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후13:4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 5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1. 뿌리 깊은 믿음
고린도교회를 사도 바울이 세웠고 바울을 통하여 많은 은혜를 받았던 고린도교회 사람들은 훗날 이단에 휩쓸리며 영적인 기대심리보다는 육신의 명분과 이권을 챙기고 사람을 하나님보다 더 의식하며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거나 대접받는 것을 더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신앙은 영적인 소망은 간 곳이 없고 믿지 않는 사람들과 같은 육체뿐인 인간들로 전락해 버린 고린도교회에 사도 바울이 크게 실망할 만한 일이 두 가지 있었습니다. 그 첫째는 눈물로 기도하며 애간장 태우는 수고를 통하여 가꾸어 준 영적 소망이 물거품처럼 꺼져 버린 안타까움이었고, 또 그들이 이단들의 꾐에 빠져 극히 인간적이고 세속적이며 육적인 상태로 변질되고 그 모든 영적 소망이 헛것이 됐을 때 바울은 너무나 실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때로는 자신이 더 고통을 치르고 어려움을 겪더라도 그 수고의 성과로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받게 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진액을 다하는 것이 믿음의 뿌리를 확실하게 하나님께 둔 사명자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런데, 양떼들의 믿음의 뿌리가 하늘에 있지 아니하고 세상과 육신, 물질에 있다는 것을 보게 될 때 그의 지옥 갈 불행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수고가 헛수고가 되고 만 것에 허탈감을 느끼며 통곡하는 것이 목자의 심정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교회의 일꾼을 세우자고 할 때 그의 믿음의 뿌리가 어디 있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고 선교를 할 때도 그 사람의 믿음의 뿌리가 과연 예수님께 있는지 아니면 자기 기대심리에 의해서 세상에 뿌리를 내린 것이 아닌지를 잘 검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포도나무라고 하는 교회의 뿌리가 진리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성령으로 깊이 박힌 뿌리라고 하면 이 나무는 세상 어떤 환란, 풍파에도 절대로 죽지 않을 것입니다. 메마르지도 않고 그 가지는 푸르고 싱싱하여 각 지역으로, 세계로 뻗어나가 모든 나라, 모든 민족들로 구원의 열매를 맺어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가지가 뻗어 가다가 병충해를 입거나 다른 환경적 요인으로 인하여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가지된 우리는 제각기 진리 안에서 영적으로 자기 믿음을 지키고 그 믿음으로 계속 성장해야 하는데 그것은 더욱 많은 열매를 맺어 드려야 하는 사명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자신들의 믿음의 뿌리를 점검해 보았으면 합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3년 동안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았던 가룟 유다는 한 번도 예수님께 믿음을 가지고 의지하거나 기대해 본 일이 없었습니다. 순전히 이용가치의 대상으로만 여겨 왔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마귀의 꾐에 속아 예수님을 파는 일도 서슴지 않았고 그 돈을 써보지도 못한 채 자살해 지옥에 가야 하는 불행한 종말을 재촉하고 맙니다. 이것은 곧 믿음의 뿌리가 예수님께 있지 아니하고 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의도적으로 상당히 심각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2.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요15:16)”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택함을 받았으나 하나님과 연합할 수 없다면 삶의 목적과 방법, 인간성, 선천적이거나 후천적인 어떤 것들도 체질개선하여 하나님과 연합할 수 있는 상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포도나무에 접붙여졌을 때, 체질도 기질도 일치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뿌리로부터 예수님이 공급하시는 진액을 받아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생명나무가 되는 줄 믿습니다.
이런 사람은 예수님이 주관하시는 삶으로 스스로 죽고 싶어도 그렇지 못할 것이며, 누군가로부터 해를 받아 죽을 지경이 되어도 생명싸개로 덮어 막아 주실 것입니다. 다윗이 블레셋 장수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다윗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승리한 것 같이 그 뿌리를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 “시몬아, 시몬아, 사탄이 너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내게 청구했으나 내가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위하여 기도했기 때문에 네가 돌이킨 후에 형제들을 굳게 세우도록 하라” 하셨습니다. 사탄이 수제자인 베드로를 혼을 빼서 예수님 부인하고 지옥가게 해보겠다고 예수님께 청구를 했을 때 예수님은 사탄에게 “안된다”고 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기도를 하셨습니다. 우리는 나약함으로 일관하는 안주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어리석은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이 사탄에게 내어줄 때는 사탄이 그를 죽이라고 내어주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뿌리는 예수님이 붙들고 계시면서 사람만 내어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베드로를 사탄에게 내어준다 한들 베드로의 믿음의 뿌리는 예수님이 쥐고 계시기 때문에 그가 지옥에 떨어지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말씀과 같이 예수님이 붙잡혀 가시던 날 밤 베드로는 예수님을 저주하며 부인하는 죄를 지었으나 그 믿음의 뿌리는 예수님께 붙잡혀 있었기 때문에 가야바 뒤뜰에서 두드려 맞고 피투성이가 된 예수님이 새벽녘에 다시 끌려가시는 과정에서 예수님을 부인하고 시험에 빠져있던 베드로의 눈과 마주칠 때 닭 울음소리와 함께 정신을 차릴 수 있었습니다. 그 후 베드로의 깊은 회개는 그 믿음의 뿌리가 예수님께 박혀 있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사탄이 베드로로 시험이 들게까지는 할 수 있었으나 지옥에 쓰러뜨릴 수 없었던 것은 베드로의 믿음의 뿌리를 예수님이 놓지 않으셨기 때문임을 믿습니다. 그 체험을 통해 베드로의 믿음은 차원이 달라졌습니다.
