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를 하는 목사로서 목회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서슴없이“예배”라고 답을 합니다. 그리고 이 대답은 목회를 하는 목사로서만이 아니라 한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도 그 소중함은 덜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배는 언제 어디서 누구와 드리든지 소중하지만 그중에서도 마음에 많이 와 닿는 예배 경험은 아무래도 새벽에 드리는 예배가 아닌가 싶습니다.
하루를 시작하면서 드리는 새벽예배가 귀한 것은 하루 중 해야 할 수많은 말들에 앞서 주님께 가장 먼저 입을 열어 찬양하고, 하루 동안 들려올 수많은 말을 듣기 전에 주님의 말씀을 먼저 귀로 듣고, 어느 곳을 가기 전 먼저 주님의 처소를 향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간 교계신문을 읽다가 최근에 헌법재판소 재판관으로 재직하다 퇴임한 조대현 장로(개포감리교회)가 재판관으로 재직하면서 자신에게 맡겨진 재판을 어떻게 판단해야할지를 매일 새벽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지혜를 깨달았다는 이야기를 읽고, 혹시 여러분의 새벽예배 생활에 도움이 될까 싶은 마음으로 인용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갈라디아 2:20)
헌법재판소 재판관으로 재직하고 지난 5월에 퇴임한 조대현장로(개포감리교회)가 지금까지 인도해주신 하나님께‘앞으로 뭐하고 살까요?’하고 물었을 때, 대답으로 주신 말씀이다. 그 대답을 들은 후,‘하나님, 이제는 내 생각도 없고, 내 의지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마음과 생각을 완전히 가져가세요.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세요’라고 기도했다.‘저의 계획을 굳이 말하라면 이거라고 할 수 있겠죠. 내 뜻이 아닌 하나님 뜻대로 사는 것’- 조대현 장로는 헌법재판관으로 있던 지난 6년간 매일 교회에 나가 새벽기도를 드리며 하나님께‘자문’을 구했다.
1951년 충남 부여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를 어렵사리 마칠 수 있었다. 가정형편 때문에 중학교 진학을 꿈도 꾸지 못했다.‘아버지와 함께 일평생 농사를 짓자’는 게 어린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선생님을 통해 아버지를 학교로 불러내시고 저를 꼭 중학교에 보내야 한다고 강력하게 권하셨어요. 저의 상황을 뛰어넘어서는 방향으로 저를 인도하신 겁니다. 그 결과 중학교 3년 동안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고등학교는 서울에서 다녔다. 아들이 공부를 잘하자, 아예 아버지 어머니는 짐을 싸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 아버지는 공장에 다니고, 어머니는 행상을 하며 그를 뒷바라지했다. 부모가 고생하는 걸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어 그는 당시 학비가 면제였던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려 했다. “이번엔 학교(용산고)에서 ‘너는 서울대를 가서 우리 학교를 빛내라’며 법대에 들어갈 것을 권했습니다. 그리고 한 기업체에 장학생으로 저를 추천했습니다. 대학 4년 동안 장학금을 받고 공부할 수 있게 됐어요. 이때도 하나님은 저의 환경을 뛰어넘게 하셨죠.”
2005년 헌법재판관이 된 것도 뜻하지 않은 인도하심이었다. 법무법인 화우 변호사였던 2004년, 당시 노무현 대통령 탄핵 재판에 대리인으로 나섰다가 기각을 이끌어냈다. 이듬해 여당 추천으로 헌법재판관 후보가 됐지만, 노 대통령을 변호했다는 이유로 야당의 거센 반대에 부닥쳤다. 찬성 146표, 반대 103표.‘간신히’헌법재판소 재판관이 됐다. 처음엔 무척 힘들었다. 다른 재판관들과 의견이 달라 고민을 많이 했다.‘내가 과연 재판관 자질이 있는가?’‘가치관이 잘못된 것인가?’너무 힘들어 그만둘 생각까지도 했다.
매일 새벽예배에 나가‘나는 왜 남들과 생각이 다르냐’고 하나님께 따지기도 했다. 그런데 문득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 생겼다.“그럼 내가 너에게 재판관을 시킨 게 잘못이란 말이냐”하나님의 음성은 단호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이 말씀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재판관의 사명을 주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역사상 소수의견을 가장 많이 낸 재판관이 됐다. 6년간 358건에 이른다. 아쉬움도 남는다고 했다. 미디어법을 날치기 처리한 것에 대해 무효 선언을 못한 것, 사립학교의 학생 선발권을 회복시키지 못한 것, 자식까지 낳고 살았는데 위장 결혼했다고 남편으로부터 소송을 당한 중국교포 여성의 억울함을 풀어주지 못한 사건 등이다. 조 장로는“하나님은 법률이나 국가권력 행사가 부당한 것을 지적하라고 나를 헌재로 보내신 것 같다”며 “국민의 입장에서 생각한 의견을 발표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었다”고 말했다.
