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는 아담을 만드신 후,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 하시며 하와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인간이 홀로 있는 것은 좋지 못하다는 의미로써, 처음부터 인간은 더불어 사는 존재로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문의 사람, 인 (人) 은 두 막대기가 기대어 있는 모양입니다. 인간은 서로 기대어 사는 존재라는 뜻이겠지요. 인간은 무엇보다 서로의 격려를 필요로 합니다. 내과 의사인 조지 아담스는 격려를 가리켜 “ 영혼의 산소” 라고 부릅니다. 그만큼 격려는 인간에게 있어 필수적이라는 의미이겠지요.
지난 주 심방했던 메리랜드 사시는 어떤 성도님이 이렇게 말합니다. “ 목사님, 우리 셀이 최고에요. 셀 목자님이 얼마나 우리를 챙겨주시는지, 때로는 너무 멀고 피곤하여 가기 싫은 마음이 들다가도 일단 셀에 참석하고 나면 늘 많은 힘을 받는답니다. 이제 셀 모임 가는 것이 우리의 낙이에요!” 좋은 예배나 설교보다 이 가정을 진정 행복하게 했던 것은 셀원들을 통한 격려의 만남이었던 것입니다. 아이가 피부의 습진으로 오래 동안 학교도 못가고 전신으로 번지는 등 악화되고 있다고 어떤 자매님이 힘 없는 음성으로 전화를 하셨습니다. 바로 심방팀과 함께 심방을 가서 기도해주고 돌아왔습니다. 며칠 후 그 아이의 어머니가 밝고 흥분된 음성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 목사님, 아이의 모든 습진이 거짓말같이 깨끗하게 나았어요. 정말 믿기지가 않아요. 얼마나 감사한지....“ 말을 잇지 못하는 그 자매님은 우리의 방문과 기도를 통하여 큰 격려를 받은 것입니다. 일본의 박 영서 선교사님께서 의사들도 고치지 못한다는 기이한 병을 치유받기 위해 10일간 금식하신다는 말씀을 듣고 어떤 성도님 매일 한 끼씩 금식하신다고 합니다. 박 선교사님이 들으시면 얼마나 격려가 되실까요? 지난 주, 일주일간 금식한다는 어떤 자매님의 이야기를 듣고 중보 기도팀이 심방을 갔습니다. ” 금식 지원하러 우리 모두 함께 왔지요“, 하며 그 댁에 들어서자, 그 자매님, ” 천군 만마를 얻은 것 같네요! “ 하시며 탄성을 지르십니다. 목사인 저 역시 성도님들의 격려 가운데 목회를 지탱할 힘을 얻곤 합니다. 지난 주에도 저를 울린 감동적인 격려의 e mail 이나 전화 등을 받았습니다. 그 가운데 어떤 자매님이 이런 전화를 하셨습니다. “목사님, 혼자서 참 외로우시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목사님 생각이 나서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그냥 전화 드려 봤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성도님들 목사님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아시지요? ” 어떻게 목사의 외로움까지 생각할 수 있는 기특한 성도가 다 있었을까, 그 자매님의 따뜻한 배려가 저에게 격려가 되었습니다.
사실 현재 혼자 살고 있는 저는 당연히 외로운 상황입니다. 게다가 누구든지 최고 결정권을 감당해야하는 사람들의 위치는 외롭습니다. 그런데 외로움을 크게 의식하지 못하며 살아가는 이유는 남들을 돌보느라 내 자신을 생각할 여유가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나의 격려가 필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나의 기도가 필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늘 생각하며 성도님들의 아픔과 어려움에 동참하고, 그들의 회복과 승리에 기뻐하다보면 제 자신을 생각할 시간이 남겨지지가 않고, 알 수 없는 힘이 위로부터 공급된다는 것을 종종 느낍니다.
이처럼 격려는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 모두에게 유익합니다. 말이 끄는 옛 썰매 경기에서 챔피언 말은 2톤 무게를 끌었고 2위의 말은 1.96톤의 말을 끌었습니다. 사람들은 두 말이 함께 끌면 얼마나 끌까 호기심으로 함께 끌게 했더니 5.5톤 이상을 끌더랍니다. 수학적으로 계산하면 약 4톤 미만을 끌어야할 두 말이 힘을 합했더니 새로운 능력이 더해졌다는 것입니다. 이를 시너지 효과라고 부르지요. 성도님들의 상호 격려는 시너지 효과의 극대화를 불러오는 지름길이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너희 다섯이 백을 좇고, 너희 백은 만을 좇겠다고 했습니다. ( 레 26:8).
셀레스티 홈은 “ 우리는 격려의 힘으로 살아간다. 격려를 받지 못하면 서서히, 슬프게, 비통하게 죽어간다.” 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모두 “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 히 10:24) 격려자들이 된다면 얼마나 이 세상이 아름다와질까요?

/글 이성자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