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 사람-남자와 여자 (2)

창세기 1 장은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만드신 큰 그림과 큰 틀을 보여주신다. 남녀 구별없이 둘 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고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커다란 과제를 안겨 주셨다. 창세기 2 장은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지은 순서와 여자를 지으신 배경과 목적을 구체적으로 보여 주신다.

일견하여 알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실 때의 순서는 남자 먼저, 여자 나중이다. 모든 남자들은 여자들에게서 태어나지만, 첫 사람이었던 아담과 이브 사이의 관계는 그렇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남자인 아담을 먼저 지으시고, 아담에게서 여자인 이브를 만드셨다.

이 순서를 근거로 하여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그의 서신에서 남자와 여자 사이에는 심오한 권위 질서가 존재한다고 설명했다. 남자와 여자가 동등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격체이지만,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고린도전서 11장 3절, 8절) 라고 한 것이다. 하나님-그리스도-남자-여자 순의 영적 위계 질서가 있다고 하는 뜻이다.

여권 신장과 남녀 평등의 사상이 만연한 현 시대의 관점에서 고린도전서 11장에 나오는 여자의 머리에 쓰는 것이나 영적 권위 질서에 대한 가르침들은 참 매력이 없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가정과 교회라고 하는 상황을 전제로 하여 남자와 여자 사이에 존재하는 영적 질서를 창조 순서에서 찾고 거기에 따라 순응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종종 남녀 평등을 주장하는 분들이 여자가 머리에 쓰고 기도한다고 하는 것은 시대적인 문화의 산물일 뿐이라고 해석하여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실제로 아미쉬나 메노나이트 같은 극히 소수의 교회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교회들은 문자적으로 여자들이 머리에 무엇을 써야만 기도 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말이, 곧, 남자와 여자 사이에는 더 이상 권위 질서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뜻은 아니다. 권위 질서에 관하여 바울이 제시한 근거는 단순히 머리에 쓰는 것만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가 지음을 받은 창조 순서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서신서에 보면, 사도 바울은 동일한 원리 위에서 여자들이 교회에서 순종할 것과 잠잠할 것을 명령했다 (디모데전서 2장 11절-15절).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한다”고 말씀했는데, 여기서 “주관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스스로 권세를 부리다,” “남의 권위를 침해하다”는 뜻을 갖고 있다. 풀어 쓰면, “교회에서 여자들이 스스로의 권세를 가지고 남자들 위에 군림하듯 권위를 행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뜻이된다. 물론 사도 바울은 여자들에게 교회 안에서나 가정에서 순종할 것을 명령하는 근거로 창조 순서에 타락의 순서를 하나 더 추가 했다. 뱀의 꾐에 빠져 죄를 짓게 된 것도, 이브가 먼저 유혹에 넘어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담을 돕도록 지음 받은 사람인 여자가 오히려 아담으로하여금 넘어지게 하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남자들을 돕기 위하여 지음을 받은 여자들은 교회에서 잠잠하고 남편들에게 순종하는 것이 남자들을 돕는 것이다” 라고 하는 여운이 짙게 깔려 있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위하여 이브를 만드신 배경과 목적은 하나님 보시기에 아담이 홀로 있다는 것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창세기 2장 18절). 물론 여기의 “좋지 못하니”라고 하는 말은 아담이 한 사람으로서 불완전하게 지음 받은 사람이었다는 뜻이 아니다. 한 사람 남자로서는 완전한 존재이었지만, 동등한 사람으로 지음을 받은 여자, 이브와 함께 있는 그림을 놓고 볼 때, 상대적으로 좋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브를 지은 목적은 그 무엇인가 부족해 보이는 그것을 충족시켜 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이브를 “돕는 배필” (창세기 2장 18절) 이라고 불렀다. 아담은 한 사람 남자로서는 빠진 것이 없는 완전한 사람이었지만, 여자인 이브가 없이는 생육하고 번성 할 수 없는 고독한 존재였다. 하나님께서 여자를 지으신 것은 이 고독함을 달래 주고, 여자를 통하여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이루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남자는 여자가 없이는 온전하지 않다. 무엇인가 어설프고 모자라는 것 같을 수 밖에 없다. 외로울 수 밖에 없다. 이 말을 넓게 적용하면, 남자가 없는 여자들도 마찬가지 일 수 밖에 없다. 여자도 한 사람 여자로서는 빠진 것이 없는 완전한 사람이지만,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신 하나님의 창조 구도 속에서 보면 여전히 절반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스스로 이 사실을 깨달아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모든 짐승들을 아담 앞으로 지나가게 하셨다. 아담으로 하여금 여자의 필요성을 느끼도록 만들어 주시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암, 수로 짝지워진 모든 짐승들, 새들을 아담에게 보내어 이름을 짓게 하셨다고 하는 것은 유머스럽기조차하다. 이 말씀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결혼하지 않고 홀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은사 가운데 하나라고는 하지만 (마태복음 19장12절), 남자 홀로, 또는 여자 홀로 사는 것보다는 남자와 여자가 함께 살 때가 훨씬 더 인간답고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것이라고 하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 시대는 은연 중에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결혼 제도나 가정을 부인하고 독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늘어 가고 있다고 한다. 사람들은 스스로 그만큼 더 외롭고 힘들게 사는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인간적으로 말하면, 아담과 이브가 범죄하여 타락한 이후의 세상에서, 결혼하면 홀로 있는 사람들보다 더 행복하게, 더 잘 살게 된다고 하는 보장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아담으로 하여금 여자의 필요성을 느끼게 한 후 이브를 만들어 주신 것을 보면, 남자, 여자로 지음을 받은 사람들은, “순리대로,” “함께 살아야,” 상대적으로 덜 외롭고, 더 행복하게 살수 있도록 지음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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