하루를 시작하면서 드리는 새벽예배가 귀한 것은 하루 중 해야 할 수많은 말들에 앞서 주님께 가장 먼저 입을 열어 찬양하고, 하루 동안 들려올 수많은 말을 듣기 전에 주님의 말씀을 먼저 귀로 듣고, 어느 곳을 가기 전 먼저 주님의 처소를 향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간 교계신문을 읽다가 최근에 헌법재판소 재판관으로 재직하다 퇴임한 조대현 장로(개포감리교회)가 재판관으로 재직하면서 자신에게 맡겨진 재판을 어떻게 판단해야할지를 매일 새벽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지혜를 깨달았다는 이야기를 읽고, 혹시 여러분의 새벽예배 생활에 도움이 될까 싶은 마음으로 인용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갈라디아 2:20)
헌법재판소 재판관으로 재직하고 지난 5월에 퇴임한 조대현장로(개포감리교회)가 지금까지 인도해주신 하나님께‘앞으로 뭐하고 살까요?’하고 물었을 때, 대답으로 주신 말씀이다. 그 대답을 들은 후,‘하나님, 이제는 내 생각도 없고, 내 의지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마음과 생각을 완전히 가져가세요.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세요’라고 기도했다.‘저의 계획을 굳이 말하라면 이거라고 할 수 있겠죠. 내 뜻이 아닌 하나님 뜻대로 사는 것’- 조대현 장로는 헌법재판관으로 있던 지난 6년간 매일 교회에 나가 새벽기도를 드리며 하나님께‘자문’을 구했다.
1951년 충남 부여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를 어렵사리 마칠 수 있었다. 가정형편 때문에 중학교 진학을 꿈도 꾸지 못했다.‘아버지와 함께 일평생 농사를 짓자’는 게 어린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선생님을 통해 아버지를 학교로 불러내시고 저를 꼭 중학교에 보내야 한다고 강력하게 권하셨어요. 저의 상황을 뛰어넘어서는 방향으로 저를 인도하신 겁니다. 그 결과 중학교 3년 동안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고등학교는 서울에서 다녔다. 아들이 공부를 잘하자, 아예 아버지 어머니는 짐을 싸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 아버지는 공장에 다니고, 어머니는 행상을 하며 그를 뒷바라지했다. 부모가 고생하는 걸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어 그는 당시 학비가 면제였던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려 했다. “이번엔 학교(용산고)에서 ‘너는 서울대를 가서 우리 학교를 빛내라’며 법대에 들어갈 것을 권했습니다. 그리고 한 기업체에 장학생으로 저를 추천했습니다. 대학 4년 동안 장학금을 받고 공부할 수 있게 됐어요. 이때도 하나님은 저의 환경을 뛰어넘게 하셨죠.”
2005년 헌법재판관이 된 것도 뜻하지 않은 인도하심이었다. 법무법인 화우 변호사였던 2004년, 당시 노무현 대통령 탄핵 재판에 대리인으로 나섰다가 기각을 이끌어냈다. 이듬해 여당 추천으로 헌법재판관 후보가 됐지만, 노 대통령을 변호했다는 이유로 야당의 거센 반대에 부닥쳤다. 찬성 146표, 반대 103표.‘간신히’헌법재판소 재판관이 됐다. 처음엔 무척 힘들었다. 다른 재판관들과 의견이 달라 고민을 많이 했다.‘내가 과연 재판관 자질이 있는가?’‘가치관이 잘못된 것인가?’너무 힘들어 그만둘 생각까지도 했다.
매일 새벽예배에 나가‘나는 왜 남들과 생각이 다르냐’고 하나님께 따지기도 했다. 그런데 문득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 생겼다.“그럼 내가 너에게 재판관을 시킨 게 잘못이란 말이냐”하나님의 음성은 단호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이 말씀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재판관의 사명을 주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역사상 소수의견을 가장 많이 낸 재판관이 됐다. 6년간 358건에 이른다. 아쉬움도 남는다고 했다. 미디어법을 날치기 처리한 것에 대해 무효 선언을 못한 것, 사립학교의 학생 선발권을 회복시키지 못한 것, 자식까지 낳고 살았는데 위장 결혼했다고 남편으로부터 소송을 당한 중국교포 여성의 억울함을 풀어주지 못한 사건 등이다. 조 장로는“하나님은 법률이나 국가권력 행사가 부당한 것을 지적하라고 나를 헌재로 보내신 것 같다”며 “국민의 입장에서 생각한 의견을 발표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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