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은 큰 꿈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는 흩어진 유대인 다아스포라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며, 또한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이었다(롬1:16). 그는 이 일을 위해 구체적인 선교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곧 자신의 선교마인드이자 신앙철학이라 할 수 있는 계획, 즉 큰 꿈인 로마를 방문하는 일과 나아가서 지상 끝으로 알려진 서바나를 방문하는 일 이었다(23).

바울은 이방을 위한 사도이었다. 다메섹에서 그리스도를 만난 후 자신을 이방을 위한 도구로 삼으신 그리스도의 소명을 깨달게 되었다. 그는 그리스도가 오직 만유의 주 이심을 선포하는 일에 누구보다 더 앞장을 섰다. 그리고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워나가는 일이 곧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임을 알았다.

그러나 이미 자신을 배교자 혹은 이단자로 간주하는 유대인들을 떠날 수밖에 없었고, 또한 자신을 여전히 불신임하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에게서도 버림을 받았다. 때문에 그가 택한 길은 이방을 향한 길이었다.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지 아니하려 함이라”(20)는 그의 말은 곧 유대인을 떠나 이방을 향하는 자신의 의도성을 드러내 주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방의 선교를 위해 유대인 디아스포라를 방문하는 지혜를 가지고 있었다. 자신 역시 유대인 디아스포라의 일원으로 터키의 다소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해외의 유대인 공동체가 자신의 선교계획을 위한 발판이 됨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우선 유대인들과 결혼한 이방인들을 자신의 중요한 제자로 삼았다. 그들 중에는 로마의 유명한 부르스가집안의 딸인 부르스길라나, 디모데와 같은 이들이 있었다. 그리고 나아가서 유대인 공동체로 연결된 사람 이방인들 중에 유력한 이들, 즉 고린도의 장관이었던 에라스도나 겐그리아교회의 여자집사였던 뵈베 같은 이들을 양육하고 길러 내었다. 바울의 선교는 의도적인 접근을 통해 각 지역의 유력한 자들을 그리스도의 공동체로 끌어 들였고, 그들을 통해 그리스도교회를 세워나가도록 지도자로 양육했다.

그러나 바울에게는 지역 교회를 세워나가는 꿈 이외에 더 큰 꿈이 있었다. 로마로 가는 꿈이었다.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교제하여”(24)라는 말은 우선적으로 로마가 바울의 마음에 있는 도시였음을 알 수 있다. 당시는 세상의 모든 길은 로마를 통했다. 로마가 곧 길이며 모든 것의 중심이었다. 때문에 바울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만나고 그들에게 복음전하기를 원했다. 이는 모든 세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길이며 곧 세상의 중심지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점령하는 일이기 대문이다. 초기에 그는 이 로마에서 자신의 삶을 마치리라고 는 생각지 않았던 것 같다. 때문에 그는 로마 공동체가 자신을 도와 서바나로의 선교여행을 위한 경비를 후원해 줄 것을 부탁한다. 그리고 예루살렘교회를 돕기 위한 헌금도 잊지 않도록 부탁하고 있다(29). 로마교회가 모든 그리스도공동체의 맏형 노릇을 해주길 바라는 심사였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계획과 하나님의 섭리는 언제나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바울의 경우도 마찬가지 였다.

그러나 진정으로 바울의 큰 꿈은 로마가 아닌 서바나에 있었다. 당시 세상의 끝으로 알려진 서바나는 스페인을 말하는 것 이었다. 바울의 눈에 비친 거대한 대양을 중심으로 둘러친 고대사회의 세상은 예루살렘은 해가 뜨는 동쪽의 끝 이었으며, 로마는 북쪽의 끝이었고, 서쪽은 해가 지는 서바나가 끝이었다. 그리고 남은 아프리카의 서쪽에 이르는 사하라 사막과 동쪽에 이르는 이집트가 바로 온 세상의 전부였다. 그는 세상의 끝에 가고 싶었던 것이다. 단지 여행을 위한 충동이나 호기심이 아니었다. 그는 세상 끝까지 가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당시의 온 세상으로 여겨졌던 지중해를 중심으로 동서남북을 “돌아서” 예루살렘에 귀향하는 것이 그의 꿈 이었다(19). “한 바퀴 돌아서”라는 그의 표현을 본다면 결코 로마에서의 죽음은 그가 예상한 것이 아니었다. 후에 그는 로마로의 구속사건을 통해 자신의 죽음의 미래를 예측했을 따름이다.

온 세상을 한 바퀴 도는 일은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는 중요한 일 이었다. 그는 자신이 제사장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16). 모든 공동체마다 제물을 받아, 즉 그들의 헌금을 모아 제사장이 예배드리는 성소로 생각되는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하나님께 드릴만한 제물로 드리는 일은 곧 자신이 이방인들을 위한 제사장으로 선택받았음을 느끼고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이는 그의 공동체가 자신에게 날아 들어오는 비난인 이단자 혹은 사이비라는 오명 때문에 받을 자신의 개척교회들이 이상한 교회들이라는 평판을 막기 위해서 이었다. 오늘날에도 상회비의 명목은 때로 지교회가 교단으로부터 자신들의 정통성을 보호받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바울이 온 세상을 그리스도에게 바치며 온 세계에 그리스도의 깃발을 꽂으려 했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꿈은 때로 그리스도의 꿈과 일치하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위한 그 어떤 꿈도 우리는 은총에 의해 합력하여 좋은 결과를 낳음을 알고 있다. 사도 바울이 그 예가 된다. 비록 그는 자신의 꿈인 서바나에 가지 못했다. 단지 로마에서 죽었을 따름이다. 그러나 서바나로 가려한 그의 의도가 온 세상에 그리스도를 전하겠다는 일념으로부터 출발된 것이라면, 그의 의도는 마침내 꿈을 성취하게 된 것이다. 로마 경기장에서 죽어야만 했던 자신의 좌절된 꿈은 오히려 로마 경기장에서 피어나서 전 세상을 그리스도의 피로 물들게 했기 때문이다.

때때로 우리의 꿈은 좌절된다. 그것이 우리 자신의 한계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닌, 시간과 공간의 조화로 생겨나는 더 이상 우리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 영역으로 기인한 것일 때에는 더욱 비참하다 못해 처참하기 조차 한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스도를 위한 열망과 꿈이었다면 그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이다. 그 아름다운 꿈과 열망이 나의 속에 있게 하신 은총에 감사를 드려야 한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가져야 할 생각은 세계를 향한 큰 꿈이다. 세상을 가슴에 품고 위대한 제사장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바울의 이상은 우리들에게 큰 경종을 울리고 있다. 현실적으로 우리가 한 지역 한 동네를 맴돌고 있다고 할 찌라도 그리스도를 위해 세계를 향한 중보기도와 선교 후원에 참여하고 있다면, 그것은 바울의 꿈에 동참하고 있는 일이다. 더 큰 꿈과 더 큰 열망이 결코 단발성의 충동이나 독자적인 아집으로 끝날 것이라고 하는 두려움이 있다면 그것은 단지 자신만의 정복욕을 불태우는 일에 불과 한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를 위하여, 오직 그리스도 나라만을 위하여서라면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