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살다보니 만나는 한인들은 다들 고향을 떠난 사람들입니다. 미국에 영구적으로 거주할 목적으로 왔든, 유학처럼 단기 체류를 목적으로 하든, 하여튼 고향을 떠난 사람들입니다. 그 중에는 오랫동안 심사숙고해서 계획에 따라 온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아니면 즉흥적으로 미국에서 한번 살아볼까 하는 생각으로 온 사람도 있을 것이고, 또는 갑작스럽게 계획이 변경되어 미국에 체류하게 된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런데 주변에서 흔히 보지만 미국에서는 여자들보다는 남자들이 훨씬 더 힘든 삶을 사는 것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영어를 배우는 것도 여자들이 더 뛰어난 것 같고, 직업을 갖고 적응하는 것도 그렇고, 특별히 전문직에 종사하고 있지 않고 개인 비지니스를 하고 있지 않은 경우, 여자들에 비해서 남자들이 직장을 구하기가 훨씬 힘듭니다. 미국을 향하여 첫 발을 내딛었을 때의 자신감도 세월이 흐르면서 퇴색되어 가지요?
그래서 그런지 미국에 왜 왔는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 앞에 길을 잃어버리는 사람들이 늘어납니다. 경기라도 좋고 직장이라도 안정적이고 하면 왜 이민을 왔는가 하는 질문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지낼 수 있겠지만, 요즘처럼 실업률은 오르고 직장 잡기는 힘들고 혹 아내는 일을 하는데 남편은 백수라도 되면, 스트레스 엄청 받을 것이고 그러면 그 질문, 왜 미국까지 와서 내가 이렇게 살아야만 하는가 하는 질문 앞에서 모든 것을 잃고 방황하게 됩니다.
그때 그 꼬심에 넘어가지 말았어야 한다든지, 그때 기분 나쁘다고 회사에 사표를 던지는게 아니었다든지, 이제와서 하는 말이지만 한국에서 아이들을 키웠어도 얼마든지 잘 키울 수 있는 거 아니었겠느냐든지 등등, 후회가 앞서고 때론 누군가를 원망하고 비난하는 마음이 불쑥 솟아오릅니다. 그래서 팔자가 어떻고 운명이 어떻고 해가면서 스스로를 자위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스스로의 운명과 팔자를 안주삼아 씹고, 누군가에게 손가락질을 해서 마음이 풀리면 그나마 다행이겠지만, 우리가 잘 알다시피 그렇게 해서 우리 마음의 불편함과 어둠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잊을만 하면 또 나오고, 잊을만 하면 또 나와서 우리의 마음을 진탕시킬 뿐입니다.
이런 식의 사고방식이 가능한 까닭은, 내 삶을 정직하게 대면하려고 하는 용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의 인생은 내가 결정하고 내가 선택한 것입니다. 유혹 때문에 왔건 도망쳐서 왔건 잠시 왔다가 돌아가려고 했는데 그냥 눌러 앉게 되었건, 지금 내 삶은 내가 선택한 것입니다. 누군가 다른 사람 때문에 지금 내가 여기 있게 되었다고, 혹시 그때 그 사람만 아니었으면 지금 내 형편이 요모양 요꼴은 아닐 거라고 – 그렇게 변명해봐야 아무 것도 변하지 않습니다. 점점 더 초라해질 뿐입니다.
그렇게 변명만 일삼는다면, 여전히 내 삶은 나 자신과 상관없이 떠내려 가는 삶입니다. 물살을 거슬러 치고 올라갈 것인지, 그저 물살에 떠밀려 갈 것인지 – 그건 내가 선택합니다. 특별히 우리 문화는 물살에 떠밀려 가는 것이 유행처럼 흔합니다. 오래 전 이야기지만, 제가 한국에 갔을 때 놀랐던 것 중에 하나는, 길거리를 지나는 여자들이 다 그 얼굴에 그 얼굴이었습니다. 헤어스타일도 비슷비슷하고 옷차림도 얼굴모습도 다들 비슷비슷하더라고요! 누가 뭘 가졌다 하면 다 그걸 가져야 하고, 누가 뭘 들었다 하면 다들 그걸 들어야 하고, 우리네 처럼 유행을 타고 우리네 처럼 떠밀려 가기를 잘 하는 민족이 또 있을까요?
