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여기의 ‘열방’이라는 말은 이방을(Ethnos)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Laos라는 단어로만 사용합니다. 구약은 하암- 하 고임(Gentile) 그러므로 모든 나라, 족속, 열방, 방언과 같은 말로 요한 계시록에 많이 나옵니다. 이 말들은 모두 이방인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방인들의 찬양을 받고 싶어 하시고 하나님은 이방인들의 감사를 받고 싶어 하십니다.
두 번째 10절은 신명기 32장 43절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열방들아 주의 백성들과 함께 즐거워하라” 열방이 누구입니까? 네 이방인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아랍 사람들이 같이 찬양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한국인들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주님을 향해 경배하기를 원하십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원수들과 함께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싫어하는 사람과 함께 찬송 부르기를 원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전도하라고 하면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그 사람이 천국에 가는 것이 싫어서 그렇다고 합니다. 여기서 만나는 것도 지겨운데 천국에 가서 또 만나는 것이 싫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받아들여야 합니다. 백인은 흑인을 받아들여야 하고 남한국민은 북한국민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여러분, 부부사이도 서로 받아들여야 행복합니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죽도록 상처받고 결국 이혼하게 됩니다. 허물과 실수가 있어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용납하고 약점을 사랑하고, 연약한 부분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바로 부부입니다. 서로 물고 뜯고 비판하는 것은 부부가 아닙니다. 비판은 누구든지 쉽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잘못은 누구든지 쉽게 할 수 있는 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것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용납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성경말씀은 당신이 십자가의 복음을 진정 깨달은 사람이라면 하나님이 당신을 용납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주변의 사람을 사랑하고, 자신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살지 밀고 . 우리가 우리 인생의 주인이 되지 말고 자신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게 하며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으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자기를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가정에 부부싸움이 일어납니까? 그것은 자기중심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나를 좀 이해해 달라.’‘당신은 내 말을 좀 들어야 해..날 뭘로 보고 있는 거야?.’이렇게 자기 자존심만 내세우고 자기중심적으로 살게 되면 불화가 끊이지 않습니다. 회사에서도 사업장에서도 일어나는 불화가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셋째는 11절에서 시편 117편 1절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또 모든 열방들아 주를 찬양하며 모든 백성들아 저를 찬송하라” 시편에서는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모든 백성, 모든 열방, 모든 나라, 모든 방언이 주께 돌아와 찬송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와 나를 구분 짓지 말고 포용하고 연합하라는 것입니다.
네 번째 12절에서는 이사야 11장 10절을 말씀을 인용하면서 우리가 사랑하기를 거부한 이방인들을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네가 포기한 그 사람,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 너희는 이것을 알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또 이사야가 가로되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이새는 다윗의 아버지입니다. 메시아는 다윗의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 메시아가 오면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모든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는 이가 있으리라고 하십니다.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고 하셨습니다. 진정한 소망은 온 인류의 메시아로 오시는 예수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 소망은 이스라엘에게 뿐만 아니라 모든 열방, 모든 나라, 모든 백성, 모든 방언들에게 소망이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구약을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는 중심으로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구약을 읽을 때 메시아라는 키를 가지고 창세기부터 시작하여 말라기까지 죽 들여다보며 는 흥분하지 않고는 읽을 수가 없습니다. 이사야와 예레미야등 모두 예수님에 대한 예언으로 가득히 차 있습니다. 아가서와 에스더에도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온 인류의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모든 이방인들, 두고두고 올 모든 인류의 하나님인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 당시에는 이방인들도 하나님이 사랑하셨다는 말에 굉장한 거부감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돌로 쳐서 죽일 만큼 거부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성경을 인용하면서 ‘구약의 모든 메시지는 메시아이고 그 메시아는 이방인들을 사랑하셔서 구원받기를 원하신다. 