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말 새뮤엘 헌팅턴이라는 학자가 ‘문명의 충돌’이라는 저서를 통해서 “이슬람 세계가 인구폭발과 그 폭력성 때문에 서구문명과 충돌을 일으킬 것”이라는 정치적 예언을 했다. 다문화 평화 공존 정책이 세계적인 대세였던 당시에 이 예언은 코웃음 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21세기 들어서자 그 예언의 성취를 상징하는 9.11 테러 사건이 발생했다. 무슬림들이 뉴욕행 출근용 비행기를 납치하여 세계 정치의 핵심인 펜타곤과 세계 경제의 상징인 월드 트레이드 센터를 들이받아 아까운 인재들 수천명이 죽었던 사건이었다. 세계가 애통의 눈물을 흘릴 때 이슬람 세계에서는 축포를 쏘며 거리에 나와 춤을 추었다.
그 예언의 성취를 보여주는 또 다른 상징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너무 평화로운 나라이기에 어떤 유명인에게도 경호라는 개념이 없던 노르웨이에서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경악할만한 연쇄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범인 안데르스 베링 브레이빅(32)은 정부청사에 폭탄 테러를 가했고 또한 경찰 복장을 하고 섬에 들어가 보이는 사람들마다 총을 쏘아 최종 집계에 의하면 모두 76명을 죽였다고 한다. 그런데 총탄이 많이 남아있었는데도 경찰이 도착하자 저항도 자결도 하지 않고 순순히 투항하여 체포되었다. 그는 범죄를 저지른 것은 “이슬람의 위험성으로부터 유럽을 구해야 한다는 경종을 울리기 위함”이었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어떤 기자는 그를 기독교 근본주의자라고 소개를 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폭력을 행사하지 않으셨고 폭력행사를 금하셨기에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정반대로 행동한 그는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보도가 나간 것은 기독교와 이슬람의 갈등을 부추겨 충격을 통해 독자들의 관심을 높이려는 언론의 바람직하지 않은 보도 태도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이제 문명의 충돌은 어떤 학자의 단순한 추측이 아니라 실제 상황이 되었다. 그동안 다문화 평화 공존을 외치던 독일의 안젤라 메르켈 총리, 영국의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 프랑스의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 등 유럽의 3대 강대국의 수장들이 이슬람 때문에 다문화 정책은 철저히 실패했다고 이미 선언했다.
유럽의 다문화 정책이 실패한 원인은 무엇인가? 그들의 포용력이 부족해서일까? 법과 제도가 잘못되어서 그랬을까? 서양에 뿌리내렸던 기독교 문화가 배타적이어서 그랬을까? 몇몇 무지한 무슬림 광신자들의 폭력행위 때문에 그럴까? 아니다. 서양의 기독교 문화는 오히려 똘레랑스(관용)를 가르치고 있으며 다문화 정책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원인은 이슬람의 율법(샤리아) 안에 잠재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테러를 저지르는 사람들은 무지한 광신자들이 아니라 철저히 헌신된 무슬림들이다. 꾸란은 “알라를 위해 싸우는 지하드에서 비무슬림들을 죽이거나 그들에게 살해를 당하면 낙원으로 들어갈 것이라(꾸란9:111)”고 가르치고 있으며, “비무슬림들을 친구로 사귀지 말고(꾸란4:144) 너희(무슬림)가 얼마나 잔인한가를 알 수 있도록 네 이웃과 싸우라(꾸란9:123)”고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모든 소동이 사라지고 종교가 알라의 이름으로 통일될 때까지 싸움을 계속하라(꾸란8:39)”고 명하고 있기 때문에 충성된 무슬림들은 이런 명령들에 복종하기 위해서 기본적인 윤리도 상식도 무시하고 테러를 저지르는 것이다. 이런 경전의 가르침을 근거로 모스크에서는 비이슬람적인 모든 세계를 자힐리야(무지)의 문화로 경멸하면서 파괴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따라서 신앙심이 깊은 무슬림들은 유럽뿐 아니라 불교권 힌두권 등 어디를 가도 그들과 어울려 평화롭게 공존할 수가 없고 자신의 자녀들이 어울리는 것도 용서하지 못하게 된다.
노르웨이의 브레이빅 사건은 이제까지는 똘레랑스 문화로 이슬람까지도 품어 왔었는데 이제 더 이상은 참지 못하겠다는 것을 입증시켜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영문도 모르고 그의 총탄에 희생된 불쌍한 희생자들의 피와 유가족들의 눈물은 다문화정책의 실패를 확인시켜주는 아픈 상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르웨이 정치인들은 한 사람의 테러로 소중한 똘레랑스 문화를 포기할 수는 없다면서 계속 무슬림 이민을 장려하는 정책을 고집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들이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몇 가지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이제 이슬람 세력은 그들이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커져버렸다. 그들은 이미 국적을 취득하고 자국민들과 동등한 투표권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표를 잃어버리면 정치를 계속할 수 없게 될 위험부담이 있다.