3. 믿음의 지배 아래에서 삶의 균형을
우리가 살아도 그분을 위해 살고 죽어도 그분을 위해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은 사나 죽으나 나라는 존재는 영원히 그분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환란과 핍박, 고통과 죽음이 와도 믿음의 뿌리를 의지하고 파고들 수 밖에 없는 것은 내 영원한 생명의 근본이 바로 예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도 그랬습니다. 자신이 세워 애지중지 가꾸었던 고린도 교회가 영적으로 충만했는데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그는 다른 지역 선교를 떠나고 베드로와 아볼로가 다녀간 후 고린도교회가 완전히 영적으로 변질되고 인간적으로 변해 누가 더 실세를 가졌는지를 놓고 다툴 정도로 교회가 마귀소굴로 변해 버렸습니다. 이것은 사람들마다 믿음의 뿌리가 예수님께 있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을 난도질하고 교회가 엉망진창이 되더라도 자기명분과 실속은 끝까지 챙기고 말겠다는 목사님들도 더러 있습니다. 그것은 그 믿음의 뿌리가 의심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믿음의 뿌리를 예수님께 두고 있다면 자신이 어떠한 희생과 피해를 보고 고통을 겪더라도 절대로 그 생명의 뿌리 되는 예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잃어 버리고 죽임을 당한다 하더라도 주님을 욕되게 하는 일을 절대로 할 수 없다고 할 때 예수님 때문에 사는, 예수님께 뿌리를 굳게 내리고 사는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자신의 믿음의 뿌리를 재확인하며 다른 사람의 믿음의 뿌리도 점검해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믿음의 뿌리가 예수님께 확실히 박힌 사람과 어울리면 내 영적 신앙에 큰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믿음의 뿌리 없는 예수님과 상관없는 자라면 그 사람과 더 이상 친분을 나눌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과 함께 자신도 멸망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정신 차리고 돌아서야 하는 것입니다.
5절에서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시작과 계획부터 결실 추수 때까지 우리 믿음을 가꾸십니다. 로마서 9:16-18에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 사람이 원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고 택하시고 구원하셔서 하늘나라 후사로 삼기 위한 집념어린 성령의 역사하신 결과인 줄 믿습니다. 이것이 장로교 5대 교리중 불가항력적 은혜라고 합니다. 불가항력이라는 것은 내가 저항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라야 섬김의 자세가 올바를 수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직분을 얻고 환심을 사기 위해 눈치를 보며 섬기는 척, 기도를 많이 하는 척, 봉사하는 척, 전도도 중심없이 돈으로 사람을 끌어다 놓는 식으로 하기도 합니다. 올바른 믿음의 사람은 내 입장보다는 예수님의 입장을 먼저 생각합니다. 내 기쁨보다는 예수님의 기쁨을 먼저 서두르고, 어떤 희생과 수고와, 고통을 겪더라도 주님이 기뻐하실 듯한 가능성이 보이면 자기를 온전히 희생하면서 주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기쁨과 감사와 찬송으로 섬기는 제물이 되자고 몸부림치는 모습이 진짜로 믿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런 믿음을 가집시다. 그리고 이런 믿음 가진 자들을 교회의 직분자로 세우면 그 교회는 은혜가 충만하고 진리가 정통하고 성령이 불붙는 교회로 엄청난 속도로 자라나서 오대양 육대주의 택하신 백성들을 열매로 맺어 드릴 수 있게 될 줄 믿습니다. 선교는 사명이며 예수님의 소원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들의 믿음의 뿌리부터 진리 안에 확실히 거듭나서 부활의 주님과 온전히 연합해 말씀에 깊이 주님과 더불어 뿌리내리는 믿음이 승리하는 믿음, 성공적인 믿음, 하나님 앞에 더 크게 쓰임 받는 믿음, 더 잘 섬기는 기쁨으로 영광스러운 결실을 기대할 수 있는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1. 뿌리 깊은 믿음
고린도교회를 사도 바울이 세웠고 바울을 통하여 많은 은혜를 받았던 고린도교회 사람들은 훗날 이단에 휩쓸리며 영적인 기대심리보다는 육신의 명분과 이권을 챙기고 사람을 하나님보다 더 의식하며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거나 대접받는 것을 더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신앙은 영적인 소망은 간 곳이 없고 믿지 않는 사람들과 같은 육체뿐인 인간들로 전락해 버린 고린도교회에 사도 바울이 크게 실망할 만한 일이 두 가지 있었습니다. 