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적으로 ‘소외감’을 요즘은 ‘왕따’라고 하는 현실적인 용어로 대체시킨다. 누구나가 소외감은 다 있다. 부자와 가난한 자, 그리고 배운 자와 배우지 못한 자, 그리고 남자와 여자 등 사람들 간의 대립과 갈등의 문제를 ‘소외감’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정치적으로는 이런 소외감을 갈등이라고 하고, 민족적으로는 차별이라고 논리적으로는 차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성경은 사랑의 책이라고 누구나가 알고 있다. 이 사랑은 소외감, 전체적으로는 인간이 하나님을 떠난 소외감을 해소시키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화해의 희생으로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성경은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는 평등하다.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에게서 소외당할 수 없다. 설령 스스로 하나님과 거리를 두고 자의적으로 멀리 떠난 사람들, 예를 들어 아담과 하와로부터 무수히 많은 사람들에게까지도 소외감을 해소시키려고 하나님은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교회는 교회(敎會)이지만 사실은 어떤 면에서는 교회(交會)의 의미도 배제할 수 없다.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교회의 원어, ‘에클레시아’를 ‘세상에서 구별되이 불러낸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한다. 이 교회라는 말은 세상과는 구별되었으나 하나님과 그리고 함께 모인 사람들과는 소외감이 없는 하나 된 모임‘의 해석은 교회의 또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가 완성된 어느 작품처럼 생각한다. 그래서 교회에 어떤 문제가 생기면 교회가 그럴 수 있느냐고 비판의 목소리를 가한다. 그런데 사실은 교회는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이 교회이다. 왜냐하면 세상으로부터 소외를 당한 사람들이 피난처로 여겨 온 곳이 교회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교회는 소외된 사람들이 위로받고, 힘을 얻는 곳이어야 한다.

이런 교회가 만일 또 다른 교회안에서 소외의 기회가 부여된다면, 그리고 교회 안에 초대받지 않은 손님처럼 설 자리가 없어진다면 교회는 교회(交會)가 아니라 교회(校會)가 되고 만다. 학교에 입학허가가 되어야 들어가듯이 누구는 허락이 되고, 누구는 허락이 되지 않은 학교가 되고 만다.

아주 오래 전 영화 “초대받지 않은 손님(Guess who is coming to dinner)”이 있었다. 백인 위주의 사회에서 백인 처녀와 흑인 의사와의 사랑을 그린 영화이다. 제목이 말해주는 것처럼 저녁식사에 오지 않을 사람이 아무도 없지만 그래도 꼭 자격이 있어서 와야할 사람이 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만일 기대했던 사람이 안 온다면 그 자리가 어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 하지만 성경은 그 어떤 상황에도 올 사람과 오지 않을 사람을 구별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당시 소외시켰던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같이 했고, 접근하지 않던 땅까지 찾아가서 사람들을 만났다.

인도의 지도자 마하트마 간디는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예수를 좋아한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를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참 조용한 말이지만 날카롭게 기독교인들의 부족함을 찌르는 말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누가복음4:18-19)"

만일 우리에게 초대받지 않은 손님의 목록이 내 마음에 기록되어 있다면 다시금 생각해야 한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를 위해 살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