이방인들을 무시하지 말고 거부하지 말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다른 말로 말하면 강한 자가 약한 자의 약점을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형제를 비판하지 말고 도와주라는 것입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우리 하나님은 소망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만난 자마다 소망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살아납니다. 소망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힘든 인생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만난 자는 깊은 절망에서 헤어날 것이고 무서운 질병에서 치유될 것이며 모든 압제와 억압과 고통에서 해방될 것입니다. 소망의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영접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자마다 부활과 생명과 기적을 경험하게 될 것을 믿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이런 축복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요즘 아는 사람을 만나서 잘되어 가십니까?" 라고 하면, "뭐 이 불경기에 뭐가 신나겠습니까?." "장사도 통 안 되고 이러다 하루아침에 모두 문 닫는 게 될까봐 걱정 입니다" 라고...하소연 합니다. "잘됩니다", "신납니다" "요즘 정말 살맛납니다." 라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세요 분명히 지난날에 비교하면 월급들도 올랐고, 가전제품들을 다 들여놓고, 전화, 텔레비전, 냉장고, 세탁기 등등....옛날에는 세종대왕도 가지지 못했던 것들을 다 가지고 살면서도 살맛이 안 난다니....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하게 되는 것은 진정 소망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소망을 어디에다 세워 놓았는가? 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참소망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그 소망은 십자가에서 완성되었습니다. 이 소망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음 안에서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기쁨과 평강을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13절에 굉장히 중요한 기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소망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기쁨과 평강과 그 축복을 어떻게 받아 누릴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그것은 바로 ‘성령의 능력’으로 가능합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이 이 성령의 능력을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성령님을 깊게 경험하는 것을 바로 성령충만이라고 합니다.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믿어 자기 안에 성령님이 마음껏 역사 하실 수 있게 채널을 맞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를 믿지만 성령님과 채널이 엇갈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의 힘으로 예수를 믿습니다. 자기의 힘으로 찬양하고 기도하기 때문에 오래 가지 못합니다. 그리고 영적인 열매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좋은 자동차가 아무리 고급 휘발유를 넣는다 해도가 기어를 중립에다가 놓고 악세레타를 밟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소리만 시끄럽게 나고 연기만 풀물 납니다. 바로 기어를 전진으로 놓아야 차가 가는 것입니다. 이 기어를 제 것에 맞게 놓는 것이 바로 성령 충만 입니다. 코드를 맟추는 것, 채널이 성령님에게 맞추어져 있는가. 저는 여러분 안에 성령님 깊은 교통이 이루어지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 충만이고 성령의 기름부음의 역사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성령님이 내 몸 안에서 일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물과 같습니다.
맹물 같은 그리스도인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물은 열을 가하면 펄펄 끓어서 수증기가 나고 그 수증기의 힘으로 기차가 움직이고 전기를 만들어 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기차를 움직이고 전기를 만들어 내는 것처럼 능력이 있는 그리스도인이 있고 어떤 그리스도인은 물 은 물인데 맹물에 불과한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그리스도인입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힘이십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능력이십니다. 저는 여러분 안에 계신 성령님이 마음껏 역사하기를 바랍니다. 그 성령님의 역사가 에너지로 나오고 그것이 기도와 전도와 사랑과 영적인 동력으로 나오는 축복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제가 청년 때에 “서부전선 이상 없다” 라는 영화를 본적이 있습니다. 1차 대전 때의 일인데, 군인들을 리쿠르트- 모집 하는 사람의 선전이 얼마나 그럴싸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이때에 출세 좀 해볼까 하는 사람들, 영웅 심리에 취하여 우쭐해서 많은 사람들이 군에 입대하였는데, 실제 군대생활을 해 보니까 그 사람 말과는 전혀 다른 세상인 것이지요. 출세나 전쟁영웅에 대한 꿈은 사라지고, 오직 죽음이라는 공포에 시달리면서 절망상태로 그저 하루하루를 막연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전쟁에 환멸을 느끼면서 억지 군대생활을 하다가 오랜만에 휴가를 나옵니다.
정말 꿈같은 휴가를 얻어 집으로 가던 중 자기를 리쿠르트 했던 그 사람이 아직도 거리에서 자기에게 선전하던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젊은이들을 군대로 부르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자기처럼 기쁨과 희망을 가지고 군대에 입대하는 젊은이들을 보면서, 몇 년 전 자기 모습을 생각하며 씁쓸한 미소를 짓습니다. 휴가가 끝나고 귀대하여 얼마 안 된 어느 날, 자기의 친한 동료 중에 한 사람이 총을 맞아 의무실에서 죽어가고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자 같이 같던 동료하나가 그 죽어 가는 동료의 군화가 자기 것보다 훨씬 새것인 것을 보고서 그가 죽고 나면 그 군화를 자기가 가지겠다고 탐을 냅니다. 죽어 가는 동료를 위로하러 갔다가 그러한 태도로 변하는 자기 동료를 보고서 참으로 처량함을 느낍니다.
