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감기 걸리셨어요?” 금요기도회를 마치고 나오는데 한 집사님께서 제게 물으셨습니다. “아니요, 괜찮은데요?” “그럼, 애들한테 또 소리지르셨어요?” 집사님은 까르르 웃으시면서 장난처럼 다시 물으셨습니다. “예? 뭐 그냥, %@#&*%$...” 뭐라고 대꾸를 했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로 그냥 얼버무리고 말았습니다. 머리는 “아뇨, 기도하다 보니까 목이 쉬었네요…”라고 말하라고 했는데, 또 80-90 %이상은 기도하다 쉰 것이 맞는데, 그래도 집에서 애들한테 소리를 지른 일이 있는지라, 족집게 같은 집사님께 대꾸도 못하고 그냥 당하고(?) 말았습니다. 집에 돌아오면서 아내한테 웃으면서 물었습니다. “여보, 내 얼굴에 ‘나 소리지른 사람이야’라고 써있어?”

요즘, 식구들에게 자꾸 짜증을 내는 제 자신을 발견합니다. 뇌출혈로 거반 죽었던 아내가 회복되고, 도저히 꿈꿀 수 없었던 상황 가운데 교회를 개척하게 하시고 또 뭔가를 이루어가시는 이 모든 일들이 다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잘 알면서도 여전히 불평할 때가 있습니다. 그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아이들이 이렇게 잘 자라준 것이 얼마나 큰 감사의 이유인 줄을 알면서도 ‘너는 왜 항상 이 정도뿐이냐’고 닦달할 때가 많습니다. 캄캄한 교회당 바닥에 주저 앉아 기도하는데 마음 한 켠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너는 여전히 자기 연민에 빠져있구나…” 그렇습니다. 그랬던 것입니다. 저는 저를 불쌍히 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내가 좀 더 건강했더라면 내가 더 좋은 사역자가 될 수 있었을 텐데…’, ‘아이들이 좀 더 나를 잘 이해해주고, 좀 더 잘 도와주었더라면 내가 이렇게 힘들지는 않을 텐데…’라는 지극히 자기 중심적인 마음이 저의 감사를 파먹고 있었던 것입니다. 감사와 불평, 그것은 종이 한 장 차이일 뿐이고, 그 차이를 만드는 것은 내 안에 뿌리내린 자기 연민의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QT를 하다가 이런 글귀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당신의 동의 없이는 그 누구도 당신에게 고통을 안겨 줄 수 없다…” 미국의 영웅, 벤자민 프랭클린 대통령의 부인 엘리노어 루즈벨트 여사의 말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 ‘어떤 일’이, 또 ‘어떤 상황’이 나를 힘들게 하고 고통스럽게 만들었다고 말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괴롭고 힘든 이유는 어떤 외부의 상황 때문이 아니라 그 상황을 괴롭고 힘든 일로 느끼고 받아드리기로 결정한 나 자신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닥친 문제 앞에서 ‘좌절할 것인가’ 혹은 ‘소망을 찾을 것인가’의 문제는 전적으로 내 자신에게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는 전도서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하나님이 잘되게 하실 땐 마음을 다해 기뻐하고 그렇지 못할 땐 그렇게 하셨던 하나님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잘 될 때만 호들갑 떨지 말고, 안 될 때도 그분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기대하고 견디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앞 날을 알지 못하는 인생들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지혜라는 것입니다. 혹, 지금 자기 연민에 빠져 있는 분은 안 계십니까? 자기 연민으로 인해 감사의 마음을 잃고 있지는 않습니까? 곤고한 날, 하나님과 그 분의 은혜를 기억할 수 있다면 우리는 오늘 우리들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문제들을 고난이라 읽지 않고 소망이라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모두 힘을 내십시오. 여러분들을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