떠밀려 사는 삶의 가장 큰 특징은 – 하루하루가 무력하다는 것입니다. 힘들지 않은 인생이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스스로 자신의 삶을 선택하는 인생과 떠밀려 사는 인생은 – 그 힘들다는 것이 전혀 다릅니다. 사실 우리네 인생에서 무엇인가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누구나 힘든 시간을 지나가야 합니다. 한 분야에서 일정한 성취를 이루기 위해서도 땀을 흘려야 하는 시간이 요구되고, 하다 못해 산꼭대기에 오르려고 해도 땀을 흘리며 헉헉대는 시간을 지나가야 합니다. 이러한 시간은 비록 힘은 들지만, 얼굴에 웃음을 띠며 지나갈 수 있는 힘듬이라고 한다면, 그저 시류에 떠밀리고 유행에 떠밀리고 원망과 불평에 떠밀려 사는 인생은, 저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오는 무력감으로 인해서 결코 웃을 수 없는, 참으로 힘들고 불쌍한 인생입니다.
인생은 하루하루입니다. 즉 내 인생이 내 스스로 결정한 선택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삶인지, 아니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하루하루 떠밀려가는 삶인지 – 오늘 하루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성령 하나님으로 인해 환란과 핍박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면서도 예루살렘을 향해 한걸음 한걸음 내어딛는 사도 바울은 (행 20장) – 결코 그 무엇에 의해서도 떠밀려 갈 수 없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십자가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내가 스스로 선택한 삶입니다. 누구누구 때문에, 뭐뭐 때문에 나는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다고……
아닙니다. 떠내려 가는 삶도 내가 선택한 삶입니다. 미국에 발을 디딘 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내가 스스로 선택한 것입니다. 오늘 하루 떠밀려 발걸음을 옮겼든, 스스로 한걸음 한걸음 내어디뎠든, 내가 선택한 것입니다. 감사와 찬양도 내가 선택한 것이요, 불평과 원망도 내가 선택한 것입니다. 무엇을 선택했느냐에 따라, 결과는 하늘과 땅만큼 다릅니다. 불평과 원망 가운데 떠밀려 가는 삶을 거부하고 매일매일 하나님보시기에 선한 것으로 채워 넣는 것 – 이것은 오직 용기있는 자들의 선택입니다.
그런데 주변에서 흔히 보지만 미국에서는 여자들보다는 남자들이 훨씬 더 힘든 삶을 사는 것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영어를 배우는 것도 여자들이 더 뛰어난 것 같고, 직업을 갖고 적응하는 것도 그렇고, 특별히 전문직에 종사하고 있지 않고 개인 비지니스를 하고 있지 않은 경우, 여자들에 비해서 남자들이 직장을 구하기가 훨씬 힘듭니다. 미국을 향하여 첫 발을 내딛었을 때의 자신감도 세월이 흐르면서 퇴색되어 가지요?
그래서 그런지 미국에 왜 왔는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 앞에 길을 잃어버리는 사람들이 늘어납니다. 경기라도 좋고 직장이라도 안정적이고 하면 왜 이민을 왔는가 하는 질문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지낼 수 있겠지만, 요즘처럼 실업률은 오르고 직장 잡기는 힘들고 혹 아내는 일을 하는데 남편은 백수라도 되면, 스트레스 엄청 받을 것이고 그러면 그 질문, 왜 미국까지 와서 내가 이렇게 살아야만 하는가 하는 질문 앞에서 모든 것을 잃고 방황하게 됩니다.
그때 그 꼬심에 넘어가지 말았어야 한다든지, 그때 기분 나쁘다고 회사에 사표를 던지는게 아니었다든지, 이제와서 하는 말이지만 한국에서 아이들을 키웠어도 얼마든지 잘 키울 수 있는 거 아니었겠느냐든지 등등, 후회가 앞서고 때론 누군가를 원망하고 비난하는 마음이 불쑥 솟아오릅니다. 그래서 팔자가 어떻고 운명이 어떻고 해가면서 스스로를 자위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스스로의 운명과 팔자를 안주삼아 씹고, 누군가에게 손가락질을 해서 마음이 풀리면 그나마 다행이겠지만, 우리가 잘 알다시피 그렇게 해서 우리 마음의 불편함과 어둠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잊을만 하면 또 나오고, 잊을만 하면 또 나와서 우리의 마음을 진탕시킬 뿐입니다.