결국 그 병사가 죽자, 그 군화를 탐냈던 그 친구는 죽은 동료의 군화를 볏겨서 자기가 신고 전장에 나갑니다. 그리고 그날 그도 그 새 군화를 신은 채 싸우다가 적병의 총을 맞아 죽게 됩니다. 그날 그 전장에서 그렇게 죽을 줄 알았다면, 다른 사람 가슴 아프게 하면서 까지 그 군화를 탐내지는 아니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 어느 맑은 아침, 주인공이 보초를 서고 있는데 초소 앞에서 날아다니는 나비가 참으로 사랑스러워 보입니다. 그리하여 고향생각에 젖은 채 무심코 그 나비를 잡으려고 손을 내밀다가 적병에게 발각되어 적병이 쏘는 총에 맞아 죽게 됩니다.
이렇게 소중한 한 생명이, 한 가정의 소중한 아들이, 소중한 형이 그리고 소중한 동생이, 그리고 소중한 친구가 죽어 갔는데도 그날 본부에 보고된 보고서에는, “서부전선 이상 없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영적인 전선에는 이상이 없습니까? 지금 영적인 커다란 문제가 있음에도 여전히 우리는 자신에게 내 영적전선에는 이상 없음하고 무시하고 회피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이 말씀으로 우리를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남의 탓을 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다가갑시다. 그리고 따뜻한 손길, 부드러운 말 한마디를 먼저 건네 봅시다. 너와 나의 담이 허물어지고 우리가 되는 것 그것을 하나님은 원 하십니다. 정말로 하나님 앞에 우리 영적 전선 이상무라는 기쁨의 보고를 드리기를 간절히 축원 합니다.
여기의 ‘열방’이라는 말은 이방을(Ethnos)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Laos라는 단어로만 사용합니다. 구약은 하암- 하 고임(Gentile) 그러므로 모든 나라, 족속, 열방, 방언과 같은 말로 요한 계시록에 많이 나옵니다. 이 말들은 모두 이방인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방인들의 찬양을 받고 싶어 하시고 하나님은 이방인들의 감사를 받고 싶어 하십니다.
두 번째 10절은 신명기 32장 43절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열방들아 주의 백성들과 함께 즐거워하라” 열방이 누구입니까? 네 이방인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아랍 사람들이 같이 찬양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한국인들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주님을 향해 경배하기를 원하십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원수들과 함께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싫어하는 사람과 함께 찬송 부르기를 원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전도하라고 하면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그 사람이 천국에 가는 것이 싫어서 그렇다고 합니다. 여기서 만나는 것도 지겨운데 천국에 가서 또 만나는 것이 싫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받아들여야 합니다. 백인은 흑인을 받아들여야 하고 남한국민은 북한국민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여러분, 부부사이도 서로 받아들여야 행복합니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죽도록 상처받고 결국 이혼하게 됩니다. 허물과 실수가 있어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용납하고 약점을 사랑하고, 연약한 부분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바로 부부입니다. 서로 물고 뜯고 비판하는 것은 부부가 아닙니다. 비판은 누구든지 쉽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잘못은 누구든지 쉽게 할 수 있는 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것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용납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성경말씀은 당신이 십자가의 복음을 진정 깨달은 사람이라면 하나님이 당신을 용납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주변의 사람을 사랑하고, 자신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살지 밀고 . 우리가 우리 인생의 주인이 되지 말고 자신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게 하며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으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자기를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가정에 부부싸움이 일어납니까? 그것은 자기중심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나를 좀 이해해 달라.’‘당신은 내 말을 좀 들어야 해..날 뭘로 보고 있는 거야?.’이렇게 자기 자존심만 내세우고 자기중심적으로 살게 되면 불화가 끊이지 않습니다. 회사에서도 사업장에서도 일어나는 불화가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셋째는 11절에서 시편 117편 1절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또 모든 열방들아 주를 찬양하며 모든 백성들아 저를 찬송하라” 시편에서는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모든 백성, 모든 열방, 모든 나라, 모든 방언이 주께 돌아와 찬송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와 나를 구분 짓지 말고 포용하고 연합하라는 것입니다.