그 첫째는 눈물로 기도하며 애간장 태우는 수고를 통하여 가꾸어 준 영적 소망이 물거품처럼 꺼져 버린 안타까움이었고, 또 그들이 이단들의 꾐에 빠져 극히 인간적이고 세속적이며 육적인 상태로 변질되고 그 모든 영적 소망이 헛것이 됐을 때 바울은 너무나 실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때로는 자신이 더 고통을 치르고 어려움을 겪더라도 그 수고의 성과로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받게 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진액을 다하는 것이 믿음의 뿌리를 확실하게 하나님께 둔 사명자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런데, 양떼들의 믿음의 뿌리가 하늘에 있지 아니하고 세상과 육신, 물질에 있다는 것을 보게 될 때 그의 지옥 갈 불행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수고가 헛수고가 되고 만 것에 허탈감을 느끼며 통곡하는 것이 목자의 심정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교회의 일꾼을 세우자고 할 때 그의 믿음의 뿌리가 어디 있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고 선교를 할 때도 그 사람의 믿음의 뿌리가 과연 예수님께 있는지 아니면 자기 기대심리에 의해서 세상에 뿌리를 내린 것이 아닌지를 잘 검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포도나무라고 하는 교회의 뿌리가 진리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성령으로 깊이 박힌 뿌리라고 하면 이 나무는 세상 어떤 환란, 풍파에도 절대로 죽지 않을 것입니다. 메마르지도 않고 그 가지는 푸르고 싱싱하여 각 지역으로, 세계로 뻗어나가 모든 나라, 모든 민족들로 구원의 열매를 맺어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가지가 뻗어 가다가 병충해를 입거나 다른 환경적 요인으로 인하여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가지된 우리는 제각기 진리 안에서 영적으로 자기 믿음을 지키고 그 믿음으로 계속 성장해야 하는데 그것은 더욱 많은 열매를 맺어 드려야 하는 사명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자신들의 믿음의 뿌리를 점검해 보았으면 합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3년 동안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았던 가룟 유다는 한 번도 예수님께 믿음을 가지고 의지하거나 기대해 본 일이 없었습니다. 순전히 이용가치의 대상으로만 여겨 왔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마귀의 꾐에 속아 예수님을 파는 일도 서슴지 않았고 그 돈을 써보지도 못한 채 자살해 지옥에 가야 하는 불행한 종말을 재촉하고 맙니다. 이것은 곧 믿음의 뿌리가 예수님께 있지 아니하고 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의도적으로 상당히 심각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2.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요15:16)”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택함을 받았으나 하나님과 연합할 수 없다면 삶의 목적과 방법, 인간성, 선천적이거나 후천적인 어떤 것들도 체질개선하여 하나님과 연합할 수 있는 상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포도나무에 접붙여졌을 때, 체질도 기질도 일치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뿌리로부터 예수님이 공급하시는 진액을 받아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생명나무가 되는 줄 믿습니다.
이런 사람은 예수님이 주관하시는 삶으로 스스로 죽고 싶어도 그렇지 못할 것이며, 누군가로부터 해를 받아 죽을 지경이 되어도 생명싸개로 덮어 막아 주실 것입니다. 다윗이 블레셋 장수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다윗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승리한 것 같이 그 뿌리를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 “시몬아, 시몬아, 사탄이 너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내게 청구했으나 내가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위하여 기도했기 때문에 네가 돌이킨 후에 형제들을 굳게 세우도록 하라” 하셨습니다. 사탄이 수제자인 베드로를 혼을 빼서 예수님 부인하고 지옥가게 해보겠다고 예수님께 청구를 했을 때 예수님은 사탄에게 “안된다”고 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기도를 하셨습니다. 우리는 나약함으로 일관하는 안주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어리석은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이 사탄에게 내어줄 때는 사탄이 그를 죽이라고 내어주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뿌리는 예수님이 붙들고 계시면서 사람만 내어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베드로를 사탄에게 내어준다 한들 베드로의 믿음의 뿌리는 예수님이 쥐고 계시기 때문에 그가 지옥에 떨어지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말씀과 같이 예수님이 붙잡혀 가시던 날 밤 베드로는 예수님을 저주하며 부인하는 죄를 지었으나 그 믿음의 뿌리는 예수님께 붙잡혀 있었기 때문에 가야바 뒤뜰에서 두드려 맞고 피투성이가 된 예수님이 새벽녘에 다시 끌려가시는 과정에서 예수님을 부인하고 시험에 빠져있던 베드로의 눈과 마주칠 때 닭 울음소리와 함께 정신을 차릴 수 있었습니다. 그 후 베드로의 깊은 회개는 그 믿음의 뿌리가 예수님께 박혀 있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사탄이 베드로로 시험이 들게까지는 할 수 있었으나 지옥에 쓰러뜨릴 수 없었던 것은 베드로의 믿음의 뿌리를 예수님이 놓지 않으셨기 때문임을 믿습니다. 그 체험을 통해 베드로의 믿음은 차원이 달라졌습니다.
