원장, 1997년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상임 공동대표, 1999년 (사)2002년 월드컵 기독시민운동협의회 대표회장, 1999년 기독교 동서화합운동·기독교 민족화합운동 대표회장을 역임했다.
이만신 목사(한기총 명예회장, 중앙성결교회 원로)는 ‘참 좋은 목사(사57:1~2, 고전11:1)’라는 주제의 설교에서 “김준곤 목사님은 지성과 영성이 뛰어난 목회자셨다. 그의 학구열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1925년 일제에 강제징병당해 전쟁터로 끌려갔다가 탈출해서 어느 목사님 댁에 숨어 지냈었는데, 그 집 서재에 있는 책들을 모두 독파했었다”고 고인을 회상했다.
이어 “김준곤 목사님은 어떤 일이든 기도를 먼저 하셨다. 기도는 그의 영성과 설교를 풍성하게 하였다. 김 목사님은 1958년 한국CCC를 창설하면서부터 소천하시기 전까지 매일 민족복음화와 통일한국을 위해 기도하신 분이다. 그의 지도를 받았던 제자들은 모두 교계와 사회의 거목으로 성장했다. 김 목사님은 6.25 당시 공산당에 의해 가족을 모두 잃었지만, 원망하거나 보복하지 아니하고, 아가페의 사랑으로 민족을 사랑했다”고 전했다.
이형자 원장(훼불센터)과 요시다 코지 목사(일본인교회), 김경수 장로(미주 홀리클럽 회장)는 추모사를 전했다. 김경수 장로는 “1962년 김 목사님의 인도로 예수를 믿게 됐는데, 김 목사님은 “나는 예수님 앞으로만 인도하고,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신다”고 말씀하셨었다. 1박2일 금식도 했고 남산에서 합창도 했었는데 큰 추억이 된다”고 했고, 요시다 코지 목사는 “김 목사님이 엑스플로 74 대회 때 일본 목회자와 성도 1천명을 초청하였었는데, 저도 그 곳에서 큰 목회적 전환기를 맞게 됐다. 이후 한일간 화해의 선교사로 가족과 함께 한국에 오게 됐다”고 밝혔다.
딸 김윤희 교수는 유족인사에서 “노년의 얼굴에 어린아이의 미소가 깃든 아버지의 영정이 참 멋있다. 생전 아버지는 이런 미소로 가족을 맞아 주셨다. 아버지는 1980~81년 간 매일 조선일보(2년)와 동아일보(1년)에 예수칼럼을 쓰셨는데,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생명력이 있는 칼럼이었다. 요즘에도 종종 아버지의 칼럼을 보는데 큰 힘이된다”고 회상했다.
고인의 육성메시지 청취 시간도 이어졌는데, 1979년 9월 2일 ‘비전이 없는 민족은 망한다’라는 주제의 설교로, “민족을 위한 에스더와 존 낙스의 기도를 해야 할 때다. 민족의 가슴이 되자. 순종하는 민족에게는 하나님께서 축복하신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는 예수 한국을 이루자”는 메시지였다.
이날 추모예배는 순서는 사회 주수일 장로(진새골사랑의집 이사장), 대표기도 김덕수 장로(전 해군 제독), 이지아 씨(CCC전국부총순장), 성경봉독 하은혜 권사(CCC 어머니순), 설교 이만신 목사, 약력소개 남상옥 회장(한국아브노바), 추모사, 추모시 임만호 장로, 유족인사 김윤희 박사, 구호제창 홍근영 씨(CCC전국총순장), 축도 전병금 목사 순으로 진행됐다. 예배 이후에는 CCC비지니스장학금을 수여식이 진행됐다.
내빈으로는 길자연 목사(전 한기총 대표회장, 왕성교회), 김성진 목사(예장합동 증경총회장), 홍정이 목사, 박진탁 목사(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장), 안준배 목사(한교연사무총장), 김성영 목사(전 성결대 총장) 등이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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