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에 나타나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의 사건들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우리 자신의 사건으로 다가온다. 아브라함이 강을 건너 하나님의 지시할 땅으로 강을 건넌 사건이나, 모세와 더불어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홍해를 가로질러 넘었던 사건, 그리고 광야에서 40년을 지낸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넘어 마침내 가나안에 입성한 사건들은 모두 강을 건넌 사람들의 사건들이었다.

구약에 나타나고 있는 “강을 건넌 사람들”의 사건은 예수님의 세례사건에 이르러 절정을 이룬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영적 이스라엘인 믿음의 백성을 데리고 영적 요단강을 건너는 지도자셨다. 다시 말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와 더불어 강을 건너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요한의 물세례는 강을 건너는 행위의 반복을 의미한다.

1.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은 강을 건넌 사람들이었다. 어떤 이들은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천민으로 살 때 얻은 별명이라고들 하나, 아브라함을 히브리인이라 불렀던 것은 그가 히브리강을 건넜기 때문이라고 한다.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들과 함께 홍해를 가로질러 광야로 나아갔다. 때문에 홍해 사건은 이스라엘의 삶에 구원의 상징적인 사건으로 남아 있게 된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여호수아와 함께 모세의 남긴 유언의 성취를 위해 가나안으로 입성하게 된다. 이 때 그들은 요단강을 건넜다.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에는 “강을 건너는 사건들”은 특별히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드러내는 상징적 사건인 것이다.

이 상징적인 사건은 역사적 의미와 함께 또 다른 구원 사역의 상징적 의미로 남아 후에 전개되는 이스라엘의 또 다른 역사에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기원전 6세기경에서부터 시작된 바벨론으로의 민족적 유배사건은 또 다른 역사적 해방의 필요성을 요구하고 있었다. 바벨론 포로 70년간의 기간을 마치고 하나님의 은총으로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고향 땅으로 귀향하게 된다. 이때 이스라엘은 또 한번의 역사적 도강을 하게 된다. 마치 자신의 국부였던 아브라함이 강을 건넌 것 같이 히브리강을 건넌 것이다. 그리고 이집트에 억압되어 있던 종살이로부터 해방되었던 선조들의 삶을 다시 바벨론으로부터 해방됨을 통하여 재 체험하게 된다.

이스라엘의 강을 건넌 사건들의 의미는 하나님의 크신 은총에 있다. 그리고 민족적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국가적 구원행위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행위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더 깊은 의미를 얻게 된다. 강을 건너는 사건은 단지 민족적 해방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죄의 땅으로부터 불러낸 구원사역의 의미로 확대된다. 이 구원 사역의 의미는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줌으로서 그 의미의 절정을 이룬다. 그러나 진정한 구원사역의 실체는 예수께서 유대 광야로 오시면서였다. 그는 영적 아브라함이자, 모세였으며, 또한 이스라엘을 바벨론으로부터 인도해낸 스룹바벨의 모형이다. 때문에 그는 영적 구언 사역을 이스라엘로 하여금 죄악의 상징인 도시로부터 광야로 불러내어 강을 건너는 도강을 시도한다. 바로 세례는 그 의미를 가득 담은 담지적(擔持的) 사건이었다.

2. 그렇다면 구약과 신약에 걸친 모든 “도강”(渡江), 즉 강을 건넌다는 역사적 신앙적 의미는 도대체 무엇일까? 그리고 그 의미는 어떻게 이해되어졌으며, 오늘날 이해 할 수 있을까? 아브라함에게 도강의 의미는 “복을 받는다”는 약속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 약속의 말씀은 이스라엘이 가졌던 심성에 비추어 말하자면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구복”, 즉 복을 구한다는 의미를 듬뿍 담고 있다. 후일 아브라함의 깊은 신앙심에 의해 오직 하나님의 나라, 즉 “한 성을 바라 봄”이라는 깊은 의미로 승화되었기는 하지만 그것은 결코 철학적인 의미이거나 사상적인 뜻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브라함의 도강은 축복의 약속 때문이었다.