네 번째 12절에서는 이사야 11장 10절을 말씀을 인용하면서 우리가 사랑하기를 거부한 이방인들을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네가 포기한 그 사람,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 너희는 이것을 알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또 이사야가 가로되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이새는 다윗의 아버지입니다. 메시아는 다윗의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 메시아가 오면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모든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는 이가 있으리라고 하십니다.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고 하셨습니다. 진정한 소망은 온 인류의 메시아로 오시는 예수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 소망은 이스라엘에게 뿐만 아니라 모든 열방, 모든 나라, 모든 백성, 모든 방언들에게 소망이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구약을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는 중심으로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구약을 읽을 때 메시아라는 키를 가지고 창세기부터 시작하여 말라기까지 죽 들여다보며 는 흥분하지 않고는 읽을 수가 없습니다. 이사야와 예레미야등 모두 예수님에 대한 예언으로 가득히 차 있습니다. 아가서와 에스더에도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온 인류의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모든 이방인들, 두고두고 올 모든 인류의 하나님인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 당시에는 이방인들도 하나님이 사랑하셨다는 말에 굉장한 거부감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돌로 쳐서 죽일 만큼 거부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성경을 인용하면서 ‘구약의 모든 메시지는 메시아이고 그 메시아는 이방인들을 사랑하셔서 구원받기를 원하신다. 이방인들을 무시하지 말고 거부하지 말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다른 말로 말하면 강한 자가 약한 자의 약점을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형제를 비판하지 말고 도와주라는 것입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우리 하나님은 소망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만난 자마다 소망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살아납니다. 소망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힘든 인생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만난 자는 깊은 절망에서 헤어날 것이고 무서운 질병에서 치유될 것이며 모든 압제와 억압과 고통에서 해방될 것입니다. 소망의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영접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자마다 부활과 생명과 기적을 경험하게 될 것을 믿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이런 축복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요즘 아는 사람을 만나서 잘되어 가십니까?" 라고 하면, "뭐 이 불경기에 뭐가 신나겠습니까?." "장사도 통 안 되고 이러다 하루아침에 모두 문 닫는 게 될까봐 걱정 입니다" 라고...하소연 합니다. "잘됩니다", "신납니다" "요즘 정말 살맛납니다." 라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세요 분명히 지난날에 비교하면 월급들도 올랐고, 가전제품들을 다 들여놓고, 전화, 텔레비전, 냉장고, 세탁기 등등....옛날에는 세종대왕도 가지지 못했던 것들을 다 가지고 살면서도 살맛이 안 난다니....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하게 되는 것은 진정 소망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소망을 어디에다 세워 놓았는가? 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참소망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그 소망은 십자가에서 완성되었습니다. 이 소망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음 안에서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기쁨과 평강을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13절에 굉장히 중요한 기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소망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기쁨과 평강과 그 축복을 어떻게 받아 누릴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그것은 바로 ‘성령의 능력’으로 가능합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이 이 성령의 능력을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성령님을 깊게 경험하는 것을 바로 성령충만이라고 합니다.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믿어 자기 안에 성령님이 마음껏 역사 하실 수 있게 채널을 맞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를 믿지만 성령님과 채널이 엇갈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의 힘으로 예수를 믿습니다. 자기의 힘으로 찬양하고 기도하기 때문에 오래 가지 못합니다. 그리고 영적인 열매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좋은 자동차가 아무리 고급 휘발유를 넣는다 해도가 기어를 중립에다가 놓고 악세레타를 밟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소리만 시끄럽게 나고 연기만 풀물 납니다. 바로 기어를 전진으로 놓아야 차가 가는 것입니다. 이 기어를 제 것에 맞게 놓는 것이 바로 성령 충만 입니다. 코드를 맟추는 것, 채널이 성령님에게 맞추어져 있는가. 저는 여러분 안에 성령님 깊은 교통이 이루어지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 충만이고 성령의 기름부음의 역사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성령님이 내 몸 안에서 일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물과 같습니다.