둘째: 정치인이 소신을 바꾸면 신뢰를 잃어버리게 된다. 이제까지 똘레랑스를 외치다가 어떤 사건을 계기로 정반대의 의견을 말한다면 유권자들이 그 정치인을 변덕스러운 사람으로 평가할 수 있는 위험이 있다.
셋째: 이미 타문화 비방 금지법을 만들어 놨기 때문에 이슬람이나 특정 문화를 비하하는 발언을 하면 법에 의해 처벌을 받게 될 뿐만 아니라 이슬람포비아(이슬람 혐오증 또는 이슬람 공포증) 혹은 인종주의나 민족주의 추종자라는 경멸적 단어의 주인공이 될 우려가 있다.
넷째: 공공연히 이슬람을 비방하면 개인적으로 테러를 당할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럽은 이제 정치인들 뿐 아니라 평범한 서민들도 이슬람을 비하하면 혹독한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에 심정적으로는 브레이빅처럼 말하고 싶어도 표현을 못하고 있는 입장이다. (조선일보 2011.7.28)
그런데 우리나라는 지금 정부와 대기업들 및 매스컴과 인권운동가들이 총동원하여 다문화 정책을 추진하고 있기에 OECD 국가들 가운데 외국인 증가율이 가장 높다고 한다. 특히 이번 사건이 벌어진 노르웨이보다 4배 이상 빠른 증가율을 보이고 있다. 2011년에 발간한 이민편람에 따르면 2000년도 국내 거주 인구가 21만249명이었다. 그런데 2011년 현재 130만명에 달하고 있어 11년 동안 611% 증가를 보이고 있다. 지구상에 전쟁 등 특수 상황을 제외하고 자연증가를 전제로 이렇게 빠른 비율로 외국인이 증가한 역사는 없다고 본다. 현재 대한민국은 OECD 국가들 중에 이 분야에서 단연 선두를 자랑하고 있다.
어느 모로 보나 대한민국보다는 인권 문제에 있어서는 훨씬 앞서가던 유럽의 선진국들이 급증하는 무슬림 인구 때문에 다문화 정책을 감당 못하고 철저한 실패를 고백했고, 그 증거들이 실제 상황으로 증명되고 있다. 우리도 이제 잠시 멈춰서 숨을 고르고, 선진국들의 실패 이유를 분석하고, 우리의 다문화 정책을 깊이 재검토하여 방향을 조정하는 것이 대한민국과 후손들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서 지혜로운 일일 것이다.
그 예언의 성취를 보여주는 또 다른 상징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너무 평화로운 나라이기에 어떤 유명인에게도 경호라는 개념이 없던 노르웨이에서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경악할만한 연쇄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범인 안데르스 베링 브레이빅(32)은 정부청사에 폭탄 테러를 가했고 또한 경찰 복장을 하고 섬에 들어가 보이는 사람들마다 총을 쏘아 최종 집계에 의하면 모두 76명을 죽였다고 한다. 그런데 총탄이 많이 남아있었는데도 경찰이 도착하자 저항도 자결도 하지 않고 순순히 투항하여 체포되었다. 그는 범죄를 저지른 것은 “이슬람의 위험성으로부터 유럽을 구해야 한다는 경종을 울리기 위함”이었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어떤 기자는 그를 기독교 근본주의자라고 소개를 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폭력을 행사하지 않으셨고 폭력행사를 금하셨기에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정반대로 행동한 그는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보도가 나간 것은 기독교와 이슬람의 갈등을 부추겨 충격을 통해 독자들의 관심을 높이려는 언론의 바람직하지 않은 보도 태도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이제 문명의 충돌은 어떤 학자의 단순한 추측이 아니라 실제 상황이 되었다. 그동안 다문화 평화 공존을 외치던 독일의 안젤라 메르켈 총리, 영국의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 프랑스의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 등 유럽의 3대 강대국의 수장들이 이슬람 때문에 다문화 정책은 철저히 실패했다고 이미 선언했다.