그리고 모세와 이스라엘의 도강은 좀 더 깊은 의미를 소지한다. 아직도 이스라엘은 먹고 마시는 문제로 모세를 광야 땅에서 여전히 불평하지만 그들의 최종적인 목표는 먹고사는 문제보다는 훨씬 깊은 의미의 추구였다. 진정한 민족적 해방과 억압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했다. 일차적인 인간의 욕에서 더 깊은 인간성의 회복을 위해 한 걸음 발을 띤 것이다. 그러나 그 의미를 이스라엘은 알지 못했다. 때문에 이스라엘의 불평은 광야에서 엎어져 죽는 것으로 끝이 난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의 요단강 도강 사건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로 이해된다. 이 사건은 장차 나타날 예수님의 구원 역사를 전형적으로 드러내는 그림자이지만, 당시 이스라엘에게는 자기 독립국가의 출현이라는, 즉 더 이상 유랑민족이 아닌 자기들과 자기 자손에게 물러줄 수 있는 땅을 소지하게 됐다는 말할 수 없는 기쁨이 동반되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진정한 구원의 의미를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기에 이스라엘은 구원의 땅에서 끊임없는 시험의 과정을 반복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도강의 의미는 바벨론유수로 더욱 확실해 진다. 그리스도의 모형이자 연한 순이라는 그리스도의 별명을 소지한 스룹바벨과 이스라엘 사람들의 탈바벨론사건은 모세사건보다 더 깊은 의미로 주님에 의해 다루어진다. 그들은 바울에 의해 신앙의 “남은 자들”이라는 표현으로 이해되어 진다. 즉, 주님은 버림받은 돌이었으나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에 의해 옮겨져 성전의 모퉁이 돌이 되었다는 해석으로 연결되어진다. 예수님은 자신들에게 모여든 창기와 세리와 믿음의 사람들이 곧 이 구약의 전승에 나타난 “남은 자들”임을 해석한다. 그리고 바울은 그 남은 자들의 전통을 따라 그들은 어두운데서 불러내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말한다(에베소서2:1,2). 베드로 역시 이 남은 자들의 전통을 따라 신앙하는 신약성도들을 “어두운 곳에서 불러내심을 받은 사람들”(베드로전서2:10)이라고 말한다.

3. 오늘날 강을 건넌다는 도강의 의미는 우리 성도들에게 다양한 신앙적 단계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아브라함처럼 구원의 강, 즉 히브리강을 건넜으나 아직도 삶의 목표는 단지 육신적인 축복에 얽매여 있는 상태라면 더 많은 단계의 영적인 과정이 필요로 되어진다. 축복의 과정은 결코 무시되어질 수 없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과정이다. 그러나 그 과정은 그리스도의 진정성을 향한 더한 여정을 남긴다.

모세의 민족적 사회적 구원은 우리의 정체성을 의미하는 가정, 혈족, 그리고 내 교회, 민족등 이러한 영역의 구원의 사건이다. 한때 “사회적 구원”이냐 “복음적 구령이냐”고 불려졌던 진부한 구호들은 더 이상 우리에게는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그것은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이 우선 인가의 차서의 문제이다. 그러나 바벨론유수로 까지 이어지는 이스라엘의 민족적 구원은 시간이 지나면서 더 깊은 신앙적인 의미로 해석되어진다. 즉, 우리들의 진정한 신앙의 회복은 축복이라는고 하는 육신의 의미보다도, 민족적 해방이라고 하는 것보다도 더 큰 의미의 종교적 구원을 의미한다. 문제는 이 큰 종교적 의미가 나의 사건으로 이해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들은 우리 자신들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진정으로 나는 도강을 하고 있는가? 만일 도강을 하고 있다면 어떤 강을 지금 건너고 있는가? 즉, 나의 구원은 더 깊은 강을 건너 하나님의 피안의 언덕을 향한,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향진을 의미하는가하는 물음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왜 예수님은 자신의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세례를 줌으로서 사람들을 강을 건너게 하셨을까”하는 물음을 우리 자신에게 물어 보아야 한다. 분명히 강을 건넘에는 신앙적인 이유가 발견된다. 아브라함에게는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시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있었다. 모세와 그를 따르던 사람들에게는 자유와 해방이라는 목표가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성도로서 강을 건너게 된 것은 강 이편의 어두운 삶에서 빛의 나라로 옮겨간 것을 의미한다. 성경은 마귀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진정 죄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는 자유의 나라로 옮겨감을 뜻한다고 증언한다.

믿는 자로서 우리는 강을 건넌 영적 사람들이다. 때문에 또 다시 여호수아의 외침을 명심해야 한다. “너희는 강 저편에 우리 조상이 섬기던 아모리 사람들의 신들을 섬기든 아니면 강 이편의 여호와를 섬길 것을 오늘날 선택하라 나와 내 짐은 오직 여호와를 섬기겠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