이런 식의 사고방식이 가능한 까닭은, 내 삶을 정직하게 대면하려고 하는 용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의 인생은 내가 결정하고 내가 선택한 것입니다. 유혹 때문에 왔건 도망쳐서 왔건 잠시 왔다가 돌아가려고 했는데 그냥 눌러 앉게 되었건, 지금 내 삶은 내가 선택한 것입니다. 누군가 다른 사람 때문에 지금 내가 여기 있게 되었다고, 혹시 그때 그 사람만 아니었으면 지금 내 형편이 요모양 요꼴은 아닐 거라고 – 그렇게 변명해봐야 아무 것도 변하지 않습니다. 점점 더 초라해질 뿐입니다.
그렇게 변명만 일삼는다면, 여전히 내 삶은 나 자신과 상관없이 떠내려 가는 삶입니다. 물살을 거슬러 치고 올라갈 것인지, 그저 물살에 떠밀려 갈 것인지 – 그건 내가 선택합니다. 특별히 우리 문화는 물살에 떠밀려 가는 것이 유행처럼 흔합니다. 오래 전 이야기지만, 제가 한국에 갔을 때 놀랐던 것 중에 하나는, 길거리를 지나는 여자들이 다 그 얼굴에 그 얼굴이었습니다. 헤어스타일도 비슷비슷하고 옷차림도 얼굴모습도 다들 비슷비슷하더라고요! 누가 뭘 가졌다 하면 다 그걸 가져야 하고, 누가 뭘 들었다 하면 다들 그걸 들어야 하고, 우리네 처럼 유행을 타고 우리네 처럼 떠밀려 가기를 잘 하는 민족이 또 있을까요?
떠밀려 사는 삶의 가장 큰 특징은 – 하루하루가 무력하다는 것입니다. 힘들지 않은 인생이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스스로 자신의 삶을 선택하는 인생과 떠밀려 사는 인생은 – 그 힘들다는 것이 전혀 다릅니다. 사실 우리네 인생에서 무엇인가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누구나 힘든 시간을 지나가야 합니다. 한 분야에서 일정한 성취를 이루기 위해서도 땀을 흘려야 하는 시간이 요구되고, 하다 못해 산꼭대기에 오르려고 해도 땀을 흘리며 헉헉대는 시간을 지나가야 합니다. 이러한 시간은 비록 힘은 들지만, 얼굴에 웃음을 띠며 지나갈 수 있는 힘듬이라고 한다면, 그저 시류에 떠밀리고 유행에 떠밀리고 원망과 불평에 떠밀려 사는 인생은, 저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오는 무력감으로 인해서 결코 웃을 수 없는, 참으로 힘들고 불쌍한 인생입니다.
인생은 하루하루입니다. 즉 내 인생이 내 스스로 결정한 선택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삶인지, 아니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하루하루 떠밀려가는 삶인지 – 오늘 하루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성령 하나님으로 인해 환란과 핍박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면서도 예루살렘을 향해 한걸음 한걸음 내어딛는 사도 바울은 (행 20장) – 결코 그 무엇에 의해서도 떠밀려 갈 수 없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십자가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내가 스스로 선택한 삶입니다. 누구누구 때문에, 뭐뭐 때문에 나는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다고……
아닙니다. 떠내려 가는 삶도 내가 선택한 삶입니다. 미국에 발을 디딘 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내가 스스로 선택한 것입니다. 오늘 하루 떠밀려 발걸음을 옮겼든, 스스로 한걸음 한걸음 내어디뎠든, 내가 선택한 것입니다. 감사와 찬양도 내가 선택한 것이요, 불평과 원망도 내가 선택한 것입니다. 무엇을 선택했느냐에 따라, 결과는 하늘과 땅만큼 다릅니다. 불평과 원망 가운데 떠밀려 가는 삶을 거부하고 매일매일 하나님보시기에 선한 것으로 채워 넣는 것 – 이것은 오직 용기있는 자들의 선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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