유럽의 다문화 정책이 실패한 원인은 무엇인가? 그들의 포용력이 부족해서일까? 법과 제도가 잘못되어서 그랬을까? 서양에 뿌리내렸던 기독교 문화가 배타적이어서 그랬을까? 몇몇 무지한 무슬림 광신자들의 폭력행위 때문에 그럴까? 아니다. 서양의 기독교 문화는 오히려 똘레랑스(관용)를 가르치고 있으며 다문화 정책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원인은 이슬람의 율법(샤리아) 안에 잠재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테러를 저지르는 사람들은 무지한 광신자들이 아니라 철저히 헌신된 무슬림들이다. 꾸란은 “알라를 위해 싸우는 지하드에서 비무슬림들을 죽이거나 그들에게 살해를 당하면 낙원으로 들어갈 것이라(꾸란9:111)”고 가르치고 있으며, “비무슬림들을 친구로 사귀지 말고(꾸란4:144) 너희(무슬림)가 얼마나 잔인한가를 알 수 있도록 네 이웃과 싸우라(꾸란9:123)”고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모든 소동이 사라지고 종교가 알라의 이름으로 통일될 때까지 싸움을 계속하라(꾸란8:39)”고 명하고 있기 때문에 충성된 무슬림들은 이런 명령들에 복종하기 위해서 기본적인 윤리도 상식도 무시하고 테러를 저지르는 것이다. 이런 경전의 가르침을 근거로 모스크에서는 비이슬람적인 모든 세계를 자힐리야(무지)의 문화로 경멸하면서 파괴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따라서 신앙심이 깊은 무슬림들은 유럽뿐 아니라 불교권 힌두권 등 어디를 가도 그들과 어울려 평화롭게 공존할 수가 없고 자신의 자녀들이 어울리는 것도 용서하지 못하게 된다.
노르웨이의 브레이빅 사건은 이제까지는 똘레랑스 문화로 이슬람까지도 품어 왔었는데 이제 더 이상은 참지 못하겠다는 것을 입증시켜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영문도 모르고 그의 총탄에 희생된 불쌍한 희생자들의 피와 유가족들의 눈물은 다문화정책의 실패를 확인시켜주는 아픈 상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르웨이 정치인들은 한 사람의 테러로 소중한 똘레랑스 문화를 포기할 수는 없다면서 계속 무슬림 이민을 장려하는 정책을 고집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들이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몇 가지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이제 이슬람 세력은 그들이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커져버렸다. 그들은 이미 국적을 취득하고 자국민들과 동등한 투표권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표를 잃어버리면 정치를 계속할 수 없게 될 위험부담이 있다.
둘째: 정치인이 소신을 바꾸면 신뢰를 잃어버리게 된다. 이제까지 똘레랑스를 외치다가 어떤 사건을 계기로 정반대의 의견을 말한다면 유권자들이 그 정치인을 변덕스러운 사람으로 평가할 수 있는 위험이 있다.
셋째: 이미 타문화 비방 금지법을 만들어 놨기 때문에 이슬람이나 특정 문화를 비하하는 발언을 하면 법에 의해 처벌을 받게 될 뿐만 아니라 이슬람포비아(이슬람 혐오증 또는 이슬람 공포증) 혹은 인종주의나 민족주의 추종자라는 경멸적 단어의 주인공이 될 우려가 있다.
넷째: 공공연히 이슬람을 비방하면 개인적으로 테러를 당할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럽은 이제 정치인들 뿐 아니라 평범한 서민들도 이슬람을 비하하면 혹독한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에 심정적으로는 브레이빅처럼 말하고 싶어도 표현을 못하고 있는 입장이다. (조선일보 2011.7.28)
그런데 우리나라는 지금 정부와 대기업들 및 매스컴과 인권운동가들이 총동원하여 다문화 정책을 추진하고 있기에 OECD 국가들 가운데 외국인 증가율이 가장 높다고 한다. 특히 이번 사건이 벌어진 노르웨이보다 4배 이상 빠른 증가율을 보이고 있다. 2011년에 발간한 이민편람에 따르면 2000년도 국내 거주 인구가 21만249명이었다. 그런데 2011년 현재 130만명에 달하고 있어 11년 동안 611% 증가를 보이고 있다. 지구상에 전쟁 등 특수 상황을 제외하고 자연증가를 전제로 이렇게 빠른 비율로 외국인이 증가한 역사는 없다고 본다. 현재 대한민국은 OECD 국가들 중에 이 분야에서 단연 선두를 자랑하고 있다.
어느 모로 보나 대한민국보다는 인권 문제에 있어서는 훨씬 앞서가던 유럽의 선진국들이 급증하는 무슬림 인구 때문에 다문화 정책을 감당 못하고 철저한 실패를 고백했고, 그 증거들이 실제 상황으로 증명되고 있다. 우리도 이제 잠시 멈춰서 숨을 고르고, 선진국들의 실패 이유를 분석하고, 우리의 다문화 정책을 깊이 재검토하여 방향을 조정하는 것이 대한민국과 후손들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서 지혜로운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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