맹물 같은 그리스도인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물은 열을 가하면 펄펄 끓어서 수증기가 나고 그 수증기의 힘으로 기차가 움직이고 전기를 만들어 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기차를 움직이고 전기를 만들어 내는 것처럼 능력이 있는 그리스도인이 있고 어떤 그리스도인은 물 은 물인데 맹물에 불과한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그리스도인입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힘이십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능력이십니다. 저는 여러분 안에 계신 성령님이 마음껏 역사하기를 바랍니다. 그 성령님의 역사가 에너지로 나오고 그것이 기도와 전도와 사랑과 영적인 동력으로 나오는 축복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제가 청년 때에 “서부전선 이상 없다” 라는 영화를 본적이 있습니다. 1차 대전 때의 일인데, 군인들을 리쿠르트- 모집 하는 사람의 선전이 얼마나 그럴싸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이때에 출세 좀 해볼까 하는 사람들, 영웅 심리에 취하여 우쭐해서 많은 사람들이 군에 입대하였는데, 실제 군대생활을 해 보니까 그 사람 말과는 전혀 다른 세상인 것이지요. 출세나 전쟁영웅에 대한 꿈은 사라지고, 오직 죽음이라는 공포에 시달리면서 절망상태로 그저 하루하루를 막연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전쟁에 환멸을 느끼면서 억지 군대생활을 하다가 오랜만에 휴가를 나옵니다.
정말 꿈같은 휴가를 얻어 집으로 가던 중 자기를 리쿠르트 했던 그 사람이 아직도 거리에서 자기에게 선전하던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젊은이들을 군대로 부르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자기처럼 기쁨과 희망을 가지고 군대에 입대하는 젊은이들을 보면서, 몇 년 전 자기 모습을 생각하며 씁쓸한 미소를 짓습니다. 휴가가 끝나고 귀대하여 얼마 안 된 어느 날, 자기의 친한 동료 중에 한 사람이 총을 맞아 의무실에서 죽어가고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자 같이 같던 동료하나가 그 죽어 가는 동료의 군화가 자기 것보다 훨씬 새것인 것을 보고서 그가 죽고 나면 그 군화를 자기가 가지겠다고 탐을 냅니다. 죽어 가는 동료를 위로하러 갔다가 그러한 태도로 변하는 자기 동료를 보고서 참으로 처량함을 느낍니다.
결국 그 병사가 죽자, 그 군화를 탐냈던 그 친구는 죽은 동료의 군화를 볏겨서 자기가 신고 전장에 나갑니다. 그리고 그날 그도 그 새 군화를 신은 채 싸우다가 적병의 총을 맞아 죽게 됩니다. 그날 그 전장에서 그렇게 죽을 줄 알았다면, 다른 사람 가슴 아프게 하면서 까지 그 군화를 탐내지는 아니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 어느 맑은 아침, 주인공이 보초를 서고 있는데 초소 앞에서 날아다니는 나비가 참으로 사랑스러워 보입니다. 그리하여 고향생각에 젖은 채 무심코 그 나비를 잡으려고 손을 내밀다가 적병에게 발각되어 적병이 쏘는 총에 맞아 죽게 됩니다.
이렇게 소중한 한 생명이, 한 가정의 소중한 아들이, 소중한 형이 그리고 소중한 동생이, 그리고 소중한 친구가 죽어 갔는데도 그날 본부에 보고된 보고서에는, “서부전선 이상 없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영적인 전선에는 이상이 없습니까? 지금 영적인 커다란 문제가 있음에도 여전히 우리는 자신에게 내 영적전선에는 이상 없음하고 무시하고 회피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이 말씀으로 우리를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남의 탓을 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다가갑시다. 그리고 따뜻한 손길, 부드러운 말 한마디를 먼저 건네 봅시다. 너와 나의 담이 허물어지고 우리가 되는 것 그것을 하나님은 원 하십니다. 정말로 하나님 앞에 우리 영적 전선 이상무라는 기쁨의 보고를 드리기를 간절히 축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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