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12달 중에 가장 아름다운 계절의 달을 말하라면 거리를 화사하게 꾸며놓고 자신에게 눈길을 주지 않는 사람들과 짐승 그리고 벌레들에게 향기를 뿜어내어 찾아 오게하여 말을 건네게 하는 꽃의계절 4월이라고 말할 수 있다.

꽃의 향기는 사람들이 누군가에게 사랑과 위로를 받기 위해 “나의 사정을 좀 들어 줄래” “이민생활이 너무나 힘들어 죽겠다.” “어디 마음놓고 이야기 할 사람 한 사람도 없네” “먹고 사는 것 너무나 힘들어 더 이상 못하겠다.” “나 외롭거든 누군가 사랑할 사람 좀 소개 해줄래”라고 요란 피우지 아니하여도 꽃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보여주고 그 속에서 나오는 고요한 향기로 세상 모든 만물에게 관심의 유혹을 끌어낸다. 이러한 꽃에 아름다움과 향기의 매혹에 흠뻑젖어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곤충들의 이야기를 한다면 그것은 단연 꽃을 보면 그 향기에 견딜수 가 없어서 동료들을 부르기 위해 “춤으로 의사전달을 하는 벌”들과 꽃으로 부터 맛있는 별식을 먹은 댓가로 “다른 꽃에 꽃가루를 옮겨 꽃의 식물들이 번식하도록 돕는” 나비들이다.

이것을 볼때 벌,나비 그리고 꽃의 사이에 내면의 질서를 보면 벌과 나비가 꽃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꽃이 벌과 나비를 선택하여 초대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꽃이 그들에게 먼저 향기를 발산해 자신을 드러내었기 때문에 벌과 나비들이 찾아와서 꿀을 먹게되는 것이다. 꿀벌에 깊은 연구를 한 오스트리아 자연과학자 프리쉬에 의하면 “꿀을 발견한 정찰벌은 벌통안의 벌집위에서 특별한 몸짓으로 춤을 춘다. 다른 벌들은 춤추는 벌의 주의에 몰려들고 그 벌을 바짝 따라가 앞에서 춤추는 벌의 움직임을 보고 흉내를 내고 춤추는 벌이 꿀을 모을 때에 몸에 묻어나는 꽃향기에 주의를 기울이고 식량원이 50m 이내에 있으면 벌집의 표면에서 원형으로 춤을 추고 그 벌은 2-3cm 정도 원형으로 움직인 다음에는 반대 방향으로 회전을 한다.

이것은 식량원이 가까이에 있음을 다른 벌들에게 알리는 방법이다. 그들은 정찰벌에서 나는 향기를 맡아서 새로운 식량원에서 어떤 향기가 나는지를 알게 되고 다른 벌들은 새로운 꽃을 발견할 때까지 점점 크게 원을 그리며 날아가면서 또 다른 꿀을 찾기 시작한다.” 벌 처럼 나비도 꽃 냄새의 유혹에 못이겨 향기로운 꽃에 다가오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나비가 꽃잎 깊숙이에 숨어 있는 꿀을 먹기가 그리 쉬운 것은 아니다. “꽃은 나비가 조금 고생이 되더라도 꽃 속 깊이 들어오도록 한다. 그래야 나비의 납작한 날개에 꽃가루가 잔뜩 묻었다가 그것이 암술 머리에 붙게되고 그럼으로써 번식에 필요한 씨를 맺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때 자연의 곤충과 꽃은 서로가 도우면서 사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꽃은 벌과 나비들에게 꿀을 주는 대신에 그들은 꽃에서 꽃가루를 옮겨주어 꽃 식물에 번식하는데 중요한 도움을 주는 것이다. 암수가 다른 꽃들이 자체에서 번식력을 갖지 못할때 자신의 향기로 만물에게 기쁨을 주며 자신의 번식을 즐기는 꽃들은 하나님이 만드신 아름다운 작품이다.

4월의 아름다운 꽃들은 과일꽃인 배,복숭아,사과,매화 그리고 산과 들녁에 하나님이 아름답게 심어 놓은 진달래,개나리,유채꽃,튜울립,백합등의 무수한 꽃들이 각기 자신들이 보여 줄 수 있는 아름답고 화려한 옷들을 입고서 만물에게 관심을 보인다. 그 중에 가장 아름다운 꽃을 들라 한다면 백합 꽃이다. 백합의 전설중에 보면 “백합은 화려한 꽃보다는 식량이나 약재가 되는 뿌리로서 그 뿌리에 약 1백여 개의 비늘을 이루고 있어서 백합(百合)이라고 불리운다.

이것을 어떤 섬 사람들이 식량으로 대용해서 먹던중 그중에 한 사람이 기침과 폐병에 걸렸는데 그것을 먹고 며칠 후에 몸이 완전히 회복이 된 것이다. 그것을 안 외부 사람들이 약초를 캐러 그 섬에 왔는데 이름도 모르는 꽃의 뿌리를 부를 수 없어서 그 섬 사람들의 수를 세어보니 사람들의 합이 백명이라는 의미로 그 꽃을 백합”이라 이름 지은 것이었다. 이 백합은 색깔이 하얗기 때문에 순결로 사용되고 기독교에서는 흠이없고 죄가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그분이 다시 삼일만에 부활 하셨는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기념하는 상징적인 꽃이 바로 백합이다.

예수님을 상징하는 백합은 계절의 꽃이 아니라 365일 24시간 멈추지 아니하고 “살아있는 향기를 내는 영광스러운 꽃”이다. 사람들이 그 살아있는 꽃을 찾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백합 향기가 너무나 아름다워 그 꽃을 찾게 되고 꽃 향기의 진리를 알게 되면 영원히 죽지 아니라는 구원의 감격의 기쁨을 맞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백합과 같은 예수님은 진리이시고 그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가 장엄한 산보다 더 크고 놀라우신 분이시라는 것을 찬송가 “내 진정 사모하는” 가사를 보면 알 수 있다. “내 진정 사모하는 친구가 되시는 구주 예수님은 아름다워라 산 밑에 백합화요 빛나는 새벽별 주님 형언할 길 아주 없도다 내 맘이 아플적에 큰 위로되시며 나 외로울때 좋은 친구라 주는 저 산 및에 백합 빛나는 새벽별 이땅 위에 비길 것이 없도다” 이러한 사랑의 예수님 향기가 동서남북으로 불때 그 사랑의 바람을 맞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사랑이 너무나 아름답고 고귀하여 “예수님 한 분 만으로 만족을 누리고 사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살아있는 사랑의 백합 향기가 온 세상에 퍼져 나가도 그것을 세상 사람들은 느끼지 못하고 자신의 성공의 꽃을 피우기 위해 돈의 꽃, 명예의 꽃, 권력의 꽃만 피우려다가 삶의 허무함 뿐 아니라 진공된 공간의 삶속에서 아무것도 갖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꽃”에서 나오는 아름다운 백합의 향기를 모르고 살아간다는 것은 진정한 삶의 행복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 안에 주님의 생명이 없기에 “살아 있는 것 같으나 죽은 것과 같은 영혼이 메말라 가는 삶”을 살기 때문이다. 4월 셋째주 주일은 기독교에서는 부활주일로 죽음에서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는 거룩한 날이다.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이든 신앙인이든 “살아있는 백합화이신 예수의 향기”를 모두가 쫓아가 주님께 찬양과 경배하면 그분께서 당신 안에 거하실 것이며 행복의 열매를 가득채워 주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