3. 믿음의 지배 아래에서 삶의 균형을
우리가 살아도 그분을 위해 살고 죽어도 그분을 위해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은 사나 죽으나 나라는 존재는 영원히 그분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환란과 핍박, 고통과 죽음이 와도 믿음의 뿌리를 의지하고 파고들 수 밖에 없는 것은 내 영원한 생명의 근본이 바로 예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도 그랬습니다. 자신이 세워 애지중지 가꾸었던 고린도 교회가 영적으로 충만했는데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그는 다른 지역 선교를 떠나고 베드로와 아볼로가 다녀간 후 고린도교회가 완전히 영적으로 변질되고 인간적으로 변해 누가 더 실세를 가졌는지를 놓고 다툴 정도로 교회가 마귀소굴로 변해 버렸습니다. 이것은 사람들마다 믿음의 뿌리가 예수님께 있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을 난도질하고 교회가 엉망진창이 되더라도 자기명분과 실속은 끝까지 챙기고 말겠다는 목사님들도 더러 있습니다. 그것은 그 믿음의 뿌리가 의심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믿음의 뿌리를 예수님께 두고 있다면 자신이 어떠한 희생과 피해를 보고 고통을 겪더라도 절대로 그 생명의 뿌리 되는 예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잃어 버리고 죽임을 당한다 하더라도 주님을 욕되게 하는 일을 절대로 할 수 없다고 할 때 예수님 때문에 사는, 예수님께 뿌리를 굳게 내리고 사는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자신의 믿음의 뿌리를 재확인하며 다른 사람의 믿음의 뿌리도 점검해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믿음의 뿌리가 예수님께 확실히 박힌 사람과 어울리면 내 영적 신앙에 큰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믿음의 뿌리 없는 예수님과 상관없는 자라면 그 사람과 더 이상 친분을 나눌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과 함께 자신도 멸망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정신 차리고 돌아서야 하는 것입니다.
5절에서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시작과 계획부터 결실 추수 때까지 우리 믿음을 가꾸십니다. 로마서 9:16-18에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 사람이 원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고 택하시고 구원하셔서 하늘나라 후사로 삼기 위한 집념어린 성령의 역사하신 결과인 줄 믿습니다. 이것이 장로교 5대 교리중 불가항력적 은혜라고 합니다. 불가항력이라는 것은 내가 저항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라야 섬김의 자세가 올바를 수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직분을 얻고 환심을 사기 위해 눈치를 보며 섬기는 척, 기도를 많이 하는 척, 봉사하는 척, 전도도 중심없이 돈으로 사람을 끌어다 놓는 식으로 하기도 합니다. 올바른 믿음의 사람은 내 입장보다는 예수님의 입장을 먼저 생각합니다. 내 기쁨보다는 예수님의 기쁨을 먼저 서두르고, 어떤 희생과 수고와, 고통을 겪더라도 주님이 기뻐하실 듯한 가능성이 보이면 자기를 온전히 희생하면서 주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기쁨과 감사와 찬송으로 섬기는 제물이 되자고 몸부림치는 모습이 진짜로 믿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런 믿음을 가집시다. 그리고 이런 믿음 가진 자들을 교회의 직분자로 세우면 그 교회는 은혜가 충만하고 진리가 정통하고 성령이 불붙는 교회로 엄청난 속도로 자라나서 오대양 육대주의 택하신 백성들을 열매로 맺어 드릴 수 있게 될 줄 믿습니다. 선교는 사명이며 예수님의 소원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들의 믿음의 뿌리부터 진리 안에 확실히 거듭나서 부활의 주님과 온전히 연합해 말씀에 깊이 주님과 더불어 뿌리내리는 믿음이 승리하는 믿음, 성공적인 믿음, 하나님 앞에 더 크게 쓰임 받는 믿음, 더 잘 섬기는 기쁨으로 영광스러운 결실을 기대할 수 있는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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