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는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초대교회가 처한 당시의 긴박한 상황을 엿보게 됩니다.
마귀가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아이”(5)가 태어나기를 기다려 마침내 그를 삼키려다 실패하고 분노하여 그 아이를 낳은 여자와 그 여자의 자손들을 대항하기 위하여 바다 언덕 위에 섰다는 이 말씀은 당시 순교자들 가운데 살아남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악의 또 다른 공격이 임박했거나, 아니면 이미 신랄하게 그 공격이 전개되고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이 글이 쓰여지고 있던 당시 이미 사탄의 핍박이 시작되고 있었고, 사도들은 요한사도를 제외하고는 모두 순교한 상태였으므로 교회는 지도자들을 잃어버리고 오직 몇 안 되는 여자들과 그의 자손들인 젊은 믿음의 자손들만 남게 되었습니다. 이럴 즈음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또한 살아남은 믿음의 여인들는 남은 교회들을 돌보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으리라 추정됩니다.
때문에 우리들은 “여인”을 전통적으로 “교회”로 해석해오고 있는 개신교적 주석이해에도 불구하고 본문에 나타난 여인을 마리아로 해석 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인이란 말은 문자대로 특정적인 한 여자 마리아를 가르칠 수도 있고, 당시 살아남아 교회의 어머니들이 되었던 여인들로도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의미상으로 여인을 교회로 간주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 “여인”과 “남은 자손”은 동일한 의미로 간주되기 때문에 본문의 기록과 같이 “여인의 남은 자손”이란 말씀, 즉 여인과 그에게 속하는 남은 자손이라고 언급하고 있는 두 개체를 하나로 동일하게 간주해 버려야 하는 해석상의 어려움이 따릅니다.
여인의 남은 자손인 교회는 그의 어머니들에게 진 빚이 많습니다. 핍박 속에서 살아남아 그들에게 유일하게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행적을 전해 줄 수 있었던 사람들이 다름 아닌 바로 그 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분들 중의 마리아는 매우 중요한 분으로 간주되었을 것입니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마태는 그녀를 예수님의 족보에 기록했을 뿐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보다 앞에 기록함으로써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신 이후 그녀가 교회에 차지하는 비중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있습니다(마1:16). 그리고 그녀가 죽음을 각오하고 예수를 수태한 사실은 초대교회에서는 중대한 신앙의 행위로 간주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녀를 가볍게 볼 수 없는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여자들은 예수님과 초기 기독교 공동체를 돕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유대인들의 결례를 따라 남자들은 생활을 맡지 않았고, 심지어는 생활 물품까지 여자들이 모두 도맡았습니다. 때문에 자연히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을 도와주어야 할 분들이 필요했습니다. 단지 예수님과 12명만이 아니라 70문도 까지, 아니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언제나 예수님을 따라 다녔습니다. 그들의 생활과 뒷바라지를 모두 여인들이 담당하였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눅8:3). 헤롯의 신하였던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와 더불어 많은 여인들이 자신들의 재산으로 예수님과 많은 제자들을 섬겼습니다. 이 여인들의 헌신 없이는 결코 오늘의 기독교가 없었습니다.
누가복음(10:38-42)에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의 식사를 마련하고 있고,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아래 앉아 말씀을 들었다고 합니다. 당시 유대 여자들은 오직 자신의 정혼한 남자만을 위해 식찬을 준비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마르다가 얼마나 예수님을 중시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시에는 여자가 랍비의 말을 듣기 위해 그의 가까이 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던 때였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의 발아래서 말씀을 들었다고 합니다. 이는 마리아가 이미 예수님의 제자중 한 사람으로 여겨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실로 마르다는 신약성도 중 가장 뛰어난 신앙고백,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과 부활, 그리고 재림을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후일 마르다와 마리아라는 이름이 거룩한 책인 성경에 기록되었다는 것은 예수님의 승천 이후 그들의 교회 안에서의 비중을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던 여인들은 단지 교회의 허드렛일만을 담당하지 않았습니다. 여인들은 예수님의 수난의 증거를 마지막까지 보고 후일 교회에 그 모습을 전달했을 것입니다. 여인들 중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부활의 첫 증거자가 되었습니다. 그녀들의 전통을 쫓은 거룩한 부인들은 가정교회에서 지도자의 역할을 했습니다. 때문에 그들은 “택함을 받은 부인들”(요한2서 1절)이라는 칭호를 받았습니다. 로마의 유명한 브르스가집안의 딸이었던 브르스길라는 사도행전에서 보여지듯이 그녀의 역할은 당시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아날 로기스”, 즉 소피스트라고 불릴 정도로 탁월한 수사학자였던 아볼로에게 믿음의 비밀을 가르칠 정도로 성숙한 믿음의 소지자였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바울을 돕던 여신자 뵈뵈가 집사였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롬16:1). 오늘날의 성직자와 같은 역할을 했던 뵈뵈는 겐그리아교회의 설교와 가르치는 봉사를 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유니아라고 하는 여인은 사도 중의 한 사람이라 불리어 지기도 했습니다(롬16:7). 이러한 사실을 보건대 초대교회에서의 부인들의 역할을 단지 그들의 보모 역에 머물러 있지 않고 그들의 지도자이며 어머니의 역할까지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여인들에게 진 빚이 많습니다. 그들이 없었다면 우리의 오늘은 없었을 것입니다. 더욱이 가정을 중요시 여기는 현재의 풍토 속에서는 여자의 역할이 더욱 중요시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소그룹 단위의 가정교회 혹은 셀 교회를 지향하는 모든 목회적 노력에는 교회의 어머니로서 여성들의 사역과 역할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이러한 필요성은 여성의 존재에 대한 분석적인 그 어떤 폄하로서도, 여자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증거자가 될 수 없다고 말하는 그 어떤 편견으로도 결코 다 메 꿀 수 없는 시대적 요청이자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단지 역사상 마리아를 신격화했다고 하는 사실 때문에, 아니면 족장시대의 여성에 대한 시대적 문화이해를 오늘날의 시대지평으로 바로 대입시키는 잘못된 사고의 빈곤 때문에 교회 안에서의 여성들의 역할과 위치를 왜곡시킬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기독교를 위해 헌신했던 그들의 모든 족적 마저도 우리의 사고의 빈곤과 성경에 대한 몰이해로 인한 편견으로 지워버릴 수 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거룩한 여인들의 전통은 오늘날 우리 교회들에게 반복하여 되새김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자손들에게 증거하며, 주의 종들을 돕고, 교회를 위해 기도하며, 오직 그리스도의 몸인 가정과 교회를 가르치며 봉사하고 주의 오실 날 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일은 결코 교회 안에 있는 거룩한 여인들이 가져야 할 마땅한 사명일 것입니다. 또한 새시대의 주의 부르심임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김호환 박사의 신학단상 (21) 여자와 그리스도의 교회(계12:13-17)
© 2020 Christianitydaily.com All rights reserved. Do not reproduce without permiss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