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5:11-6:3에 보면 성숙한 신자가 되라는 권유가 있다. 신앙의 연조를 보면 지금쯤은 벌써 남을 지도하는 선생이 되었어야 할 처지인데 아직도 어린이의 믿음에 머물러 있어 초보적 문제에만 얽매어 있으니 한심하다는 뜻이다.

언제까지나 단단한 음식을 먹지 못하는 젖먹이 상태에서 회개니 믿음이니 세례니 안수니 부활이니 심판이니 하는 초기적 이슈가 관심의 초점이 되어 신앙 본연의 성숙한 경지로 나아가지 못하느냔 말이다. 그러니 속히 교리적 논의 같은 것에서 이유 (離乳) 하여 전진하라는 뜻이다.

신앙의 발전 과정에도 심리학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고착'이니 '미숙'이니 '퇴영'이니 하는 것이 있는 것 같다. 어떤 신자는 주일학교 시절에 배웠던 진리의 동화적인 표현과 축자적인 이해에 머물러 있어서 종교적 진리를 내면화하고 더 깊은 차원에서 이해하지 못하는 이가 있다. 또 어떤 이는 언제까지나 신앙을 사적이고 내면적 문제 해결에 고정화시켜 사회 의식이나 윤리 의식이 결여된 사람이 있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다시 터를 닦는 일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히 6:2)고 한 말은 교리적인 해석이나 신앙의 이론적 해명 단계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뜻이다. 잘 믿는다는 사람일수록 율법적인 경우가 많다. 그들은 복음도 율법적으로 해석한다. 그들은 그들의 배타성과 독선을 은폐하는 수단으로 교리적인 것을 거론하는 수가 많다.

그러나 예수를 보라. 그는 자유롭고 하늘을 나는 새와 같이 무애한 분이었고 교리적 인형이 아니었다. 성숙한 믿음은 전전긍긍하고 기를 못 피고 죄책감에 떠는 상태가 아니라 자유롭고 활발하고 생산적이고 사유받음의 기쁨이 충만한 경지이다.

개인도 교회도 성숙해지면 자의식에서 타의식으로 나아가며 자기 내적 문제에 집착하던 단계에서 외향적, 사회적 관심을 갖게 되며 이웃에 대한 손 뻗침이 있게 된다. 그와 반대로 개인도 교회도 국민도 미숙하면 내부적 정력을 분열 분파 동족상잔으로 상쇄하여 낭비하고 마는 것이다.

지난 주일 예배를 드리기 위해 우리지역의 어느 교회를 방문했다. 그 교회에 다다라서 나는 잠시 혼란을 겪었다. 한국어로 된 교회 A보드가 2개가 길가에 보였기 때문이다. ‘교회당이 가까운 위치에 있구나…’하며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목적한 교회 로비에 들어갔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인가! 같은 미국교회당 안에서 한 교회는 1층에서 한 교회는 지하에서 동시에 예배가 드려지고 있었다.

필자가 여러 이민교회들을 방문하고 집회를 해 보았는데, 이런 경우는 처음 보았다. 원래 3년동안 지금의 미국예배당을 무상으로 빌려 예배드리는 교회에 인근지역의 모교회에서 갈라 나온 이들이 지난 주부터 주인격인 미국교회에 일정액의 렌트비를 내고 들어왔다는 것이다. 모두 비신자들을 전도하여 겨우 열손가락도 안 되는 성도들을 섬기고 있던 목사님과 사모님의 눈에 눈물이 맺힌 것을 35명의 새로 전입(?)한 교회의 목사와 성도들은 알까?

과연 그들이 드리는 예배 속에 화목의 하나님, 평화의 예수님의 임재가 진심으로 존재할까? 교회의 영문이름도 같았다. 두 교회가 하나로 합하든지, 아니면 어느 한 교회가 믿음의 성숙을 보였으면 정말 좋겠다.

박상원 목사_SAM USA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