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성장과 영성운동이 상관관계를 지니고 있음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문제는 구체적으로 교회의 영 육간의 성장을 위해 어떻게 영성운동을 접목시키느냐하는 것이 관건이다. 이를 위해 현재 우리의 영성들을 재진단하고, 또한 몇 가지 새로운 영성의 방향성을 소개하고자 한다.

현재 우리 교회들이 지니어 왔던 영성을 파악해 보면, 말씀중심의 구원이 강조된 전통적 방식의 영성운동, 카톨릭전통으로부터 개신교에 접목된 수덕적 즉 성결에 초점을 두고 율법적이기까지 한 경건주의 운동, 그리고 개인의 구원과 전도를 강조한 복음지상주의 운동을 손꼽을 수 있다. 말씀을 중심으로 교회의 영성을 형성해 나갔던 일을 개신교로 하여금 오늘이 있도록 한 큰 원인이 아닐 수 없다. 또한 한국교회가 이렇게 성장하게 된 것은 개신교의 중심원리였던 '말씀중심사상'(Sola Scriptura, Sola Biblica)에 신세를 진 바가 많음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개신교의 중심원리였던 말씀중심사상은 17C이래 유럽의 지성을 지배하고 있었던 이성주의에 대항하여 신앙의 원리로 출발하고 있었으나 또 다른 이성에 기초한 단지 신앙이라는 외피를 뒤집어 쓴 복음이성주의의 모습 그 이상은 아니었다. 분명 그것은 '오직 예수신앙'(Sola fide, Sola Christus)라고 하는 원색적인 복음의 정열이 빠진, 논리와 교조주의적 성향을 띄고 있었다. 당시 유럽교회가 신조와 교리 및 조직신학을 성경공부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19C는 성경에 대한 저등비평과 고등비평이라고 하는 성경해석의 원리들이 새로운 사상으로 등장함으로써, 소위 '말씀중심사상'에 기초한 개신교의 영성사상이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보다는 이 세상에 대한 책임에 대한 윤리적인 선언 내지는 도덕적이며 율법적인 성향을 띄게 되었다. 또한 극좌의 성향을 띄었던 자유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말씀중심주의는 오히려 극우의 길을 걷게 되어 삶이나 책임을 동반한 행동이 없는 율법주의 내지는 실천을 배제한 지식만을 강조하는 성서지상주의로 전략하고 말았다. 때문에 오늘날 한국교회의 교단에서 선포되는 설교가 윤리적이며 율법적이기까지 한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한편 개신교의 경건주의 운동의 경향 역시 정상적으로 교회 내에 정착되지 못했다. 개신교 초기 경건주의는 기득권세력 밖에서 평신도운동을 중심으로 형성되고 있었기 때문에 종교개혁자들에게 조차도 도외시되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주의 사상을 영국에 접목시키고 있었던 청교도들과 대륙의 형제교단의 모라비안파들은 후에 뉴잉글랜드로 불리었던 미국에 경건주의 전통을 태동시킴으로 희미하게나마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전통의 맥을 잇고 있었다. 그러나 경건주의 운동은 항상 그 이상주의적인 태도인 성도의 현재의 거룩한 삶을 강조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신비주의적인 경향을 띄고 있다는 오해를 받아 왔다. 당시 교회는 신학중심의 교조성을 띄고 있었기 때문에 몇 세기를 거쳐 고착된 교회의 전통을 바꾸거나 그 자리의 빈틈을 열고 경건주의가 자리를 잡기란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분명 웨슬리운동과 조나단 에드워드에 의한 복음적인 경건주의 운동이 뉴잉글랜드라고 불리던 당시의 미국에서 실효를 거두고 있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여전히 미국적 전통은 유럽의 분위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말았던 것이다. 때문에 한국교회의 정서 역시 해방이후로 경건주의 운동은 사장되거나 혹은 기도원운동으로 접목되어 소위 비정상적인 신비주의운동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시아에서의 복음지상주의는 큰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이미 복음이 전해진지 오래된 유럽이나 미국은 더 이상의 복음을 전할 대상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는 전혀 달랐다. 새로운 미지의 땅이었던 것이다. 마침 팽창하고 있었던 서구의 제국주의는 아시아라고 하는 자신들의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고 있었고, 또한 서구교회 역시 동일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교회는 전도를 통해 주님의 지상명령을 수행하고 있었고 또한 그로 인해 자신의 내부적인 문제와 자기 스스로 사명을 다하고 있음을 자위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인 왜 전도해야 할 것인가? 무엇 때문에 복음을 전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깊은 성찰을 결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현재 새로운 밀레니움을 맞이하며 교회는 시대에 걸 맞는 몸 짖을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동서양의 어느 교회나 마찬가지 일 것이다. 때문에 세계교회는 성령없는 말씀주의가 지닐 수 있는 율법주의와 교조주의 약점에 벗어나야 할 것을 자각하고 있다. 그리고 영성을 소지한 수덕적 기독교의 모습을 되찾으려 노력하고 있다. 즉, 신앙고백과 삶의 행동이 있는 경건주의로의 회기를 희망하고 있다. 그리고 세계교회는 타종교와의 관계 속에서 사무엘 헌딩턴(S. Huntington)이 예시했던 종파들간의 종교 분쟁 상태 이상의 영적 대결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음을 보고 있다. 때문에 기독교회는 자신의 성장을 위해 혹은 생존을 위해 자신의 약점을 극복해야 할 일과 미래적 대안을 가져야할 당면과제를 안게 되었다. 참으로 교회의 성장과 영성회복을 위해 오늘날 교회가 필요로 하는 것은 부족한 것에 대한 보충과 성장을 위한 대안으로서의 영성개발에 대한 균형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