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환이란 가수가 부른 “타 타 타” 라는 유행가가 대 히트한 적이 있다. 그때 마침 “사랑이 뭐길래” 라는 드라마가 방송되었는데 극중에 김혜자가 이 곡을 애창해서 자주 틀어주었던 때문이기도 했다.
그 가사의 일절이 이렇다. “내가 나를 모르는데 넌들 나를 알겠느냐?” 그렇다. 이 세상에는 모르는 것투성이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치도 안되는 사람 마음은 알 수 없다지 않는가? 하물며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불신자들에게는 가장 어려운 일이다. 특히나 포스트 모던적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은 허무주의(nihilism)에 싸여 무신론(atheism)적 사고와 행동이 팽배해지고 있다.
일테면 세계 역사를 주도하는 동인이 신이 아니라 인간이며, 인간의 원리인 보편적 이성의 표상인 세계정신(Weltgeist)이라고 주장하는 헤겔에 의해서, 이 세계는 더 이상 하나님이 통치하지 않으며, 인간이 역사를 창조하며, 인간의 필연성에 의해 주도된다는 인간의지를 높은 기치로 내 세우고 있는 까닭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유대인들은 세상에서 하나님을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는 민족이다. 히브리어의 ‘안다’는 단어는 ‘야다’인데 이 단어는 남편이 부인을 알듯이 안다는 말이다. 그 정도로 야훼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나 그것은 착각에 불과하다. 율법을 받았다고, 전통을 지킨다고 으쓱대는 유대인이지만 그들은 하나님으로 오신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한 무지자 들 인 것이다.
그러나 예수 믿는 신자가 되면 당연히 하나님을 안다. 이것은 생각할 여지도 없는 일이다. 그래서 동물적으로 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토론이나 사고의 대상이 아니다. 더나가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가 매일 매순간 우리 가운데 이루어짐을 아는 것이다.
신자의 삶의 특징은 하나님의 섭리가 신비하게 꼭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섭리가 내 안에서 분명히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까닭이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신자가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자라는 자각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하나님의 그 뜻 하신 바대로 지목해서, 꼭 집어서 나를 부르셨다것을 깨닫는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섭리가 매일 매일 나타난다는 것을 믿지 못하겠는가? 관건은 이전보다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이다. 하나님의 신비한 섭리는 신자 안에서 모든 일 가운데 일어난다. 하나님의 섭리가 아닌 것이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이 일이 잘 풀릴 때는 이것이 하나님 섭리라 생각하고 좋아하나 조금만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이것을 하나님의 섭리적 차원에서 이해하려 하지 않고 즉시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하고 심지어는 하나님을 불신한다.
만약 이런 식의 신앙인이라면 이는 저 塞翁之馬의 불신 현인보다 못한 것이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이런 삶의 태도를 지닌 것이 아니라, 자연의 이치에 순복한 것뿐이다. 어떻게 보면 체념주의인 것이다. 그러나 신자가 가지는 섭리의 신앙은 체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적극적으로 나의 삶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것도 모든 일 가운데서 말이다.
그 가사의 일절이 이렇다. “내가 나를 모르는데 넌들 나를 알겠느냐?” 그렇다. 이 세상에는 모르는 것투성이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치도 안되는 사람 마음은 알 수 없다지 않는가? 하물며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불신자들에게는 가장 어려운 일이다. 특히나 포스트 모던적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은 허무주의(nihilism)에 싸여 무신론(atheism)적 사고와 행동이 팽배해지고 있다.
일테면 세계 역사를 주도하는 동인이 신이 아니라 인간이며, 인간의 원리인 보편적 이성의 표상인 세계정신(Weltgeist)이라고 주장하는 헤겔에 의해서, 이 세계는 더 이상 하나님이 통치하지 않으며, 인간이 역사를 창조하며, 인간의 필연성에 의해 주도된다는 인간의지를 높은 기치로 내 세우고 있는 까닭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유대인들은 세상에서 하나님을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는 민족이다. 히브리어의 ‘안다’는 단어는 ‘야다’인데 이 단어는 남편이 부인을 알듯이 안다는 말이다. 그 정도로 야훼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나 그것은 착각에 불과하다. 율법을 받았다고, 전통을 지킨다고 으쓱대는 유대인이지만 그들은 하나님으로 오신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한 무지자 들 인 것이다.
그러나 예수 믿는 신자가 되면 당연히 하나님을 안다. 이것은 생각할 여지도 없는 일이다. 그래서 동물적으로 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토론이나 사고의 대상이 아니다. 더나가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가 매일 매순간 우리 가운데 이루어짐을 아는 것이다.
신자의 삶의 특징은 하나님의 섭리가 신비하게 꼭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섭리가 내 안에서 분명히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까닭이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신자가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자라는 자각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하나님의 그 뜻 하신 바대로 지목해서, 꼭 집어서 나를 부르셨다것을 깨닫는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섭리가 매일 매일 나타난다는 것을 믿지 못하겠는가? 관건은 이전보다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이다. 하나님의 신비한 섭리는 신자 안에서 모든 일 가운데 일어난다. 하나님의 섭리가 아닌 것이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이 일이 잘 풀릴 때는 이것이 하나님 섭리라 생각하고 좋아하나 조금만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이것을 하나님의 섭리적 차원에서 이해하려 하지 않고 즉시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하고 심지어는 하나님을 불신한다.
만약 이런 식의 신앙인이라면 이는 저 塞翁之馬의 불신 현인보다 못한 것이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이런 삶의 태도를 지닌 것이 아니라, 자연의 이치에 순복한 것뿐이다. 어떻게 보면 체념주의인 것이다. 그러나 신자가 가지는 섭리의 신앙은 체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적극적으로 나의 삶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것도 모든 일 가운데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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