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 때에는 사망도 애통도 곡하는 것도 아픈 것도 다시는 있지 않게 된다고 약속되어 있습니다(계 21:1-4). 그래서 우리 모든 신자들은 그날이 어서 속히 오기만을 전심으로 기다리게 됩니다.

그런데 그 말씀 안에는, 그 날이 오기 전까지는 그러한 어려움들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는 의미도 들어있습니다. 결국 신자들 역시 모두 이런저런 어려움들을 겪으면서 인생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 어려움에는 불안도 포함됩니다. 결국 사람이라면, 단지 양과 질에서 차이가 있을 뿐, 누구나 불안을 경험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불안 연구의 대가인 기독교 심리학자 하트(Archibald Hart) 박사는 자신의 책 「The Anxiety Cure」에서 불안은 누구도 피할 수 없으며(inevitable), 모든 사람들은 불안에 빠지기 쉬운 경향성(proneness)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참으로 불안은 우리의 전 인생을 따라다니는 반갑지 않은 인생의 동반자인 셈입니다.

일상적인 수준에서 가볍게/잠시 불안을 경험하는 것은 오히려 삶을 나태하지 않고 긴장하며 최선을 다해 살아가도록 도와줍니다. 하지만 문제는 심한/만성적 불안입니다. 불안이 적당한 정도를 지나쳐서 과도하게 엄습해 오면, 닥쳐온 어려움들을 건강하고 효과적으로 극복하는 것을 방해하게 됩니다. 그러면 소위 말하는 불안 장애(anxiety disorder)에 이르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많은 사람들이 적당한(moderate) 수준에서가 아니라, 삶에 해를 끼치는 장애(disorder) 수준에서의 과도한(excessive) 불안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통계에 의하면, 미국에서는 불안 장애가 여러 정신 질환들 가운데 발병 빈도가 가장 높습니다(the most common mental illness).

확률적으로는 전체 인구의 약 18% 정도가, 그래서 환산하면 약 4천만 명이 불안 장애에 시달리는 것으로 보고됩니다. 즉, 10명 가운데 거의 2명은 불안 장애를 겪고 있는 셈입니다. 이것을 치료하는데 들어가는 비용도 1년에 무려 420억 달러 이상입니다.

그런데 만일 정상의 기준을 불안의 유무 자체에만 둔다면, 불안이 완전히 없는 질서정연한 상태만 정상이 됩니다. 그리고 반대로 불안이 조금이라도 존재한다면, 그것은 비정상(dis-order)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어떤 사람에게 단지 불안이 존재한다고 해서 그 사람을 바로 불안 장애(anxiety disorder)에 시달리고 있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만일 자신에게 불안이 존재한다고 해서 ‘나는 불안 장애가 있어’라고 바로 확정적인 판결을 내려버린다면, 그것은 성급한 진단이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육체에 찾아오는 여러 가지 증상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정신에 찾아오는 증상들 역시 정확하게 진단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많은 데이터를 모아서 세심하게 관찰해야 합니다. 또한 결과적으로 나타나는 증상이 동일하게 불안이라고 할지라도, 그 불안이 나타나게 된 원인은 사람마다 매우 다양할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적당한 불안과 과도한 불안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요? 이를테면, 나에게 있는 불안감이 매일의 삶에 일상적으로 생겼다가 사라지는 ‘적당한’ 수준의 불안인지, 아니면 어느 정도의 보살핌이 필요한 수준인지, 아니면 치료가 필요한 수준의 불안인지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요?

김재덕 목사는 총신대학교(B.A.)와 연세대학교(B.A.) 및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M.Div.)을 나와, 미국 리버티대학교(Th.M., Ph.D.)에서 목회상담(Pastoral Care and Counseling)을 전공했다. 현재 리버티대학교 상담학과 교수(Assistant Professor)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